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꼭필독]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 사이의 관계 [완미한 회개, perfect repentance] 773_love 1032_hea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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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8.55.90.*] 2014-09-11 ㅣ No.1574 게시자 주: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74.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질문 1:
다음은 새 번역 성경의 마태오 복음서 18,15-20 입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6048&gomonth=2014-09-07 (발췌 시작)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이상, 발췌 끝)
그리고 다음은 새 번역 성경의 마태오 복음서 18,21-35 입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4865&gomonth=2011-09-11 (발췌 시작)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이상, 발췌 끝)
이들 두 부분들에서 죄를 지은 형제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이 주어지고 있는데, 문제는, 죄를 지은 형제에 대하여, 마태오 복음서 18,15-20에서는 용서하라는 말씀이 전혀 없는 반면에, 마태오 복음서 18,21-35에서는 심지어 용서하는 횟수를 세지 말고 무한히 계속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기에, 언뜻 보기에, 서로 상반되는 말씀들을 하고 계시는 듯하여, 헷갈립니다.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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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 찬미 예수님!
원 주소: http://trinitas.mju.ac.kr/frames/fiatlux2000.jpg
1. 들어가면서 1-1. 우선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마태오 복음서 18,15-20은 가해 연중 제23주일 복음 말씀 [그리고, 매년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복음 말씀]으로 발췌되고, 곧바로 이어지는 마태오 복음서 18,21-35는 또한 곧바로 이어지는 가해 연중 제24주일 복음 말씀 [그리고 매년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마태오 18,21-19,1)에 포함됨]으로 발췌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각각의 내용은 이미 미사 중의 강론에서 국내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잘 전달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2. 그러나 위의 질문 1처럼, 언뜻 보기에, 서로 상반되는 듯한 이들 두 단락들 전체에 걸친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예수님의 의중대로(즉,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예를 들어, 이들 두 단락들에 대한 이어지는 이들 두 주일들의 미사 중의 강론 말씀들을 주의깊게 듣고서 묵상하신 분들 중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질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1-3. 이 질문 1에 대한 답변을 위하여, 이어지는 제2항에서는, (i) 이들 두 단락들의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전후 문액의 파악, 그리고 (ii) 이들 문맥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결코 무시하거나 간과할 수 없는 중요 단어들의 자구적 어의/의미(literal sense)와 이 의미에 근거한 영성적 어의/의미(spiritual sense)가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이 이미 수용한, 따라서 신뢰할 수 있는 문헌들에서 정의되어 있다면, 또한 이들에 대하여 학습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18일] (iii) 그리고 하느님께서 저자이시기에 무류한 성경의 해당 본문들이,
위의 질문 1에 대한 답변을 고찰할 때에, 혹시 이와 관련된 어려움이 있는지도 또한 고찰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2. 2-1. 다음은 마태오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기도(마태오 6,9-13) 중의 제12절(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lent_1_tue.htm (발췌 시작) 12. "Debts": clearly, here, in the sense of sin. In the Aramaic of Jesus' time the same word was used for offense and debt.
12. "잘못들(Debts)": 분명히, 여기서, 죄(sin)의 의미에 있어서 입니다. 예수님 시기의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1: (1) 바로 위의 제2-1항의 설명은, 다음에 있는, "잘못들"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단어의 어원 설명과도 일치합니다: http://biblehub.com/greek/3783.htm
(2) 그리고 다음은 마태오 복음서 6,12에서 '잘못' 이라는 번역 용어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 전문입니다. 그리스어 단어의 사용과 관련된 당시의 배경 설명과 함께, '빚' 으로 번역하지 않은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발췌 시작) 앞 행의 "잘못한" 과 이 "잘못" 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성경의 언어에서나 일반 언어에서나, 사람들 사이의 법적, 상업적 채무를 뜻한다. 이러한 빚은 옛날에는 특히 심각한 것으로서, 채무자 자신이나 가족이 종으로 팔려가거나 감옥에 갇힐 수도 있었다(18,23-35 참조). 이러한 표상이 유다교에서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상황을 규명하는 데에 이용된다. 하느님은 채권자이시고 인간은 지불 능력이 없는 채무자라는 것이다. 같은 표상이 죄인의 상태를 가리키게도 된다(루카 13장 2절과 4절 비교). 현대 사회에서는 빌리고 빌려 주는 것이 일상사이기 때문에, '빚'으로 옮기면 이러한 표상을 약화시키게 된다. 그래서 "잘못" 이 하느님께 끼친 손상과 죄인의 가련한 처지를 더 잘 드러낸다고 판단된다.
2-2. 그리고 다음은 마태오 복음서 18,15와 18,21에서 '죄' 로 번역된 동일한 그리스어 단어, amart?sei, 의 어원 설명 전문입니다:
출처들: http://biblehub.com/lexicon/matthew/18-15.htm http://biblehub.com/lexicon/matthew/18-21.htm http://biblehub.com/greek/264.htm (발췌 시작) hamartanó: to miss the mark, do wrong, sin [과녁을 벗어나다, 나쁜 짓을 하다, 죄를 짓다]
Original Word: ?μαρτ?νω
짧은 정의: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정의: 원래: 제가 과녁을 벗어났습니다. 따라서 (a) 제가 어떤 실수를 하였습니다, (b) (하느님에 반하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어떤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한 명의 동료인 피조물에 반하여 어긋난 행동을 하였다는 생각이 [이 단어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is present). (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들에 대한 우리말 번역 끝)
2-3.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관심사, 關心事)"을 구현하고자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면, 이것을, 베드로가 "사람의 일(관심사, 關心事)만"을 생각하면서, 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론을 제기함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직접 지적하는 바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가해 연중 제22주일 복음 말씀(마태오 16,21-27)의 제23절[너는 하느님의 일(관심사, 關心事)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관심사, 關心事)만 생각하는구나!](*)에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이 절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이,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이어지는 가해 연중 제23주일 복음 말씀과 제24주일 복음 말씀들의 내용을, 아무런 모순 없이, 예수님의 의중대로, 영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clue) 라는 생각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0월 22일] -----
(발췌 시작)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이러한 "생각"이나 관점의 대립이 나타난다는 견해는 구약 성경과 예수님의 시대의 유다교에 그 뿌리를 둔다. (이상, 발췌 끝)
(2) "새 번역 성경"의 마태오 복음서 16,23에서의 "사람의 일만" 에서의 "만" 은,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임의적으로 삽입된 강조의 표현이므로, 무시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상, 2014년 10월 22일자 내용 추가 끝]
무슨 말씀인고 하면,
2-3-1. 마태오 복음서 18,15에서 "하느님의 일(관심사, 關心事)"을 구현하고자 하신 예수님의 직접 말씀 중의 "죄" 는 하느님에 반하여 저지른 죄를 말하나 [주: 대화법(對話法, dialogue) 혹은 변증법(辨證法, dialectic)에 있어 정(正)에 해당함],
2-3-2.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이어지는 마태오 복음서 18,21에서의 베드로의 질문은, "하느님의 일(관심사, 關心事)"을 구현하고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에 대하여 [주: 대화법(對話法, dialogue) 혹은 변증법(辨證法, dialectic)에 있어 정(正)에 해당함] 베드로가 올바르게 이해하기는 커녕, 베드로가, "사람의 일(관심사, 關心事)만"을 생각하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일(관심사, 關心事)"을 구현하고자 하신 말씀 중의, 하느님의 법(the divine law)에 반하는 "죄"를, 예수님의 의중과 무관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임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자연법에 근거하는 인정법(human law)에 반하는 "사람들 사이의 죄/잘못"로 잘못 이해하여, 더 나아가, 바로 직전의 예수님 가르침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미로 던진, 반론의 질문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주: 대화법(對話法, dialogue) 혹은 변증법(辨證法, dialectic)에 있어 반(反)에 해당함].
2-3-3. 바로 이러한 베드로의 반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구현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일(관심사, 關心事)" 이 바로 지상에 "하늘 나라의 도래(the coming of the kingdom of heaven)" 임을 구체적으로 밝히시고자, "하늘 나라"에 대한 또다른 비유(parable)를 마태오 복음서 18,23-35에서 말씀하셨다는 생각입니다. [주: 대화법(對話法, dialogue) 혹은 변증법(辨證法, dialectic)에 있어 합(合)에 해당함].
게시자 주 2-3: 위의 제2-3항에서 말씀드린 바는 가톨릭 교회의 가해 연중 시기 전례력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에 발췌된 표를 참고하십시오:
출처 1: http://www.liturgyoffice.org.uk/Resources/Rites/Lectionary.pdf 출처 2: http://org.catholic.or.kr/conservatory/frames/mp34todayreading.shtml [출처 1의 출처] TABLE I 연중 시기에 있는 주일들을 위한 복음 독서를 위한 순서
YEAR A: YEAR OF MATTHEW 가 해: 마태오의 해
In order to do justice to the intention of the Lectionary, the five great ‘sermons’ in Matthew’s
이 독서집/전례 성경(Lectionary)의 의도를 정당하게 다루기 위하여, 마태오의 복음서에 있는 다섯 개의 '설교들'은 장차 필연적으로 설교 행위와 가르침의 초점들이 될 것입니다. 설교들 사이에 자리잡혀져 있는 이야기 부분들은 전체 저술에 있어 한 개의 단일성 및 일관성이 있는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Discourse and narrative stand side by side, so that the narrative chapters prepare the way
강화(講話)와 이야기는 나란히 서 있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이야기의 장들은 강화(講話)들에서 뒤따르는 바를 위한 도정(道程, the way)을 준비합니다. 그 안에서 이 독서집/전례 성경이 마태오의 복음서의 구조를 이미 반영한, 이 도정(道程)을 알아차림은 설교가들과 독자들이 한 주(one week)로터 그 다음 주로 독서들의 문맥을 보는 것을 장차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중간 생략)
제5단위 지상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 - 그리스도의 교회 주일들 18-24
Narrative(이야기):
Discourse(강화, 講話): (이하, 생략) (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들에 대한 우리말 번역 끝)
2-4. 바로 위의 제2-3항에서 말씀드린 바는, 이들 두 개의 언뜻보기에 상반되는 듯한 해당 본문들 자체가 또한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면,
2-4-1. 마태오 복음서 18,15-20에서 "하느님의 일(관심사, 關心事)"을 구현하고자 하는 예수님에 의하여 직접 말해지고 있는 죄는 하느님께 반하여 저지른 죄이기에, (i) 침범을 당한 당사자로서 하느님과 (ii) 하느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직무로서 위임받은 피조물인 인간들 (즉, 열두 사도들)과 이들의 적법한 후계자들 (즉, 주교들) 그리고 이들 후계자들의 권한을 직무로서 위임받은 자들 (즉, 사제들) 이외의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 반하여 저지른 죄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용서해 줄 권한이 없고, 그리고 또한 이 죄를 범한 자가 회개/참회(repentance)와 함께,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적법한 절차를 밟으면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여야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여야(read between the lines) 하는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그러나 이와는 달리,
2-4-2. 만약에 마태오 복음서 18,21-35에서 베드로에 의하여 직접 말해지고 있는 죄가 하느님께 저지른 죄이었더라면, (i) 침범을 당한 당사자로서 하느님과 (ii) 하느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이러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직무로서 위임받은 피조물인 인간들 (즉, 열두 사도들)과 그의 적법한 후계자들 (즉, 주교들) 그리고 이들 후계자들의 권한을 직무로서 위임받은 자들 (즉, 사제들) 이외의 어느 누구도 이 죄를 용서해 줄 권한이 없고, 그리고 또한 이 죄를 범한 자가 회개/참회(repentance)와 함께,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적법한 절차를 밟으면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여야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 결코 마태오 복음서 8,22과 같이 답변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여, 마태오 복음서 18,21과 같은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전지(全知)한(omniscient)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서 8,22과 같이 답변하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사람의 일(관심사, 關心事)만"을 생각하는 베드로에 의하여 여기서 직접 말해지고 있는 죄는 하느님의 법에 반하여 저지른 죄가 아니라, 한 피조물인 인간이 피조물인 다른 인간에게 저지른 잘못/어긋난 행동, 즉, 인간에 대한 잘못/어긋난 행동임을 독자들인 우리에게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2-4-3. 위의 제2-4-1항과 제2-4-2항에서 말쓰드린 바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불리는 두 명의 당사자들만의 관계에 있어, 원래의 갈등이 없는 선한 상태로의 관계 회복을 지향하는 화해(reconcilliation)를 위한 절차 중에 등장하는 바가 바로 용서(forgiveness)로 불리는 바임을 유념한다면, 더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로 불리는 두 명의 당사자들만의 사이에 있어,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용서가, 세례(Baptism)라는 대단히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절차에 있어,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피해자에게 용서를 청할 경우에,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원래의 갈등이 없는 선한 상태로의 관계 회복을 위한 진정한 의미의 화해(reconcilliation)를 더욱 더 잘 산출할 수 있을 것임을 인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서 5,23-24을 읽도록 하십시오.
게시자 주 2-4-3: 일부 독자들에게 혹시라도 약간의 도움이 될까하여 추가로 말씀드립니다만, 바로 위의 제2-4-3항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물리학에 있어 한 개의 원자(atom)와 한 개의 전자(electron)로만 이루어진 수소(Hydrogen)에 대한 보아 모델(Bohr Model)을 연상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일반적으로, 단지 두 개의 입자들만의 사이의 상호 작용(interaction)은 그리 어렵지 않게 수학적으로 규명될 수 있고 또 설명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2-4-4. 그런데 형이상학적 대상(objects)들 사이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갈등에 관한 한,
(i) 하느님, (ii) 가해자인 피조물인 인간, 그리고 (iii) 피해자인 피조물인 인간,
이렇게 적어도(at least) 세 개의 구분되는 대상들 사이의 관계(즉, 삼각 관계)에 있어서의 문제이기 때문에, 위의 제2-4-3항에서 말씀드린 경우가 결코 포함 할 수 없는 또다른 상황들이 이들 세 대상들 사이에서 전개될 것임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는지요?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15일] 무슨 말씀인고 하면, 어떤 형제가 자신의 형제에게도 잘못/어긋난 행동을, 시간적으로 및 공간적으로, 동시에 혹은 별도로 하였을 경우에, 가해자의 잘못/어긋난 행동을 피해자가 아닌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때에, (i) 하느님 및 피조물인 피해자 둘 다에게 잘못/어긋난 행동, 혹은 (ii) 하느님께 잘못/어긋난 행동은 아니고 오로지 피조물인 피해자에게만 잘못/어긋난 행동일 수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이들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피조물인 가해자가 하느님께 저지른 죄는 피해자인 하느님께서 다스릴 것이므로(위의 제2-4-1항), 피조물인 가해자가 피해자인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 일에 대하여서는 신경쓰지 말고, 피해자인 형제는, 피조물인 가해자가 하느님께 저지른 죄가 아닌, 단지 피조물인 가해자가 자신에게 잘못/어긋난 행동에 한정하여, 심지어 용서하는 횟수를 세지 말고 무한히 계속 용서해 주라는 것이, 바로 마태오 복음서 8,21-35의 가르침이라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가해자에 대한 용서는, 근본적으로, 피해자 당사자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게시자 주 2-4-4: 이제, 지금 바로 위의 제2-4-4항에서 지적한 바를 유념하면서, 이 글의 제목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 사이의 관계" 를 다시 읽어 보도록 하십시오. 애초에 이 글을 작성하기 전에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이미 생각하고 있었던 바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는 이 글의 제목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하여,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실 수 있으리랴 생각되며, 따라서 이어지는 제3항부터가 이 글의 본론에 해당합니다.
3. "사람의 일(관심사, 關心事)만"을 생각하는 베드로와는 달리, "사람의 일(관심사, 關心事)"을 당연히 포함하는 "하느님의 일(관심사, 關心事)"을 생각하시는 예수님이 마태오 복음서 18,15-20에서 말씀하실 때나 마태오 복음서 18,21-35에서 말씀하실 때나, 항상 위의 제 2-4-4항에서 말씀드린 상황(즉, 삼각 관계)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던 것은 분명합니다.
3-1.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 18,15-20의 문맥은 가만히 들여다 보면, 하느님께 죄를 지은 자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 쪽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황이 예수님과 하느님께 죄를 지은 자 이렇게 두 명의 대상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의 문제로 귀착되므로, 결국에 위의 제2-4-3항에서 말씀드린 상황으로 귀착됨을 알 수 있으며, 그 해답이 마태오 복음서 18,15-20에 이미 주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2. 그러나 마태오 복음서 18,21-35의 문맥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 (*) 게시자 주: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으로 번역된 "contingent" 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우리도 자신에게 잘못한 형제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 (마태오 복음서 18,33) 즉, 자신에게 잘못한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하느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마태오 복음서 18,33)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에게 잘못한 형제를 심장(heart, 心腸)으로부터 용서하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마태오 복음서 18,35)
게시자 주 3-2: (1) 다음은 마태오 복음서 18,35를 직접 인용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843항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4s2a3.htm (발췌 시작) 2843 Thus the Lord's words on forgiveness, the love that loves to the end,142 become a living reality. The parable of the merciless servant, which crowns the Lord's teaching on ecclesial communion, ends with these words: "So also my heavenly Father will do to every one of you, if you do not forgive your brother from your heart."143 It is there, in fact, "in the depths of the heart," that everything is bound and loosed. It is not in our power not to feel or to forget an offense; but the heart that offers itself to the Holy Spirit turns injury into compassion and purifies the memory in transforming the hurt into intercession.
2843 따라서, 사랑 행위(love)의 끝까지 사랑하는(love) 바로 그 사랑의 행위[love, amore(라틴어 정본), Amour(프랑스어본)]인, 용서(forgiveness)(*)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한 개의 살아 있는 실재(reality)가 됩니다. 교회의 통공/하나 됨(ecclesial communion, communione ecclesiali, 敎會共融)(**)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에 왕관을 씌우는, 무자비한 종(merciless servant)에 대한 비유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너희가 자기 형제를 자신의 심장(heart, 心腸)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들 각자에게 또한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오 18,35). 모든 것이 묶이고 또 풀리는 것은, 사실, "심장(心腸)이라는 깊은 곳(the depths of the heart)/진심(眞心)"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어떤 침범/거슬림(an offense)을 느끼지 않거나(not to feel) 혹은 잊는 행위(to forget)는 우리의 힘/능력(power)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hurt)를 전구(intercession)로 변화시킴에 있어 해당 상해(the injury)를 연민(compassion)으로 바꾸고 그리고 해당 기억(the memory)을 정화하는, 그 자체를 성령께 봉헌하는, 심장(the heart, 心腸)에 있습니다.
----- (*) 번역자 주: (1) 여기서, "하느님에 반하는 죄(sin)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인간의 용서(容恕)(human forgiveness)" 의 정의(definition)가 주어지고 있다:
"인간의 용서(容恕)(human forgiveness)"
사랑 행위(love)의 끝에까지 사랑하는(loves) 바로 그 사랑의 행위(love), 즉, 어떤 침범/거슬림(an offense)을 느끼지 않거나(not to feel) 혹은 잊는 행위(to forget)를 말합니다.
(2)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랑(love), 즉, "인간의 용서(容恕)(human forgiveness)" 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행위" 로 불리는 사랑, 즉, "인애(仁愛)," 즉, "[자연적(natural)] 인(仁)]," 즉, "남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 사랑 행위(our love)," 즉, "서(恕)" 를 말함에 또한 주목하라.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게시자 주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천학초함/칠극/칠극卷之二_평투.htm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18일] (**) 번역자 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가족(one family)을 형성하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행위(to love one another)를 그리고 가장 거룩한 성삼위를 찬양함에 합류하는 행위를 계속한다면, 교회의 가장 깊은 소명인 "교회의 통공/하나 됨" 에 장차 충실하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은 다음에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959항에 있다: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123a9p5.htm [주: 영어본을 참조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c959.htm [주: 영어본을 참조하라] [이상, 내용 추가 끝]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17일]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서 8,21-35에서 말씀하실 때에, "가해자가 먼저 용서를 청해오면 용서하는 횟수를 세지 말고 무한히 그를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음에 특히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서 8,21-35에서 말씀하실 때에, 설사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후에 용서를 먼저 청하는 등의 화해를 위한 아무런 조치를 선행하지 않더라도, 즉,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사후 입장 및 처신과는 무관하게, "용서하는 횟수를 세지 말고," 그냥 일방적으로, "무한히 가해자를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다는 생각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서 8,21-35에서 말씀하실 때에, "가해자인 형제에게 피해자인 형제가 먼저 청하는 화해(reconcilliation)의 표준 혹은 모범"을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으로 가르치셨다는 생각인데, 그러나 바로 이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은 사람의 힘/능력만으로는 대단히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며, 은총(grace)이라는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이상, 게시자 주 끝)
3-3. 그리고 더 나아가, 교회의 통공(ecclesial communion, 敎會共融)에 대한 위의 제3-2항에서의 예수님의 고유한 가르침은 사실은, 미사 중에 다 함께 하느님께 바치는, "주님의 기도[Our Father, 천주경(天主經)]"에서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예수님 고유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필요조건은 자신에게 잘못한 이들를 용서하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6,12) 즉, 하느님의 용서(divine forgiveness)의 필요조건은 인간의 용서(human forgiveness)이다.
4. 4-1. 다른 한편으로,
질문 2: 자신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충분조건입니까?
질문 2에 대한 답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들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공로로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18일] 4-1-1. 위의 게시자 주 3-2의 번역자 주에서 이미 고찰하였듯이, "인간의 용서(human forgiveness)"는 곧 "남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 사랑 행위(our love)" 즉, "서(恕)" 를 말하므로, 다음에 발췌된 "공동번역성서" 루카 복음서 7,47ㄴ,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주: 즉, 보였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를 읽고서, 이 절을 그 성경 근거로 제시하면서 자신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한 개의 충분조건(a sufficient condition)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문제는, (i)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어떠한 잘못을 하실리도 없고, (ii) 루카 복음서 7,47의 앞의 절들에서 서술된 이 여자의 사랑은, 피조물인 인간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나 그러나 (iii) 공동번역성서 루카 복음서 7,47ㄴ은, 만약에 독자들이, 아래의 게시자 주 4-1-2에서처럼, 이 절에서 말하는 [하느님을 위한] 우리의 사랑 행위(our love)[즉, 애덕의 행위]를 이 여자의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독자들에게, 인과(cause and effect) 관계가 뒤바뀐, 그리하여 자신의 죄들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공로(merit)로 얻을 수 있다는, 그리스도교 교리적으로 크게 잘못된 의미를 지닌 문장으로서, 이해될 수도 있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공동번역성서 루카 복음서 7,47ㄴ은, 그 내용이 난해(難解)하다고 아니할 수 없으며, 따라서 질문 2에서 주장하는 바를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위의 발췌문에서 [ ] 안의 주는,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드리기 위하여, 필자가 삽입한 것입니다.
게시자 주 4-1-1: 공동번역성서 루카 복음서 7,47ㄴ과 동일한 난해(難解)한 문장이 1960년대에 초판 발행된 RSV(Revised Standard Version) 루카 복음서 7,47a 에 있는데, 이 난해(難解)함은, 언뜻 보기에, 1970년에 초판 발행된 NAB(New American Bible) 루카 복음서 7,47a 에서, 바로잡아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서는 별도의 글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아래의 제4-1-1-2항을 읽도록 하라.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29일] -----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75.htm <----- 필독 권고 ----- [이상, 내용 추가 끝]
4-1-1-1. 다음은 "새 번역 성경" 루카 복음서 7,47ㄴ 전문및 이 절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 전문입니다. [ ] 안의 문장은,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드리고자, 필자가 삽입한 것입니다:
(발췌 시작)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45)
----- 45) "이 여자는 ... 드러낸 것이다." 는 지금까지 흔히 "이 여자는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로 번역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다음 문장, 그리고 앞의 비유와(41-43절) 맞지 않는다. [남, 즉, 피조물인 인간에 대한] 사랑은 용서의 근거나 이유가 아니라 용서의 결과이며 표징이다(19,8-9 참조).(#)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20일] (#) 게시자 주: 이 주석에서 루카 복음서 19,8-9를 이 주석의 성경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상당히 부적절하다는 생각이다. [이상, 내용 추가 끝] -----
4-1-1-2. 그리고 다음은 NAB(New American Bible) 루카 복음서 7,47a 전문 및 이 절에 대한 NAB 주석 전문인데, 바로 위의 "주석 성경"의 루카 복음서 7,7ㄴ 및 이 절에 대한 주석보다 더 자세한 내용의 주석을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 안의 문장은,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드리고자, 필자가 삽입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WQ.HTM (발췌 시작)
"따라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그녀의 많은 죄들은 이미 용서받았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그녀는 커다란 사랑(love)을 이미 보였던 것이다."(#)
----- * 7,47: Her many sins have been forgiven, hence, she has shown great love: literally, "her many sins have been forgiven, seeing that she has loved much." That the woman's sins have been forgiven is attested by the great love she shows toward Jesus. Her love is the consequence of her forgiveness. This is also the meaning demanded by the parable in vv 41-43.
* 7,47: 그녀의 많은 죄들은 이미 용서받았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그녀는 커다란 사랑(love)을 이미 보였던 것이다:(#) 글자 그대로, "그녀가 많은 사랑을 이미 보였던 것을 볼 때에(seeing that), 그녀의 많은 죄들은 이미 용서받았다." 이 여자의 죄들이 이미 용서받았음은 그녀가 예수님을 향하여 보이는 커다란 사랑(love)에 의하여 입증되고 있다(is attested by). [하느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하느님에 의한] 그녀에 대한 용서의 결과이다. 이것은 또한 제41-43절에 있는 비유에 의하여 요구되는 의미이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20일] (#) 번역자 주: 이 영어본 번역문에서, 루카 복음서 7,47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랑(love)" 이라는 단어를, 아래의 게시자 주 4-1-2에 그 출처 제시와 함께 발췌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서처럼,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의 의미로 해석하지 않고 있음에 주목하라. 루카 복음서 7,47의 지역 언어로의 번역문이 특정 단어 "사랑(love)"의 의미에 대한 전후 문맥 안에서의 해석에 따라 다르게 제시되고 있다는 생각이며, 이에 대한 더 자세한 고찰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고자 한다.(##) [이상,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29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75.htm <----- 필독 권고 [이상, 내용 추가 끝] -----
4-1-1-3. 그리고 다음은 1966년에 초판 발행된 Good News Bible 루카 복음서 7,47a 인데, 바로 위의 NAB 루카 복음서 7,47a와 동일한 인과 관계를 밝히는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발췌 시작)
"따라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그녀가 이미 보였던 커다란 사랑은 그녀의 많은 죄들이 이미 용서받았음을 증명한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4-1-1-4.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 제공의 국내의 개신교측 여러 우리말본 성경들의 루카 복음서 4,47은 다음에 있는데, 위의 제4-1-1항에 발췌된 "공동번역성서" 루카 복음서 7,47에서처럼, 난해(難解)한 문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4-1-2. 사실 우리가 하느님께 바라는 용서는, 죄(sin)의 정의(definition)에 의하여,(*) 하느님의 법에 반하는 죄(sin)에 대한 용서를 말하므로, 하느님을 향하여 자신이 잘못한 바(죄)를 회개/참회하면서 이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면(마태오 복음서 7,7-11)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 (*) 게시자 주: 가톨릭 그리스도교의 "죄(sin)"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41.htm <----- 필독 권고 -----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를 들어, 이사야서 55,7에서 예언되었던 바의 구현으로서, 하느님께 죄를 지은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자 사람으로 강생하신, 하느님이신, 하느님의 아드님(성자)이시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사명을 구현하시고자(fulfill), 죄인들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그리 어렵지 않은, 구체적인 한 개의 길(a way)로서, 즉, 한 개의 충분 조건(a sufficient condition)으로서, "하느님을 향하여 자신이 잘못한 바(죄, sin)를 회개/참회하면서 이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것" 을 우리에게 이미 분명하게 명하셨기(마태오 복음서 18,3; 마르코 복음서 1,15; 루카 복음서 13,3.5; 사도행전 3,19) 때문에, 이 사명은 예수님에 의하여 구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의 지속적인 구현(fulfillment)/현실태화(actualization)를 위한 한 개의 제도, 즉, 고해성사)를 또한 예수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 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경우에, 하느님의 용서(divine forgiveness)의 필요조건은 인간의 용서(human forgiveness)이고 그리고 그 역은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를 요구한다. (마태오 복음서 4,17[회개]; 6,12[회개].14-15; 신학 대전 IIIa, Supp. q99, a5)(*)
즉,
세례 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경우에, 하느님의 용서(divine forgiveness)의 한 개의 필요조건(a necessary condition)은 인간의 용서(human forgiveness)이고 그리고 하느님의 용서(divine forgiveness)의 한 개의 충분조건(a sufficient condition)은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이다. (마태오 복음서 4,17[회개]; 6,12[회개].14-15; 신학 대전 IIIa, Supp. q99, a5)(*)
----- (*) 게시자 주: 13세기 중반에 마련된 아래의 신학 대전 IIIa, Supp. q99, a5에서 말하는 "회개(repentance)"는, 16세기 중반에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완미한 회개(悔改)/참회(懺悔)[perfect repentance, 상등통회(上等痛悔)]를 포함한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18일] 게시자 주 4-1-2: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2014년의 경우에 오늘인 9월 18일에 해당하는) 가해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은 루카 복음서 7,36-50이고, 그리고 이 복음 말씀은 다해 연중 제11주일 복음 말씀(루카 7,36-8,3)에 포함되는데, 특히 제47절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위의 제4-1-2항에서 말씀드린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한 개의 충분조건(a sufficient condition)인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를 다음과 같은 문맥 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 ] 안의 표현은,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드리고자, 필자가 삽입한 것입니다: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24_thu.htm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ot_11.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47. 사람은 자신의 죄들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공로로 얻을 수(merit) 없는데 왜냐하면, 하느님이 가해(加害)를 당한 분이시기에, 그의 죄들이 무한한 무거움을 가지고 있기(are of infinite gravity)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공로(merits)들에 의하여 우리를 용서하시는, 고해 성사를 [의화(justification) 되기 위한 적법한 절차로서] 필요로 하며, 그리고 하느님의 용서를 얻기 위한 단지 한 개의 본질적인 조건(only one indispensable condition)[즉, 충분 조건]이 있는데, [하느님을 위한] 우리의 사랑(즉, 애덕)(our love)인 우리의 회개(悔改)/참회(懺悔)[our repentance)[즉, 상등통회(上等痛悔)]입니다.(*) (이하 생략)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20일] -----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2s2c2a4.htm (발췌 시작)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0월 10일] 1452 When it arises from a love by which God is loved above all else, contrition is called "perfect" (contrition of charity). Such contrition remits venial sins; it also obtains forgiveness of mortal sins if it includes the firm resolution to have recourse to sacramental confession as soon as possible.51
----- 51 Cf. Council of Trent (1551): DS 1677.
1452 통회(contrition)는, 그것이 그 이외의(else) 무엇보다도 먼저 바로 그것에 의하여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는 한 개의 사랑(a love)에 의하여 일어날 때에, "완미(完美)하다(perfect)" 라고 불립니다[애덕에 기인하는 통회(contrition of charity)]. 그러한 통회는 소죄(venial sins)들을 사면하며(remits), 그리고 또한 이 통회는, 만약에 그것이 가능한 한 빨리 도움을 위한 성사적 고백 쪽으로 돌아서고자 하는 확고한 결심을 포함한다면, 대죄(mortal sins)들의 용서를 획득합니다.51)(*)
----- [이상, 내용 추가 끝]
[또한 통회(痛悔, contrition)이라고 불리는]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는 신덕(faith, 믿음)으로부터 일어나는 동기들에 의하여 반드시 고무(鼓舞)되어야 합니다(must). 만약에 회개/참회가 하느님을 위한 [초자연적 은총인] 애덕이라는 사랑(love of charity for God)으로부터 일어나면, 그것은 "완미하다(perfect)" 라고 불리며, 그리고 만약에 그것이 다른 동기들 위에 근거를 두게 되면, 그것은 "불완미하다(imperfect)" 라고 불립니다.(*)
-----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에 의하면, "사랑(love)"은, (i) "바로 그것에 의하여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는 한 개의 사랑"인 애덕(charity, caritas)과 (ii) 애덕(charity, caritas)의 결여로 정의되는(defined) 사랑(love), 즉, 애덕(charity, caritas)이 아닌 사랑(love), 즉,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love)"인 cupiditas(cupitidy), 이렇게, 비 이원론적으로(non-dualistically), 논리적으로 크게 둘로 구분되며,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있다: ----- [이상, 내용 추가 끝]
그런데 바로 위의 문장이,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이 글에서 도출한 위의 제4-1-2항의 문장만큼의, 분명한 내용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지에 대하여, 독자들께서 정밀하게 비교/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4-2.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가해 연중 제25주일 제1독서(이사야 55,6-9) 전문입니다. 제7절에서 "돌아오너라"는, "주님께로 회심하고(convert) 그리고 회개(悔改)하라/참회(懺悔)하라(repent)"는 권고이고, 그리고 그럴 경우에 "주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실 것이다" 라는 하느님의 권고를 예언자 이사야는 전하고 있음을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데, 이 예언은,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당신의 공생활 중에 이미 구현되었고(마태오 복음서 18,3; 마르코 복음서 1,15; 루카 복음서 13,3.5), 그리고, (i) 미사 중 (자비송 직전의) 참회 예식(Penetential Rite)과 (ii)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가톨릭 교회의 고백성사를 통하여, 제도적으로 지금까지 구현(fulfillment)/현실태화(actualization)되어 왔습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6064&gomonth=2014-09-21 (발췌 시작) 6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7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그리고 바로 위에 발췌된 이사야서 55,8-9의 말씀을,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가해 연중 제22주일 복음 말씀(마태오 16,21-27)에 포함되는, 위의 제2-3항에서 질문 1에 대한 답변의 결적적인 단서(clue)로서 말씀드렸던, 다음의 마태오 복음서 16,23의 마지막 문장과 비교/검토 하면서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발췌 시작)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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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족입니다만, 다음은 몇 년 전에 예루살렘 성지순례 중에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소위 말하는 "통곡의 벽"에서, 방금 기도를 끝낸 검은색의 양복 차림에 검은색의 모자를 쓰고 또 성구갑들을 이마와 왼쪽 상박에 차고 있는 유다교 청년과 나눈 대화입니다:
4-3-1. "유다교에서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사들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지낼 수 있다고 알고 있는데, 기원후 70년에 이 성전이 파괴된 후 지금까지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더 이상 하느님의 용서를 실제로/현실태적으로(actually) 받을 수도 있는(may) 길/제도가 사라졌기에, 신앙적으로 큰 문제가 아닙니까?" 라는 질문을 제가 하였더니, 이 질문을 듣고서 약간 망서리더니 이 유다인 청년은, "라삐들이 기부(donation)와 자선 제공(almsgiving)을 많이 하라"고 가르친다고 영어로 답변을 하였습니다.
게시자 주 4-3-1: (1) 사실,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는, 미국의 대다수의 유다인들이 무슨 이유로 기부(donation) 와 자선 제공(almsgiving)을 많이 하는지 그 이유를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는데, 만약에 이 답변이 사실이라면, "통곡의 벽" 앞에서 이 답변을 듣고서, 그 당시에, 비로소 그 이유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2) 그런데 문제는, 위의 제2항과 제3항에서 고찰한 바에 의하면, 기부와 자선 제공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필요조건인 것이지, 그러나, 예를 들어, 이사야서 55,7에 비추어 보더라도,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충분조건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들이 충분조건일 수 없는 이유는, 예를 들어, 위의 제2-4-4항과 게시자 주 4-1-2에 있습니다만, 유다교 라삐들의 이러한 입장에 대한 여러분들의 개인적 견해는 어떠한지요?
4-3-2. 그래서 이번에는, "유다교에서는 언제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것인지요?" 라는 더 심각한 질문을 이 청년에게 하였더니, "메시아가 온 이후에, 이 메시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것이라고 라삐들이 가르친다" 라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예상 밖의 답변을 곧바로 하였습니다.
4-3-3. 기원 후 70년의 예루살렘 대성전의 파괴 이후 지금까지,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용서를 실제로/현실태적으로(actually) 받을 수도 있는(may) 적법한 길(way)/제도를 가지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의 경우에, 기원 후 70년에 예루살렘 대성전의 파괴(여기에는, 세습에 의존하는, 유다교 대사제 직무의 소멸도 포함됨)로 "옛 법"에 근거한 "직무 사제직" 은 수행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18일] 4-3-4. 다른 한편으로, "직무 사제직" 과 "보편 사제직[주: 기원 후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 후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가톨릭 교회의 교황 교도권을 부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한 용어인 "만인 제사장제"가 나타내는 개념은 여기에 포함됨]"의 차이점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33.htm <----- 필독 권고
그런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i)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들 중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 즉 "새 법"에 근거한 "직무 사제직"과 (ii)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들보다 그 권위가 한참 미치지 못하는, 신약 성경의 서간문들에 근거한 "보편 사제직"의 커다란 차이점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 다음 - 하느님과 당신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교회 사이의 "거룩한 교환(sacrum commercium)"(*) 이라는 수직적인 관계에서,
(i) 예를 들어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인 "은총(grace)" 등, 하느님으로부터 교회의 구성원들로 내려오는, 따라서 초자연적인(supernatural), 따라서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거룩한(holy) 바 모두(여기에는 당연히 일곱 성사들이 포함됨)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열두 사도들에게 직접 명하신 바로 그 동일한 직무(ministry)를, "사도계승"으로 불리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계승하여, 직무로서 관장하는 것은 오로지 "직무 사제직"에만 속하고,
(ii) 예를 들어 봉헌 등, 피조물인 교회의 구성원들이 하느님께로 올리는, 따라서 자연적인(natural), 따라서 거룩하지 않을 수도 있는 바 모두는 "직무 사제직" 및 "보편 사제직" 둘 다에 속한다
는 생각입니다.
-----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93.htm <----- 필독 권고 ----- -이상, 다음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
이상으로 이번의 글은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28일] 게시자 주: 이 글에 이어지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의 글[제목: 완미한 회개/참회[상등통회(上等痛悔)]의 성경 근거 - 루카 7,47]은 다음에 있습니다. 국내의 성직자 및 수도자들을 포함하여, 되도록 많은 분들께서 읽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75.htm <----- 필독 권고 [이상, 내용 추가 끝]
(십자성호를 그으며)
---------- 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45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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