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음동성당 게시판

* 벗 하나 있었으면(8/12) *

인쇄

박국길 [fcan] 쪽지 캡슐

2004-08-12 ㅣ No.3514

연주 제 19 주간 목요일 (2004-08-12)

독서 : 에제 12,1 - 12 복음 : 마태 18,21 - 19, 1

* 벗 하나 있었으면 *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고 호통을 쳤다.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강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마태 18,21 - ­19,1)

하고 싶지만 잘 안 되고, 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쉽게 일어나지 않는 것이 용서가 아닐까? 용서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민 신부는 인생사전에서 용서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예수님은 마태오복음에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종은 자기가 일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탕감받은 존재라는 사실은 잊고, 자기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 빚을 진 동료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빚을 갚으라고 닦달을 한다. 종은 방금 자기가 용서받고 풀려난 존재임을 잊고 있다. 용서는 자기가 늘 용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비롯한다. 인간은 용서받지 못할 일을 수없이 저질러 왔음에도 지금 버젓이 살아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끊임없이 용서를 받고 있다는 증거다.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늘 눈감아주고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 때문에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용서를 느낀 자만이 진정 남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처럼.
이런 용서는 내게 주어진 생명을 선물로 보고 내게 접근하여 오는 이웃을 선물로 보며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주변 환경을 선물로 볼 때 가능해진다. 주어진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땅이 땅의 대접을, 돈이 돈의 대접을, 인간이 인간의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되고, 진정한 너와 나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왕은 그 종을 다시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것은 협박이 아니다. 너는 용서받은 존재, 은총받은 존재임을 깨우쳐 주는 말씀이다. 너는 용서할 수 있는 존재다. 화해할 수 있는 존재다. 너는 하느님의 성전이다.”
오늘 복음에서 유난히 ‘네 형제가 저에게’라는 말씀이 떠나지 않는다. 누가 나에게 잘못을 하느냐는 것인데 나는 내 피붙이 외에는 형제 자매라고 하는 것을 참 이상하게 여긴다. 성당에서도 서로 자매님, 형제님 하고 부르는데 가끔은 거부감을 느끼곤 했다.
‘형제’의 의미가 무엇인가. 분명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서로 ‘형제’라고 하셨다. 하지만 깊이 와 닿지는 않는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을 어색해하지 않고, 나와 전혀 상관 없는 너도 역시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 형제 자매일까?
내가 너를 이렇게 바라볼 수 있다면 형제이고 자매이며 너무 고마운 벗이 되는구나 싶다. 그때 비로소 용서라는 말의 의미가 새겨질 것 같다.

백민호(서울대교구 잠원동 천주교회)



 

- 셋방살이 -

잡초처럼 살아가는 인생들이
머무를 곳은 단칸방인 셋방살이
넓디 넓은 세상바닥에
발 붙일 땅도 없어서
움츠리고 살아감도
죄도 없이 죄 지은 목숨처럼
어깨는 늘 처지고
뱃속은 늘 허전하기만 하였다.

도시의 곳곳엔 공룡의 전시장을 만들듯이
많고 많은 아파트를 짓고 있는데
헛물켜듯 바라만 보다가
연중 행사로 찾아오는 봄 그리고 가을
콧노래를 부르기도 전에
탐스런 열매를 맛보기도 전에
보증금 월세를 올리려는
집주인 마나님의 싸늘해 보이기만 한 눈빛은
이웃나라 처절한 전쟁소식보다
코 앞에 닥친 급보 중의 급보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
행복의 둥지는 쉽게 마련될 것만 같은
나이 어리고 세상물정 모르는 애숭이가
오직 사랑하는 마음과 꿈에 부푼 마음으로
신혼 살림을 시작해 수년 동안
이리저리 걷어채이듯 셋방살이를 하다 보면
통곡도 못하고 눈물을 삭이며
애증이 쌓여서 어처구니 없는
사내 꼴이 되는 일들이 많고 많았다.

온 세상을 향하여 못난
욕지거리를 수도 없이 해대며
어금니에 힘을 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가 머무를 방 한 칸 얻기가
어렵고 어려운 인생문제 물기였다.

왜 우리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가난한 사람들은
버려진 삶처럼 아무도 관심없이 외로움이 되어
머무를 곳을 찾아 철새가 되는 것이다
낯선 곳으로 값싼 곳으로
찾고 찾아 대문을 두드리면
애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하고
우리 집은 잠만 잘 사람에게
세를 준다는 이유로 말도 못 붙이고
새로 짓고 새로 도배를 했기 때문에
신혼부부에게만 방을 준다기에
마른 눈물을 흘리며 돌아설 때가
많고 많았던 슬픈 이야기 같은 삶을 살았다.

인생이란 누구든 한번 왔다 가는
머물다 가는 길인데
어차피 모든 인생은 세상살이인 것을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셋방살이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
우리네 삶은 늘 슬펐다.

어린 자식들 굴비 엮듯 줄줄이 데리고
산동네 달동네 머무를 곳을 찾아
두리번 두리번거리다
어렵사리 얻은 셋방에
한 식구 덩그렇게 앉으면
감사가 있고 웃음이 있고 사랑이 있고
애비는 가족들에게 용서를 빌며
마음에 눈물을 철철 흘리는 것이다.

신혼의 단꿈을 꾸었던 혼수이불을 넣은
장농도 상처투성이가 되어가는데
언젠가 푸른 대문에 이름 석 자 써놓을 날을
고대하며 바라며
오늘도 이 땅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삿짐이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32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