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살이도 그러하겠지만 더구나 징역살이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단출한 차림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번 전방 때는 버려도 아까울 것 하나 없는 자질구레한 짐들로 하여 상당히 무거운 이삿짐(?)을 날라야 했습니다. 입방 시간에 쫓기며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걸어가면서 나는 나를 짓누르는 또 한 덩어리의 육중한 생각을 짐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일은 ‘먼길’을 떠날 터이니 옷 한 벌과 지팡이를 채비해 두도록 동자더러 이른 어느 노승이 이튿날 새벽 지팡이 하나 사립 앞에 짚고 풀발 선 옷자락으로 꼿꼿이 선 채 숨을 거두었더라는 그 고결한 임종의 자태가 줄곧 나를 책망하였습니다. 나막신에 우산 한 자루로 바람결에 머리 빗고 빗물로 머리 감던 옛 사람들의 미련 없는 속탈(俗脫)은 감히 시늉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10여년 징역을 살고도 아직 빈 몸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있으면 없는 것보다 편리한 것도 사실이지만 완물상지(玩物喪志), 가지면 가진 것에 뜻을 앗기며, 물건은 방만 차지함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마음속에도 자리를 틀고 앉아 창의(創意)를 잠식하기도 합니다. 이기(利器)를 생산한다기보다 ‘필요’ 그 자체를 무한정 생산해 내고 있는 현실을 살면서 오연(傲然)히 자기를 다스려 나가기도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릇은 그 속이 빔[虛]으로써 쓰임이 되고 넉넉함은 빈 몸에 고이는 이치를 배워 스스로를 당당히 간수하지 않는 한, 척박한 땅에서 키우는 모든 뜻이 껍데기만 남을 뿐임이 확실합니다.”(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무슨 일이든지 다 들어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묵상한다. 빈 몸에 고이는 이치를 배워 스스로 당당히 간수하지 않는 한 껍데기만 남을 것이 분명하다고 한 신영복 선생의 글에서 마음을 모아 구해야 할 것을 배운다. 나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내 것인 양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