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The Word(유일하신 말씀)(Logos, 성자)의 정의(definition) 843_ [성경용어_하느님의아드님][삼위일체][하느님의아들들] 843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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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1.58.38.*]

2009-06-19 ㅣ No.843


+ 찬미 예수님

 

다음은 요한 복음서 1,1에 있는 ‘말씀(the Word)’이란 용어에 대한 주석들로서, 이 글이 계시진리인 삼위일체 교의(dogma, 믿을 교리)의 제2 위격인 성자(하느님의 아드님)와 강생하신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 이 파일은 저서명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엮은이: 소순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예수 성탄 대축일(낮) 복음 말씀(요한 복음서 1,1-18)

 

해설의 각주의 연장으로 마련되었습니다].

 

(i) NAB(New American Bible)의 이 용어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말씀(the Word)은 그리스어로는 로고스(Logos)에 해당하며, 이 용어는 

(i-1) 하느님의 역동적이고 창조하시는 말씀(creative word)(창세기)

(i-2)
하느님의 창조하시는 행위의 도구로서의 의인화된(personified) 선재(先在)하는[preexistent, 즉 가시적 우주에 전적으로 앞서는] 지혜(Wisdom)(잠언서), 그리고 

(i-3)
실재(reality)에 대한 궁극적 이해력(intelligibility)(그리스 철학)을 


개별 특성들이 모호한 정도에 이르기까지의 바로 그러한 가까운 관계 상태로 일치시킨다(combines)(엮은이 번역).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b/john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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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0: 다음을 클릭하면 Merriam Webster's OnLine Dictionary에 주어진 combine 단어의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combine: 
to bring into such close relationship as to obscure individual characters.

출처: http://www.merriam-webster.com/dictionary/combine

 

참고 1: 따라서 우리는 이 주석으로부터,

 

the Son of God = the Word = (eternal) Wisdom = Logos, 

하느님의 (외)아드님(성자) = (유일하신) 말씀 = (영원한) 지혜 = 로고스,

 

라는 표현들은, 추상화된 "하나의 대상(object)"에 대한 (교의적으로) 동치인 표현들로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제 (iii)항에서는 "(유일하신) 말씀", 즉 "하느님의 (외)아드님(즉 성자, the Son of God)"의 신학적 의미를 매우 쉽게 잘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참고 2: 바로 "이 추상화된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이들 용어들 사이의 (교의적) 동치 관계를 알고서, 예를 들어,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첫 회칙(제목: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인 다음의 글을 읽으시면, 훨씬 더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의 문장은 이 회칙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The ancient world had dimly perceived that man's real food—what truly nourishes him as man—is ultimately the Logos, eternal wisdom: this same Logos now truly becomes food for us—as love.

(엮은이 번역) 고대 세계는 사람의 참된 음식이 - 사람으로서의 자신에게 진실로 자양분을 주는 바가 - 궁극적으로, 영원한 지혜인, 로고스임을 희미하게나마 이미 인식하였는데, 사랑으로서의 바로 이 로고스가 이제 우리를 위한 음식이 되십니다.

 
 
주: 향주 삼덕 중의 애덕(사랑)의 뜻과 이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첫 회칙입니다. 이 회칙의 전문을 차분히 읽어 보실 것을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1년 5월 26일]
 
참고 3: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2010년 9월 30일자 "VERBUM DOMINI(주님의 말씀)" 제목의 교황 권고(Apostolic Exhortation) 문헌(영문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 문헌들인 4개의 교의 헌장들 중의 하나인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의 가르침에 따라, 1969년에 개정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은 누구든지 성경 공부를 손쉽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데, 이 교황 권고는 성경 공부를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교황님의 더 구체적인 가르침입니다.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발행의 경항 잡지에 실린 위의 교황 권고의 우리말 번역본 역자에 의한 위의 권고의 내용 소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1년 12월 25일 성탄 대축일]

참고 4:

여기를 클릭하면,

2011년 5월 56일자로 위의 참고 3에서 말씀드렸던,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2010년 9월 30일자 "VERBUM DOMINI(주님의 말씀)" 제목의 교황 권고(Apostolic Exhortation) 문헌(우리말본)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문헌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신앙의 유산(the deposit of faith)", 즉,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례 안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드러내어지고 있는, "가톨릭 보편 교회 안에서 기록된 성전(즉, 사도전승)인 성경, 기록되지 않고 살아있는 형태로 사도계승에 의하여 가톨릭 보편 교회 안에 온전하게 보존되어 지금까지도 잘 전달되고 있는 성전(즉, 사도전승), 그리고 가톨릭 보편 교회의 교도권"의 상호 관계에 대하여, 보통 수준의 신자들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매우 자상하게 가르치고 계신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례력에 따라, 주일 및 대축일 독서들 및 복음 말씀을 선행 학습하는,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방식"과 관련하여서는, 이 교황 권고의 제57항과 제74항을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게시자 주: 다음은, 많이 부족한 죄인이 그동안 전달해 드렸던, 가톨릭 보편 교회의 성경의 해석/우리말 번역 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들의 전달의 글들 및 번역 미숙/오류에 대한 지적의 글들의 일부입니다. 비록 많이 부족한 죄인의 졸글들이기는 하나, 이 글의 독자들께서 위의 교황 권고를 읽고 이해하는 데에 혹시라도 약간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나열해보았습니다:

가톨릭 성경 해석 및 우리말 번역에 관한 졸글들의 모음: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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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ii-1) 다음은, 위의 주석에 이어지는, 성요셉출판사 1996년도 초판 발행의 ‘주석 성서 신약’에 있는, 위의 단어에 대한 추가 주석입니다:

로고스는 본래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우주 만물을 이루는 이성적 원리’[주: 위의 (i-3)의 의미]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이 말을 기원후 1세기 유다인 철학자인 필로(필론, Philo Judeus, 혹은 Philon)가 유다인들에게 신적인 의미로 보급시켰다. 그는 ‘로고스’를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형상을 부여하며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존재로 이해했다. 여기에 근거하여 (복음사가 성) 요한 로고스라는 용어를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에서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다.

[내용 추가 일자: 2011년 12월 25일 성탄 대축일]

(ii-2) 다음은, 요한 복음서 1,1을 인용하고 있는,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241 전문입니다. 최소한도로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제240항과 함께 발췌하였으므로, 다음의 출처를 직접 읽으실 것을 권고드립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239.htm

240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에서 하느님을‘아버지’로 계시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당신 외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영원히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그 아들은 오직 당신 아버지와 맺은 관계에서만 영원히 아들이시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마태 11,27)

241 이 때문에 사도들은 예수님께서“한처음에 계셨으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이신 말씀” (요한 1,1) 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콜로 1,15) 이시고,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시는 분” (히브 1,3) 이시라고 고백한다.

(ii-3) 다음은, 특히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41항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경 구절들인 요한 복음서 1,1; 콜로새서 1,15; 히브리서 1,3 들에 대한, 2010년 12월 25일자로 초판 발행된, "주석 성경"의 주석들입니다:

(ii-3-1) 다음은 요한 복음서 1,1 전문 및 이 구절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 전문입니다:

(요한 복음서 1,1)
한처음에 1) 말씀이 2) 계셨다. 3)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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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세기 첫머리에도 나오는 "한처음"(또는, 태초)이라는 표현은 이 세상 기산의 시작이 아니라, 절대적 '시작'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 말로 로고스라고 불리신다. 이 낱말은 "말씀"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구약 성경의 지혜 문학과(잠언 8,23-36; 지혜 7,22-8,1; 집회 24,1-22) 그리스화한 유다교의 영향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영원하신 아드님으로서, 하느님 아버지를 완벽하게 드러내시는 분이시다(그래서 이분을 필리 2,6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신 분', 콜로 1,15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히브 1,3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시어, 사람들의 세계에 하느님을 드러내시는 최고의 존재가 되신다(1요한 1,2 참조).

3) "말씀"은 지고하고 영원한 방식으로 존재하신다. 그리스 말에서는 '계시다'가 반과거로 되어있는데, 이러한 형태도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4) "말씀"은 하느님이리고 불리시는 "아버지"와 다르시면서도, 나중에 복음서 저자가 애써 가리켜 보이는 것처럼(5,17-30) 그분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다. 결국 "말씀"도 "아버지"처럼 하느님이시다. 곧 하느님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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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3-2) 다음은 콜로새서 1,15 전문 및 이 구절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 전문입니다:

(콜로새 1,15)

그리스도 찬가 15)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16)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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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5-20절(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12-20절)은 우주적 차원으로 위대하신 그리스도를 기리는 하나의 찬미가이다(이 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거명되지는 않으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분"과 우주의 삼라만상을 일컫는 "만물"이 두 축을 이룬다). 이 찬미가의 첫째 연은(15-18ㄱ절) 창조를, 둘째 연은(18ㄴ-20절) 부활을 중점적으로 노래한다. 이러한 그리스도 찬가가 본디 어디에서 유래하느냐에 관한 문제는 아직도 명백한 해답을 찾지 못한 형편이다. 어떤 학자들은 스토아학파 또는 영지주의의 영향 아래 창작된 헬레니즘의 찬가를 개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자체 안에서 지혜 문학의 영감을 받아 지어진 노래라고 여기는데, 이 견해의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지혜" 그 자체로서 "하느님의 모상"(지혜 7,26)이시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생겨나기 전부터 존재하셨으며(잠언 8,22-26),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시고(잠언 8,27-30), 사람들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신다(잠언 8,31-36). 신약 성경에는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의 우주적 역할을 노래하는 찬가가 둘 있다. 곧 요한 1,1-18히브 1,1-4이다(1코린 8,6에 나오는 신앙 고백도 참조).

     이 찬가는 이렇게 그리스도를 우주의 머리로 기리는데, 이 주제는 여러 개념들이 밀접한 상호 관계를 이루며 전개된다. 곧 현재는 그리스 말로 쓰여 전해지지만 이 찬가가 나온 히브리 말에서는, '시작, 맏이, 으뜸' 등이 모두 이 찬가의 열쇠인 '머리' 라는 한 어근에서 파생한다. 이러한 콜로새서의 찬가는 모든 내용을 십자가의 역사적 사건에서부터 출발하여 펼쳐 간다. 신약 성경 전체와 마찬가지로 이 찬가 역시 구원과 창조를 하나로 엮고, 또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는 고백과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시라는 고백을 하나로 결합시킨다. 이 찬가는 세례성사가 거행될 때에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사실 2장에서 세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현재 콜로새서의 문맥에서는 이 찬가가, 그곳에 전파된 이단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촉구하기 전에 그것을 준비하는 구실을 한다(그래서 천상의 존재들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고 또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는 주제가 강조된다).

16)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으로서(창세 1,26), 그리고 동시에 '지혜' 그 자체로서 "하느님의 모상"(바로 앞의 각주 참조)이시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 세상'이,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 철학자 필론'로고스'가, 그리고 바오로'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모상"이라고 말한다(2코린 4,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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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1) 이 주석은, 여기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는프랑스어 공동번역 성경(TOB)의 해당 주석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인데, 이 TOB 주석의 "comme l'homme créé par Dieu(Gn 1,26)" 을 우리밀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으로서(창세 1,26)" 으로 번역한 것은 명백한 번역 오류이다. 

여기서 "créer" 동사는, "창조하다" 로 번역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고, "cause to happen(존재하게 하다)"로 번역하여야 한다. 여기를 클릭하여 이 단어의 사전적 설명를 반드시 참고하도록 하라.

따라서, "comme l'homme créé par Dieu(Gn 1,26)" 라는 표현은, "하느님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는 사람(창세 1,26)"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우리가 고백하듯이, 성자(하느님의 아드님, the Son of God)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지 않고 나신(begotten not made)" 분이시며, 그리고 강생 신비(the mystery of Incarnation)는, 소위 말하는, 창조(creation)의 한 종류/과정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2) 사실,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하는 사고의 대상들 중에는, "창조의 방식"이 아니라, 대신에, "생성의 방식"으로 언급되는 사물들이 또한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도록 하라.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소위 말하는 "나옴(procession, 발출)"에는,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글에서 다루고 있듯이, "생성으로 불리는, 성부로부터 나옴(성자의 경우)"과 "생성으로 불리지 않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옴(성령의 경우)" 이렇게 두 가지뿐임에 또한 주목하라.

이 게시자 주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께서는, 아래의 제 (iii) 항과 제 (iv)항,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들을 반드시 여러 번 필독하고 또 숙지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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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스라엘에서는 "맏이"라는 말에, 뒤따르는 이들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 또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말은 또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지혜"가 수행한 특권의 역할을 표현하기도 한다(잠언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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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3-3) 다음은 히브리서 1,3 전문 및 이 구절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 전문입니다:

(히브리서 1,3)
아드님은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7)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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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영광의 광채" 대신에 "영광의 반영"으로 옮길 수도 있다. 이 전반부의 문장은 의인화한 신적 지혜의 서술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다(지혜 7,25-26). 아드님과 하느님의 관계를 표현하고자 필자는 이렇게 아주 강한 의미를 지닌 용어들을 선택한다.

8) "당신의 강력한 말씀"(직역: "당신 힘의 말씀")의 "당신"은 하느님이 될 수도 있고 아드님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아드님의 신적 힘은 온 세상을 "지탱"하기 위하여 아무런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다. 한마디 말씀으로 충분한 것이다(시편 33,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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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그런데, 위에 발췌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41항"주석 성경"에 주어진 관련 성경 절들의 주석들을 읽고서, "성자(하느님의 아드님, the Son of God)"의 정체성, 혹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는지요?

결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애초에 이글이 마련된 것은 바로 이 관계의 이해를 위하여서였으며,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아래의 제 (iii)-(v)항의 설명들을 반드시 이해하고 숙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iii) 다음은 나바르 주석 성경의 요한 복음서 1,1에 대한 주석입니다. 위의 주석들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 성스러운 본문은 하느님의 아드님(성자)을 ‘(유일하신) 말씀(the Word)’으로 부르고 있다. 다음의 비교는 우리가 이 ‘(유일하신) 말씀’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마치 한 개인이 자신을 의식함에 따라 자신의 마음에 자신에 대한 모습(image)을 형성하게 되듯이, 이와 꼭 같이 성부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아시게 됨에 따라 이 영원한 말씀을 낳으신다(begets, 생기게 하신다). 이 하느님의 말씀은 단수이며 유일하기에, 다른 어떤 것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데 이는 이 하느님의 말씀(즉,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전체 본질(entire essence)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복음 말씀은 이 하느님의 말씀을 단순히 ‘Word’가 아닌, ‘the Word[(유일하신) 말씀]’으로 부르고 있다. 이 (유일하신) 말씀, 즉 하느님의 아드님(성자)에 관하여 다음의 세 가지의 진리들이 확언되고 있다(affirmed): 성자께서는 영원하시고, 성자께서는 성부로부터 구분되시며, 그리고 성자께서는 하느님이시다.

 

“성자께서 한 처음에 존재하셨다는 것을 확언하는 것은 성자께서 모든 것들 이전에 존재하셨음을 말하는 것과 동치이다.”[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 De Trinitate, 6,2].

 

또한, 이 본문은 성자께서는 하느님, 즉 성부와 함께 계셨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이 (유일하신) 말씀의 위격이 성부의 위격과 구분됨을 뜻하며 그러나 여전히 이 (유일하신) 말씀이 성부와 매우 친밀하게 관련되어 있기에 이 (유일하신) 말씀(성자)은 심지어 성부의 거룩한 본성을 공유하고 계신다(shares): 당신께서는 본체(本體)에 있어 성부와 하나이시다(he is one in substance with the Father)[cf. 니케아 신경(Nicean Creed)].(이하 생략)(엮은이 번역).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xmasday.htm 

 

(iv) 위의 제 (iii)항의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은 트리엔트 교리서(즉 로마 교리서)의 성자의 정체성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아래의 영어본 트리엔트 교리서로부터의 인용 중에서 파란 색칠을 한 부분을 참고하도록 하라:

 

"His Only Son"

In these words, mysteries more exalted with regard to Jesus are proposed to the faithful as objects of their belief and contemplation; namely, that He is the Son of God, and true God, like the Father who begot Him from eternity. We also confess that He is the Second Person of the Blessed Trinity, equal in all things to the Father and the Holy Ghost; for in the Divine Persons nothing unequal or unlike should exist, or even be imagined to exist, since we acknowledge the essence, will and power of all to be one. This truth is both clearly revealed in many passages of Holy Scripture and sublimely announced in the testimony of St. John: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But when we are told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we are not to understand anything earthly or mortal in His birth; but are firmly to believe and piously to adore that birth by which, from all eternity, the Father begot the
Son, a mystery which reason cannot fully conceive or comprehend, and at the contemplation of which, overwhelmed, as it were, with admiration, we should exclaim with the Prophet: Who shall declare his generation? On this point, then, we are to believe that the Son is of the same nature, of the same power and wisdom, with the Father, as we more fully profess in these words of the Nicene Creed: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his Only-begotten Son, born of the Father before all ages, God of God, light of light, true God of true
God, begotten, not made, consubstantial to the Father, by whom all things were made.

Among the different comparisons employed to elucidate the mode and manner of this eternal generation that which is borrowed from the production of thought in our mind seems to come nearest to its illustration, and hence St. John calls the Son the Word. For as our mind, in some sort understanding itself, forms an image of itself, which theologians express by the term word, so God, as far as we may compare human things to divine, understanding Himself, begets the eternal Word. It is better, however, to contemplate what faith proposes, and in the sincerity of our souls to believe and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true God and true Man, as God, begotten of the Father before all ages, as Man, born in time of Mary, His Virgin Mother.

이 영원한 생성의 방식과 방법을 명료하게 하기 위하여 쓰이고 있는 갖가지의 비유적 표현들 중에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생각의 일어남으로부터 빌려온 것이 그 설명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듯하며, 그 결과 성 요한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유일하신 말씀(the Word)으로 부른다. 이는 우리의 마음이, 어느 정도까지 마음 자체를 이해함에 있어, 신학자들이 (word)이라는 용어로써 표현하는, 마음 자체의 모습을 형성하게 되기에, 그 결과, 우리가 인간적인 것들을 하느님의 것들과 비교하는 한, 당신 자신을 이해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 영원한 말씀을
나으신다(begets). 그렇지만(however) 믿음(faith, 신덕)이 제시하는 바를 묵상하는 것(contemplate)이 더 나으며, 그리고 우리의 영혼들의 성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으로서, 모든 시대들 이전에 성부로부터 나셨으며, 그리고 사람으로서, 당신의 동정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시기에 탄생하신, 참 하느님이시고 참 사람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더 낫다(is better)
(엮은이 번역).

 

While we thus acknowledge His twofold Nativity; we believe Him to be one Son, because His divine and human natures meet in one Person. As to His divine generation He has no brethren or coheirs, being the Only begotten Son of the Father, while we mortals are the work of His hands. But if we consider His birth as man, He not only calls many by the name of brethren, but treats them as such, since He admits them to share with Him the glory of His paternal inheritance. They are those who by faith have received Christ the Lord, and who really, and by works of charity, show forth the faith which they profess in words. Hence the Apostle calls Christ, the first-born amongst many brethren.

이와 같이 우리가 당신의 두겹의 탄생을 인정하는 반면에, 우리는 당신을 유일한 아드님으로 믿는데, 이는 당신의 신성 및 인성이 하나의 위격 안에서 합류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으로부터의 당신의 생성에 따라서 당신께서는 아무런 형제들이나 혹은 공동 상속인들을 가지지 않기에, 그 결과 성부로부터 유일하게 나신 아드님이신 반면에, 죽어야 할 운명의 우리는 당신의 손들의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가 당신의 탄생을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당신께서는 많은 이들을 형제들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실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들을 형제들로서 대하시는데, 이는 당신께서 그들이 당신과 함께 당신의 부모의 유산이라는 영광을 함께 나누는 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음(faith, 신덕)으로써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이미 받아들인, 그리고 실제로, 그리고 애덕(charity, 사랑)의 일들로써, 자신들이 말들로써 고백하는 믿음(faith, 신덕)을 나타내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사도는 그리스도를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배라고 부른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trent/catechism_of_trent.htm

(v) 다음은 위의 제 (iii)항 및 제 (iv)항의 서술에서 사용하고 있는 낳다(beget)라는 동사의 의미에 대한 엮은이의 졸글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07.htm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도 동사 ‘make’(창조하다)와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는 동사  ‘beget’은 우리말로 ‘낳다’ 혹은 ‘생기게 하다(생성하다)’로 번역이 되는데, 이 때 이 동사의 정확한 뜻은‘to produce especially as an effect or outgrowth’, 즉 ‘특히 어떤 효과 혹은 자연적 발전으로서 생기게 하다’이다.

 

참고 자료: http://ch.catholic.or.kr/pundang/4/mw/beget.htm

 

따라서 이렇게 ‘생기게 된(begotten) 것’은 ‘생기게 하는 것’과 동일(identical)할 수 있다.    

 

예 1) Money begets money[돈이 (이자로서) 돈을 낳는다, 즉 부익부(富益富)].

 

예 2)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의 ‘성부에게서 나신 분’.

 

예 3) 일반인들에게 친숙하지 않을 다른 예를 한 개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이공계 분야에서 벡터 공간 V 는 항상 기저(Basis)로 불리는 부분 집합 B 를 가지며, V 에 속하는 어떠한 벡터 v 이든지간에 B 의 원소인 벡터들의 일차결합으로 단 한가지 방식으로 나타낼 수가 있다. 즉, V 에 속하는 임의의 벡터 v 가 기저 B 에 속하는 다른 벡터들에 의하여 특별하게 생성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벡터들이 벡터를 생성하는(generate) 것"으로서 바로 "beget"에 해당될 것이다. 즉, "돈이 돈을 생성한다(begets)"는 표현에 해당될 것이다. 

 

예 4) 자연수 1 에다 1을 더하면 자연수 2가 되고, 여기에다 다시 1을 더하면 3이 되고, 등 등.. 따라서, 자연수 1은 다른 자연수들 모두를 생성한다(generate). 여기서 생성된 것들(즉 다른 자연수들)도 모두 1과 마찬가지로 생성자인 자연수 1과 같은 "숫자"이다. 즉 생성된 숫자들과 생성자인 1은 숫자라는 면에서 꼭 같다.

그러나 ‘만들어진(made) 것’ 즉 ‘창조된 것’은 ‘만드는 자(creator, maker)’와 일반적으로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예 5)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의 다른 구절: ...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one in Being with the Father(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의 한 본체로서).

 

(vi) 다음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 철학자인 Philo(필로/필론)가 말하는 '로고스'의 의미에 대한 간략한 소개글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그러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유다교 신자인 유다인 철학자 필로(필론, Philo Judeus, 혹은 Philon, 기원전 20년 - 기원후 50년)는 그리스의 훌륭한 지혜들이 본질적으로 모세 오경에 포함됨을 풍유적으로(allegorically) 설명함으로써 그리스 철학에 대한 유다주의적 종교적 사고의 우위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 철학적 개념들과 유다주의적 종교적 사고의 만남을 고찰함에 있어 상당히 유의미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필로(필론)는 [예를 들어, 자신보다 약 300여년 이후에, (유일하신) 말씀, 즉 성자께서 성부로부터 창조되었다(created)는 주장을 하다가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단죄받은 아리우스파(Arianism) 처럼] 하느님이신 이 (유일하신) 말씀[로고스, 성자, (영원한) 지혜]의 강생의 신비인, 하느님이신 ‘강생하신 말씀(예수 그리스도)’의 신성(divinity)을 참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았기에[주: 필로(필론)는 유다교 신자였다], 그가 말하는 [신과 사람 사이의 일종의 중간 매개물(intermediary)로서의] ‘로고스’의 개념과 복음사가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에서 참 진리로 가르치고 있는 계시진리인 삼위일체 교의(dogma, 즉 믿을 교리)의 제2 위격인 ‘성자[(유일하신) 말씀, 즉 로고스, 즉 (영원한) 지혜]’의 개념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들이 있는데, 이 차이점들은 요한 복음서 1,1-18 및 이 복음 말씀의 그리스도교 신학적 해설인 다음의 영문 자료들에 설명되어 있으니 또한 참고하도록 하라:

 

참고 자료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e_Logos.htm
참고 자료 2: http://ch.catholic.or.kr/pundang/4/ce_Christianity.htm
참고 자료 3: http://ch.catholic.or.kr/pundang/4/ce_Philo_Judaeus.htm
참고 자료 4: http://ch.catholic.or.kr/pundang/4/fiatlux2000/Philo.htm
참고 자료 5: http://ch.catholic.or.kr/pundang/4/info/Philon.htm

[내용 추가 일자: 2012년 11월 4일]

(vii) 다음은 13세기 및 14세기에 걸쳐 사제들과 종교 교사(teachers of religion)들의 소책자(manuals)들 및 교재(text-books)들로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성 토마스(St. Thomas)교리 교육 지침들(the catechetical instructions)에 주어진 가르침입니다:

출처: http://www.intratext.com/IXT/ENG0029/__PF.HTM

(발췌 시작)
In brief, the soul by its act of thinking begets the word. So also the Son of God is the Word of God, not like a word that is uttered exteriorly (for this is transitory), but as a word is interiorly conceived; and this Word of God is of the one nature as God and equal to God. 9)

간단히 말하면, 영혼(the soul)은 생각함(thinking)이라는 자신의 작용에 의하여 말(the word)을 낳습니다(begets). 이런 방식으로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the Son of God)께서는, 외부적으로 입 밖에 내어진(is uttered exteriorly) 어떤 말(a word)처럼이 아니라 [이는 그러한 말이 일시적이기(transitory) 때문입니다], 내면적으로 품게 되는(is interiorly conceived) 어떤 말로서,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며, 그리하여 바로 이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으로서 유일한 본성(one nature)에서 유래하며 그리하여 하느님과 동등합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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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Among the different comparisons brought forth to show the mode and manner ot this eternal generation, that which is taken from the production of thought in our mind seems to come nearest to its illustration, and hence St. John calls the Son 'the Word.' For our mind, understanding itself in some way, forms an image of itself which theologians have called the word; so God, in so far as we may compare human things to divine, understanding Himself, begets the Eternal Word. But it is more advantageous to consider what faith proposes, and with all sincerity of mind to believe and profess that Jesus Christ is true God and true Man - as God, begotten before all time; as Man, born in time of Mary, His Virgin Mother" ("Roman Catechism," "loc. cit.," 9). St. Thomas treats more fully the eternal generation and Sonship of Christ in the "Summa Theol.," I, Q. xxvii, art. 2; Q. xxxiv.

9. "이 영원한 생성의 방식과 방법을 명료하게 하기 위하여 쓰이고 있는 갖가지의 비유적 표현들 중에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생각의 일어남으로부터 빌려온 것이 그 설명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듯하며, 그 결과 성 요한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유일하신 말씀(the Word)으로 부른다. 이는 우리의 마음이, 어느 정도까지 마음 자체를 이해함에 있어, 신학자들이 (word)이라는 용어로써 표현하는, 마음 자체의 모습을 형성하게 되기에, 그 결과, 우리가 인간적인 것들을 하느님의 것들과 비교하는 한, 당신 자신을 이해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 영원한 말씀을 나으신다(begets). 그렇지만(however) 믿음(faith, 신덕)이 제시하는 바를 묵상하는 것(contemplate)이 더 나으며, 그리고 우리의 영혼들의 성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으로서, 모든 시대들 이전에 성부로부터 나셨으며, 그리고 사람으로서, 당신의 동정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시기에 탄생하신, 참 하느님이시고 참 사람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더 낫다(is better)" ["로마 교리서(Roman Catechism)," "loc. cit.," 9].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 I, Q. xxvii, art. 2; Q. xxxiv 에서 영원한 생성과 그리스도의 아드님되심을 더 충분하게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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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다음은, 영어본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유일한 로고스(the Logos)", 즉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설명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필자가 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cathen/09328a.htm

Analogy between the divine word and human speech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사이에 있는 유비

After the Council of Nicaea, all danger of Subordinationism being removed, it was possible to seek in the analogy of human speech some light on the mystery of the Divine generation; the Greek Fathers especially refer to this analogy, in order to explain how this generation is purely spiritual and entails neither diminution nor change: Dionysius of Alexandria (Athan., "De Sent. Dion.", 23, in P.G., XXV, 513); Athanasius ("De decret. Nic. syn.", 11, in P.G., XXV, 444); Basil ("In illud: In principio erat Verbum", 3, in P.G., XXXI, 476-77); Gregory of Nazianzus ("Or.", xxx,20, in P.G., XXXVI, 128-29) Cyril of Alexandria (" Thes." iv, in P.G., LXXV, 56; cf. 76, 80; xvi, ibid., 300; xvi, ibid., 313; "De Trinit.", dial. ii, in P.G., LXXV, 768 69), John Damasc. ("De Fide Orthod.", I, vi, in P.G., XCIV, 804). 

[아리우스 이단과 준(準) 아리우스 이단 등의] 성자종속설(聖子從屬說, subordinationism)의 모든 위험이 제거된 니케아 공의회(the Council of Nicaea, 325년) 이후에, 인간의 언어에 대한 유비(analogy)로 하느님의 생성(Divine generation)에 대하여 다소의 빛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다음의 그리스의 교부들은, 바로 이 생성이 어떻게 순전하게 영적임과 그리고 감소(diminution) 혹은 변화(change)도 수반하지(entails) 않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바로 이 유비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Dionysius of Alexandria, 247-265년경에 주교) (Athan., "De Sent. Dion.", 23, in P.G., XXV, 513); 아타나시오(Athanasius, 296-373년) ("De decret. Nic. syn.", 11, in P.G., XXV, 444); 바실(Basil) ("In illud: In principio erat Verbum", 3, in P.G., XXXI, 476-77);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Gregory of Nazianzus, 325-389년),  ("Or.", xxx,20, in P.G., XXXVI, 128-29)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Cyril of Alexandria, 376-444년) (" Thes." iv, in P.G., LXXV, 56; cf. 76, 80; xvi, ibid., 300; xvi, ibid., 313; "De Trinit.", dial. ii, in P.G., LXXV, 768 69),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Damasc.) ("De Fide Orthod.", I, vi, in P.G., XCIV, 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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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가톨릭 신학의 근본 원리인 "유비(analogy)"에 대한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87.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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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Augustine studied more closely this analogy between the Divine Word and human speech (see especially On the Holy Trinity IX.7.12 sq. and XV.10.17 sq.), and drew from it teachings long accepted in Catholic theology. He compares the Word of God, not to the word spoken by the lips, but to the interior speech of the soul, whereby we may in some measure grasp the Divine mystery; engendered by the mind it remains therein, is equal thereto, is the source of its operations. This doctrine was later developed and enriched by St. Thomas, especially in "Contra Gent.", IV, xi-xiv, opusc. "De natura verbi intellectus"; "Quaest. disput. de verit." iv, "De potent.", ii-viii, 1, "Summa Theol.", I-I, xxvii, 2; xxxiv. St. Thomas sets forth in a very clear way the identity of meaning, already noted by St. Augustine (On the Holy Trinity VII.2.3), between the terms Son and Word: "eo Filius quo Verbum, et eo Verbum quo Filius" ("Summa Theol.", I-I, xxvii, 2, "Contra Gent.", IV, xi). The teaching of St. Thomas has been highly approved by the Church especially in the condemnation of the Synod of Pistoia by Pius VI (Denzinger, "Enchiridion", 1460). (See JESUS CHRIST; TRINITY.)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는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사이에 있는 바로 이 유비(analogy)를 더 면밀하게 연구하였으며 (특별히 On the Holy Trinity IX.7.12 sq. 그리고 XV.10.17 sq. 을 보라), 그리하여 이 연구로부터 가톨릭 신학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받아들여진(수용된, accepted) 가르침들을 도출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을, 입술에 의하여 말해지는 단어(the word spoken by the lips)에 비교한(compares) 것이 아니라, 영혼의 내면적 말(the interior speech of the soul)에 비교하는데, 바로 그것에 의하여 우리는 어느 정도, 마음에 의하여 생성되어 그것이 그 안에 머물고, 게다가 또 그것과 동일하며, 그것의 작용들의 원천인, 하느님의 신비(the Divine mystery)를 붙잡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doctrine)는 이후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ams Aquinas, 1225-1274년)에 의하여, 특별히 "Contra Gent.", IV, xi-xiv, opusc. "De natura verbi intellectus"; "Quaest. disput. de verit." iv, "De potent.", ii-viii, 1, "Summa Theol.", I-I, xxvii, 2; xxxiv 에서 발전되었고 그리고 풍부하게 되었습니다. 성 토마스는, 성 아우구스티노에 의하여 이미 특별히 언급되었던(noted) (On the Holy Trinity VII.2.3), 아드님(Son)말씀(Word) 사이에 있는 의미에 있어서의 동일함(identity of meaning)을 대단히 분명한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eo Filius quo Verbum, et eo Verbum quo Filius" ["신학 대전(Summa Theol.)", I-I, xxvii, 2(필독 권고), "Contra Gent.", IV, xi]. 성 토마스의 이 가르침은 특별히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한 Pistoia 시노드(the Synod of Pistoia)의 단죄(condemnation)에서 교회에 의하여 이미 높게 승인되었습니다[Denzinger, "Enchiridion", 1460].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삼위일체(TRINITY) 를 보라).

[내용 추가일자: 2011년 1월 25일] 

여기를 클릭하면, 구약 성경의 본문 중에서 사용되고 있는 "하느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과 신약 성경 본문 중에서 사용되고 있는 "하느님의 아드님(성자, the Son of God)"의 차이점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441-445항들에 주어져 있는 설명들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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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오류 한 개(내용 추가일자: 2011년 2월 7일):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441항
에서,
 
"반드시 예수님이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시라는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라는 표현을, 
 
"반드시 가 인간보다 더 나은 것을 뜻하지 않는다"
 
로 교체하여 읽어 주실 것을 꼭 부탁드립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441항 및 제442항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즉시 파악할 수 있는데,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놓쳐 버린, 명백한 번역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대명사 "he"에 해당하는 표현을 글자 그대로 "그"로 번역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그" 라는 대명사가 누구를 지칭하는지를 스스로 파악하도록 하였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왜 이 대명사 "he"에 해당하는 표현을, 번역자가 굳이 "예수님"이라고 자의적으로, 그것도 "잘못" 해석을 하여서는, 우리말로의 번역시에 글자 그대로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을 하여 "그" 라는 대명사로 번역을 하는 대신에, "예수님"이라는 단어로, 잘못된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을 하였는지에 대하여,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를 클릭하면이 지적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상, 번역 오류에 대한 지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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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441-445항들에 주어진 설명만으로는, "하느님의 아드님(the Son of God)"의 정체성(identity)을 약 2000년전 당시의 지중해 문화적 환경 속에서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분명하게 철학적으로 인식하였는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위에 있는 성자(the Son of God, 하느님의 아드님)정의(definition)에 주어져 있습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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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15시간 (자료 조사 및 우리말 번역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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