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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8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As the Deer-The Maranat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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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1-27 ㅣ No.917

 

Triumph of St Thomas Aquinas-GOZZOLI, Benozzo

1471, Tempera on panel,230x102cm. Paris

Italian painter, Florentine school (b. cca. 1420, Firenze, d. 1497, Pistoia)

 

 

축일 : 1월 28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St Thomas Aquinas

성 토마스 데 아퀴노 St. Thomas de Aquino

사제,신학자. 이탈리아,1274년.도미니꼬회 학교,학생의 주보

 

 

여러 교회 박사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일 것이다. 그는 1266년 이탈리아 아퀴노 교외 로카세카 가족성(城)에서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란돌프(Landulphus)라는 분이었는데, 황제 프리디리히 바르바로사에게는 조카가 되고, 하인리히 6세는 종형제(從兄弟)에 해당된다. 또 어머니 테오도라(Theodora)는 노르만디의 제왕을 친척으로 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도 로베르토 기스갈도나 달글레토와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러나 장차 도미니코 수도원에 들어가서 가난하고 검소한 수도 생활을 보내려고 하던 토마스에 있어서는 그런 것은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토마스가 다섯 살 때에 그의 아버지는 교육을 시키기 위해 그를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에 보냈다. 그 수도원장도 역시 란돌프라는 분으로 역시 아퀴노의 집안이었다. 어린 토마스는 덕행이나 학문 면에 놀랄 정도로 많은 진보를 했다. 그는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에도 종종 학문상의 의문이 머리에 떠오르면 즉시 놀음을 그치고 스승에게 달려가서 질문하는 것이었다. 이같이 해서 그는 10세 때 이미 보통의 17, 8세의 소년보다 더 많은 학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수도원장 란돌프는 아직 언리 토마스를 나폴리의 대학에 입학시켰다. 그 대학은 당시 학생들의 풍기가 나쁜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었지마, 토마스는 어떠한 유혹에 대해서도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깊었던 만큼, 그의 마음은 언제나 고상한 것 만을 찾게 되어 세상사물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마음을 붙이는 법이 없었다.

 

그는 특별히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모께서도 늘 그를 보호하셨다. 그가 도미니코회에 들어가는 데도 성모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토마스는 14세 때 양친 몰래 그 수도원에 들어갔다.

 

 

성 도미니코(축일 8월8일.게시판590번)

도미니코수도회www.opkorea.org

 

그런데 그의 부모는 독실한 신자이기는 했지만 자녀를 수도자로 만들 생각은 없었고 더군다나 도미니코회는 아직 새로운 수도원이었던 만큼 토마스가 무단 입회한 것을 알게 되자 대단히 분노하여 어머니 테오도라는 즉시 아들을 데리러 나폴리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토마스는 그때 장상의 명령에 의해 로마를 출발해 파리로 향해 떠나고 있었으므로 어머니는 점점 대노하여 토마스의 두 형인 란돌프와 라이노르도에게 그의 뒤를 쫓게 했다. 그들은 토마스를 붙잡자마자 이유 없이 죄수처럼 15개월 동안이나 로카세카(Rocca Secca)성에 처넣어 버렸다.

 

그의 견고한 의지와 경건한 생활에 우선 감동한 것은 그의 자매들이었는데, 하루는 그를 광주리에 숨겨 성의 창문을 통해 내려보내 유폐(幽閉)의 장소에서 도망가게 했다. 그는 급히 수도원에 돌아와서 그 후 다시 국경을 넘어 외국에 피신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 교황의 권고도 있고 해서 양친도 부득이 그에게 수도 생활을 허가하게 되었다.1244년에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1245년에 다시 도미니코 수도회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토마스는 그 후 독일의 쾰른 시에 가서 유명한 교회 박사 성 대 알베르토의 제자가 되었지만 경건하고 겸손하고 침착한 그는 처음에는 같은 제자 동료 중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밖에 안 보였다. 그러나 그의 예민한 재지(才智), 그의 탁월한 덕은 기회 있을 때마다 찬란한 빛을 발휘하여 머지않아 아무도 그를 당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 대 알베르토 축일:11월15일. 게시판753번*

*성 라이문도 페냐포르트 축일:1월7일. 게시판843번*

 

1245년 그는 파리로 유학을 명령받고 그곳의 유명한 대학에서 연구하기로 되었다. 그는 파리의 도미니코회의 한 수도원에 기숙하고 매일 그곳에서 통학했던 것이다. 장성하자 그의 학덕도 점점 깊어지고 또한 높아졌다.

 

그는 십자가를 가장 좋은 서적이라고 칭하며 가끔 그에 대하여 묵상하고 하느님의 비추심과 은총을 받고 종교의 진리를 깨닫는 바가 심히 많았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겸손과 순명, 정결과 청빈,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덕의 거울로 존경을 받았다.

 

3년 후 그는 쾰른에 돌아가 신품 성사를 받고 그곳 신학교의 신학교수에 임명되었다. 그 후에는 나폴리, 아니니, 오르비에토, 로마 그리고 비테르보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쉽고도 심원한 서적을 저술하고, 한편 종조 파리의 여러 교회에서 강론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성왕 루이(루도비코)의 고문으로서 많은 신임을 받게 되었다. 파리 대학은 당시 전 유럽의 청년 학생을 흡수하고 있었던 만큼 토마스의 명성은 그의 저작과 더불어 삽시간에 퍼졌다.1256년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261년 교황 우르바노 4세(Urbanus IV)는 유명한 학자 토마스를 로마에 초대했다. 그리고 1264년 오르비에토에 체재 중 을 전 세계에 지킬것을 결정했다.(이 축일은 벨기에의 리유티히 주교구에서 시작하여 그 당시는 다만 두세 나라에서 지냈을 뿐이었다.) 그래서 성체 축일을 위한 미사 전례문(典禮文)및 성무 일도서에 삽입할 성체 찬미가의 편찬을 당시의 고명한 신학자 성 토마스와 그의 친우 보나벤투라(Bonaventura)에게 위탁했다. 두 사람은 편찬을 마치고 난 후 보나벤투라가 먼저 토마스의 것을 읽고 나서 그의 완전함에 놀라 자기의 것을 무용한 것으로 생각해 태워 버렸으므로 교황께서도 토마스가 편찬한 것을 애용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듬해 클레멘스(Clemens) 4세가 교황위에 등극하자, 토마스는 1259년부터 68년 사이에 “숨마 콘트라 젠틸레스”를 마무리 지으면서 그의 저작 중 가장 걸작인 “숨마 테올로지카”(신학 대전, 神學大全, Summa Theoligica)의 집필에 착수했다. 이것은 고금을 통하여 세상에 나온 신학서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한 가장 훌륭한 것이다.

 

천사적 박사라고 칭하게 된 토마스는 이 대작을 완성하는데 전후 9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그랬던만큼 하느님께서도 이 서적을 축복하시어 하루는 그에게 나타나셔서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다. 그 보수로 무엇을 원하느냐?”는 말씀을 듣고 토마스는 “주여, 당신 외에는 다른 것을 원치 않습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외 그가 자기 친구 레기날드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그는 하느님의 발현 시에 형언키 어려운 무수한 신기한 일을 보고 자기가 오랜 시간동안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그 날 부터 주님께 대한 동경심에 차라리 죽음을 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상의 명을 받들어 볼로냐나 나폴리로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274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리용에서 회의를 소집했을 때 토마스도 참석하기 위해 그 곳에 가는 도중 병을 얻어 위독하게 되었다. 이미 임종이 가까워온 것을 안 그는 “나는 수도자이므로 수도원에서 죽고 싶다”고 간절히 원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부근에 있는 트라피스트회 포사노바 수도원에 옮겼다.

 

곧 죽음이 점점 다가오자 두 세명의 친우는 아가(雅歌)의 설명을 청했다. 그는 그들의 청을 들어 말하려 했으나 이미 힘이 없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성체를 모시고 얼마 안 되어 그의 영혼은 천국을 향해 올라갔다. 그때 그는 48세였다.성 토마스는 돌아갔으나 그의 불멸의 명작은 지금 더욱 찬연히 광채를 발하고 있다.

 

그는 1323년에 요한 22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567년에는 비오 5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고, 1880년에는 레오 13세에 의해 모든 대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의 칭호는 "보편적인 박사"(Doctor Communis)이다.

레오 13세는 모든 신학생들은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고 “에떼르 빠뜨리” 칙서까지 반포했다. 그의 주요 사상은 곧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그리스도교 최대의 신학자이며,한마디로 그는 지성과 성덕의 금자탑이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고,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 간의 예리한 구분으로 특정 지어지는 탁월한 저작들이다. 그의 “마늄오푸스”와 미완성 대작인 “신학대전”은 현대 가톨릭 신학의 뿌리로 받아질만큼 위대한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

 

미담이지만 그는 1273년 12월 6일 미사를 봉헌한 뒤에 이 작업을 중지했다. 왜 저술을 중지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계속할 수 없다... 내가 쓴 모든 것은 내가 본 것, 내게 계시된 것과의 지적 능력 이외에도 지극히 겸손하고 거룩한 사람이었다."

 

그는 환시, 탈혼 그리고 계시를 체험했으며, 지금의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찬미가, 예컨대 ”빤제 린과, 베르붐 수페르눔, 라우다 시온, 아도로 데 데보테(Adoro Re Devote)"등을 썼다. 또한 주님의 기도, 사도신경 그리고 성서 일부에 대한 주해서를 썼다.

 

 

 

빛과 인도를 구하는 기도문

 

형언할 수 없는 창조주 하느님,

당신께서는 넘치는 지혜로

천사의 세 품을 만드셨고,

하늘의 놀라운 질서를 마련하셨으며,

우주 만물을 각자의 품위대로 배치하셨나이다.

 

당신께서는 빛과 지혜의 원천이시고

모든 것의 시작이라 불리십니다.

 

당신의 찬란한 빛으로

저의 지성의 어둠을 밝히시어

타고난 죄와 무지의 두 암흑을 몰아내 주소서.

 

당신께서는

어린이들의 입에서도 찬양을 자아내시니,

제 혀가 당신의 지혜를 말하고,

제 입술이 당신 축복의 은총을 쏟아내게 하소서.

 

이해의 명석함을,

보유할 수 있는 역량을,

배움의 방법과 수월함을,

해석에서는 정확함을,

말을 할 때는 충만한 은총을 주소서.

 

당신 영의 감도로 시작하게 하시고,

도중에 저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며,

마칠 때 완성하게 하소서.

 

이 모든 것을

주님이시고 사람이시며,

영원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는

천주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Triumph of St Thomas Aquinas-TRAINI, Francesco

c. 1340.Tempera on wood, 375x258cm

Santa Caterina, Pisa

 

 

 

 

♬As the Deer-The Maranatha Sing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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