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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글] 미스테리 - 로마, 검투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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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형 [solo0001] 쪽지 캡슐

2001-02-01 ㅣ No.8004

검투사들의 비애

 

2000년 7월 19일, 그리스 국립극장은 ‘콜로세움 2000 프로젝트’의 하나로 로망의 콜로세움(Colosseum)에서 고대 그리스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공연했다. 7월 27일에는 테헤란 드라마 아트 센터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이슬람 판을 공연했다. 지난 523년에 마지막으로 공연이 있었던 콜로세움이 1,500년만에 처음으로 원형극장으로서의 역할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인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자평한 이 문화행사가 열린 이유는 콜로세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로마를 찾은 관광객들이 그 많은 유적 중에서도 가장 깊은 인상을 받는 곳은 콜로세움이다. 2,000년 전에 건설되었음에 불구하고 그 규모가 거대한 것은 물론 그곳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만행이 벌어진 현장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끼리 서로 죽음의 결투를 하거나 검투사와 야수들이 싸움을 벌였고 죄수들을 나무에 묶어 놓고 야수들이 달려들게 했다. 심지어는 물을 채워 넣고 모의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

콜로세움이 그런 목적으로 설계된 것은 지하 시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미로와 같이 복잡한 지하실에는 검투사들이 대기하던 방은 물론 맹수들을 가두어 놓았던 우리도 있다. 이것을 직접 본 사람들 모두가 로마 시대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는 모양이다.

칼과 방패로 무장하고 싸우는 검투사들. 자신이 돈을 건 검투사를 응원하는 로마 시민들. 그리고 마침내 패배한 검투사에게 죽음을 내리라는 아우성. 거꾸로 세워지는 엄지손가락. 이 모든 것이 콜로세움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일들이 과장되고 왜곡되듯이, 콜로세움에서 벌어졌던 일들 역시 심하게 과장되고 왜곡되어 전해진 것이다. 이제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을 방문해 보자.

 

【콜로세움】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은 72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공사를 시작하여 8년 후인 80년에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 완공되었다. 콘크리트와 돌로 세운 이 거대한 건물은 가로, 세로가 각각 190미터, 155미터에 이르며 4단으로 된 관람석은 4만 5천 개의 좌석과 5천 개의 입석을 갖추었다.

콜로세움에는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관중들을 보호하기 위해 베라리움이란 천막 지붕을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붕 가운데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어서 채광은 물론 환기구 역할을 했다. 관중은 지정된 입구를 통해 관람석으로 통하는 층계를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이런 좌석 배정 및 출입 통제 방법은 오늘날에도 사용된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은 그 앞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동상 ‘콜로소(Colosso)’에서 따 온 것으로 이는 ‘거대하다’는 뜻의 라틴어 콜로수스(Colossus)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형 원형극장은 로마에만 건설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님므, 아르르에도 있었고 로마인들이 진출한 독일, 북아프리카, 소아시아는 물론 예루살렘에도 있었다. 예루살렘의 원형 극장은 헤롯 대왕이 건설했다.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이라고 하였다. 콜로세움이 완공되었을 때, 기념 흥행으로 100일에 가까운 투기(鬪技)가 열렸다고 한다. 그러나 공사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고 네르바 황제와 트라야누스 황제 때에도 개축 또는 증축 공사를 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의 벼락을 맞아, 그때마다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6세기 전반까지 행해졌다.

‘콜로세움이 멸망할 때 로마도 멸망하며 세계도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콜로세움이 건설되었을 때 로마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 해안으로부터 약 18마일 떨어진 티베르 강가에서 출발한 로마는 끊임없이 외부의 적과 싸우면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국가였다. 그러나 국토가 확장되고 외국의 노예가 들어오면서 로마인들은 노동을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평원을 울리던 전투의 함성이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를 응원하는 아우성으로 바뀌었을 때, 로마의 진취적 기상은 이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로마는 게르만인이나 한니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 때문에 무너질 것이다’라고 했던 호라티우스의 예언은 콜로세움에서 실현되기 시작했다.

 

【로마의 동물 서커스】

 

원형극장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검투사들의 죽음의 결투, 동물들끼리의 잔혹한 싸움, 사형수나 무고한 기독교도들을 야수가 잡아먹게 했다는 으스스한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 사실 자체는 모두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원형 경기장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과 동물들의 결투나 여러 동물을 갖가지 방식으로 짝지어 서로 싸우게 했다는 것은 매우 과장되거나 거짓말로 점철된 것이다. 왜냐 하면 그런 잔인한 묘사의 이면은 대체로 로마 문화의 윤리적 퇴폐를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이 만든 재미난 오락은 동물 서커스였다. 이 동물 서커스가 어느 정도로 인기가 있었는지는 플루타르크가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동물 쇼를 기록할 정도였다. 그는 특히 동물들이 영특하다고 적었다.

사람들이 동물 위로 올라가 춤을 추거나 체조를 하기도 하고 동물들이 직접 뒷발로 일어서거나 물 속에서 곡예를 하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바다표범이나 사슴, 영양, 원숭이, 개 등도 조련을 받아 각가지 쇼에 등장했다. 표범이 멍에를 지고 영양과 나란히 서서 수레를 끈다. 투기장에 끌려 나온 사자는 토끼를 사로잡아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아기 사자를 다루듯이 상처를 내지 않도록 그저 이빨로 살짝 몰고만 있어야 했다. 곰이 가마에 올라타면 네 마리의 코끼리가 네 사람의 온순한 노예처럼 자기 등에 이 가마를 태웠다. 표범, 곰, 이리 역시 이처럼 길들여 쇼에 내보냈던 것이다.

코끼리 공연은 특히 인기가 있었다. 코끼리들이 무릎을 꿇고 않는 모습, 무리를 지어 춤을 추는 모습, 식탁에 앉는 모습, 긴 코로 투기장의 모래 위에 그리스어나 라틴어 문자를 쓰는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다.

소(小) 플리니우스의 표현에 의하면 마구(馬具)를 단 길들여진 표범이 전차를 끈다든가 훈련된 코끼리가 황제의 관람석 앞에 무릎을 꿇고 코로 모래땅에 라틴어를 쓰는 등의 묘기를 보였을 때 관중들이 박수를 쳤다고 적었다.

물론 조련을 받아 온순해진 동물의 쇼는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매력을 잃게 되었다. 사람들은 보다 자극적인 경기가 요구했고, 코뿔소와 코끼리의 싸움, 곰과 물소의 결투가 벌어지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투는 특별한 축제에만 벌어졌다.

동물끼리의 싸움도 시시하게 느껴지자 인간과 동물이 싸우는 경기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사람은 보통 갑옷을 입지도 않았고 방패나 작은 칼만 갖고 싸웠다. 사람과 사자의 싸움은 인간이 주로 승리했으나 사자가 승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을 엄밀히 검토해보면 사람이 맹수와 싸운 것은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에 한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인간과 사자 싸움에서 인간이 주로 승리했다는 것은 그만큼 경기장에 나선 사람이 결투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도 이와 같은 일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다. 바로 투우이다. 투우에 대해 인간과 야생 동물과 같이 길러진 투우와 투우사가 격돌하는데 투우사가 거의 전부 이기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종종 투우가 승리하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그 위험성 때문에 스릴과 흥분을 관중에게 준다고 투우를 예술이라고 칭찬하는 사람의 변이다. 실제로 유명한 투우사일수록 투우와의 싸움에서 희생되며 투우사 자신도 투우와 싸움하는 순간에 죽는 것이 가장 영광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진 야수와의 싸움도 투우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콜로세움에서 선보인 동물들은 악어, 하마, 기린, 타조, 사자, 이, 코뿔소 등이다. 이런 동물은 포획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서조차 사로잡기가 매우 어렵다. 그런데 이렇게 굉장히 어렵게 사로잡은 동물들을 곧바로 죽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당시에는 이런 동물들을 로마의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주안점이었다.

당시 로마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중앙 정부로부터 요구받은 수량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는 것은 수많은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오늘날 터키의 일부인 킬리키아의 책임자를 지낸 키케로는 표범을 더 보내 달라는 독촉에 항의하기도 했다. 그의 항의는 사냥꾼들이 더 이상 동물을 사로잡는 데 투입할 수 없을 정도로 박해받고 있다고 적었을 정도였다. 이렇게 어렵게 잡은 야수들을 하루에 수백 마리씩 살해했다면 몇 백 년 동안이나 그런 경기가 열릴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검투사들의 결투】

 

콜로세움이라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간과 인간의 경기, 즉 검투사끼리의 경기를 연상한다. 검투사끼리의 목숨을 건 격투에 대해서는 많은 그림과 자료들이 있으므로 그런 사실 자체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흑인끼리의 싸움이 벌어졌는가 하면 때론 여자와 난쟁이가 싸우기도 했다고도 한다.

악명 높은 갈리쿨라 황제가 살해되자 다음 황제로 추대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황비인 멧살리나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탕녀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왕비가 황비가 되기 전에 검투사 출신이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검투사는 포로, 노예, 죄인으로 훈련소에서 철저히 단련되었고 검투사들을 양성하는 전문 기관이 세워졌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검투사가 모든 경기에서 ‘도 아니면 모’ 식으로 죽음의 결투를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류층 자제들이 원형경기장에서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경기에 참가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명상록』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인 코모두스도 그런 예 중에 하나이다. 그는 로마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로 인정받기 위해 1천 회 이상 투기장에서 싸웠다. 그 중 355회는 아버지가 황제로 있을 때였으며 735회는 자신이 황제일 때였다. 그가 검투사와 싸워서 단 한 번도 살해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며 그렇다고 그와 결투한 상대자가 모두 살해된 것도 아니다.

실제로 코모두스는 돈을 걸고 싸우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는 결투에 나설 때마다 검투사들의 공동기금에서 50만 세스테르츠를 송금하도록 시켰다. 코모두스는 ‘로마의 헤라클레스’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이 선망하던 당시의 유명한 검투사인 파울루스의 이름을 자신의 동상 밑에 새기기도 했다. 검투사들의 인기가 어느 정도로 높았는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패배자가 항상 살해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로마에 남아있는 검투사가 직접 쓴 낙서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원형극장에서 20여 번의 결투에 참가했는데 6번을 패배했다고 적었다.

검투사들은 오늘날의 프로 스포츠에 출전하는 선수와 다름이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검투사에 돈을 걸었다. 검투사들이라는 직업 자체가 로마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으므로 유능한 검투사는 매우 돈을 많이 벌었다. 실제로 검투사로서 성공하여 은퇴한 돈 많은 주인을 부러워하는 낙서도 남아있다. 폼페이의 건물들 벽에 씌여진 낙서에는 셀라두스라는 트라키안족 출신의 검투사가 로마 여자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적혀 있다.

로마의 그림들을 보면 어른들이 사냥에서 황소나 코뿔소에 올가미를 걸었듯이 어린이들이 산토끼를 사냥하는 장면이 나온다. 로마의 어린이들은 양이나 염소, 개가 끄는 2륜차를 타고 놀면서 전차 경주의 기수가 되는 것을 동경했다. 이것은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진 당시의 검투나 경기가 모두 위험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현재나 옛날이나 자식들이 모두 죽는다는 검투 경기에 참가하려고 연습을 한다면 허락할 부모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검투사들의 싸움이 죽음의 결투만은 아니었다는 것은 로마인들의 성향과도 관련된다. 로마의 남자들은 상처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검투사들끼리의 싸움에서 패배자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패배자가 비겁한 행동을 했을 경우에 한했다.

기독교인들을 원형극장에 넣어 야수들의 밥이 되게 했다는 것도 사실 매우 과장된 것이다. 여기에서 로마의 콜로세움만을 대상으로 하면 『쿼바디스』와 같이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콜로세움에 몰아 넣고 사자를 비롯한 야수들이 공격하게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우선 콜로세움이 세워진 것이 기원 80년이라는 것은 『쿼바디스』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아무런 방어 능력이 없는 기독교인들을 동물들이 살해하라고 만드는 것 자체가 그다지 자극적이거나 흥미를 끌지 않는다는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이다. 그런 처형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로마인들은 십자가에 기독교인들을 매다는 것이 더 교훈적이라고 생각했다.

 

- 스파르타쿠스 -

 

자원한 검투사들, 즉 자유인이 아닌 노예나 포로들로 구성된 검투사들의 생활이 매우 가혹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로마의 검투사였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스파르타무스는 트라키아 사람으로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광산에서 일했지만 거인이고 근육과 뼈대가 단단했기 때문에 유명한 남이탈리아 캄파니아의 카푸아 검투사 양성소의 검투사로 팔려갔다. 로마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체력뿐만 아니라 정신력도 우수해서 노예라기보다는 오히려 교양 있는 그리이스인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그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간단하다. 검투사로서의 운명이 그다지 밝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참을성 있게 검투사의 반란을 준비했다. 검투사들도 인간임을 일깨워 주며 검투사들을 몇 개의 분대로 나누고 각각 숙련된 분대장을 정했다. 검투사들이 참을성 있게 반란과 같은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검투사들이 항상 죽음을 놓고 격투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또다시 알려준다.

그런데 스파르타쿠스의 비밀스러운 반란 음모는 그만 발각되고 만다. 그들의 반란 기미를 알아차린 로마인들은 곧바로 검투사 양성소를 포위하고 반란 음모자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78명의 동료와 함께 탈출한다. 이때가 기원전 73년이었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연대는 콜로세움이 건설되기 100년 전의 일이다.

그들이 베수비어스 산에 근거지를 잡자 수많은 검투사와 노예들이 몰려들었다. 로마 군은 산 정상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봉쇄했다. 그러나 이들은 검투사 양성소에서 무술 훈련을 받은 직업적 검투사였으므로 다른 반란군에 비해 훨씬 강력하고 용감했다. 로마군이 노예군을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며 안심하는 사이 스파르타쿠스는 부하들을 이끌고 로마군을 격파했다. 세가 불어나기 시작한 노예군은 곧바로 이탈리아를 진군하면서 계속 로마군을 격파했고 많은 도시들이 노예군에게 항복했다.

스파르타쿠스의 목표는 이탈리아 밖으로 노예들을 데리고 알프스 산을 넘은 다음 그들을 각자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부하들에게 약탈 행위를 금지시키고 주로 무기를 탈취하는 데 주력했다.

그런데 로마군에게 여러 번 승리를 거둔 노예들이 그의 제안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를 짓밟아서 로마인들에게 복수하는 것과 그들의 재산을 빼앗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에게 한을 만들어 주었던 로마인들을 철저하게 부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구나 스파르타쿠스는 약탈과 살인을 금하고 엄격한 규율을 지키도록 했는데 이것은 반란에 참가한 일부 노예군들에게 사기저하를 초래하는 일이었다.

스파르타쿠스는 북이탈리아를 거쳐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나 트라키아로 들어갔는데 여기에서 방향을 돌려 이탈리아로 다시 내려왔다. 이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식량 부족이거나 노예군 대다수가 이탈리아를 떠나려고 하지 않으려고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레기움까지 남하해서 시칠리아 섬으로 건너가려고 소아시아의 실리시아 해적들과 계약을 맺는다. 그러나 해적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이탈리아 탈출은 실패하고 로마의 유명한 크라수스 장군과 남부 이탈리아의 아플리아에서 운명의 결전을 벌인다.

노예군의 숫자는 로마의 빈민까지 합쳐서 12만 명이나 되었지만, 전열을 정비한 로마 정규군에게는 어림없었다. 크랏수스는 노예군을 포위해서 격파하기 시작했다. 스파르타쿠스를 포함한 6만 명이 로마 군과의 전투에서 죽었다. 나머지 반란군들 중 일부만 도망치고 모두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노예군 6천 명은 로마에서 카프아까지 이르는 도로에 설치된 십자가에 모두 못 박혔다.

이때 도망친 5천 명의 노예군은 북쪽으로 이동했으나 마침 이베리아 반도에서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하고 귀국 중이던 폼페이우스와 만나 전멸한다. 이 사건의 영향은 매우 컸다. 노예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로마에 대한 반란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노예가 된 사람만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노예가 된 민족도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로마는 각지에서 일어나는 진압군을 효율적으로 파견하기 어렵게 되자 반란군에 반대하는 민족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정복당한 사람들을 자유로운 사람들과 싸우게 한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인 실책이 된 것은 물론이다.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채용된 게르만 인이나 갈리아인 용병들은 처음에 로마의 명령을 순순히 들었지만 차차 로마의 능력을 알게 되자 오히려 로마에게 비수를 들이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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