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요한 20,9 에서 그때까지 가 아니고 아직??? 외 [성경번역오류_아직] #<부활주일복음> #<12월27일복음>

인쇄

. [218.55.90.*]

2014-03-24 ㅣ No.1535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게시자 주: 이 글의 원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부활 주일 복음 말씀에서 "아직 깨닫지 못하고" 혹은 "그때까지 깨닫지 못하고"? 외." 그리고 이 원 제목은 2014-04-18 오전 7:00 경에 현재의 제목으로 교체되었습니다.]

 

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4) 아래의 사진은 제1530번 글을 공개한지 30분도 경과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에, 동일한 ip(인터넷 접속 주소)를 사용하면서, 한 명이 한 개 이상의 id를 사용하여, 반대적어도 두 번하였음을 보여준다는 생각입니다. 조회 2건반대 3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누군가 한 명이 동일한 ip(인터넷 접속 주소)로 접속하게 되는 단체 혹은 자신의 컴퓨터에서 한 개 이상의 자신의 가족들 혹은 단체 구성원들의 id을 사용하여 고의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였다면, 악의적 의도를 지닌 자가 아니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서로의 얼굴을 대면하지 않는 인터넷 게시글 대화의 환경이므로 다른 이들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전혀 알 수가 없을 것이라는 대단히 잘못된 판단과 무지 때문에 여전히 어둠 속에 갇혀서 위와 같은 추한 행동을 하는,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자 때문에라도,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은 유의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꼬리가 길면 밟힌다(표준국어 대사전: 나쁜 일을 아무리 남모르게 한다고 해도 오래 두고 여러 번 계속하면 결국에는 들키고 만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는 속담이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또한 하게 됩니다.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1-1.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일치 정신에 따라 1969년에 개정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다음의 요한 복음서 20,1-9매년 부활절 주일의 복음 말씀이고, 그리고 요한 복음서 20,1ㄱ.2-8매년 12월 27일 복음 말씀입니다. 아래의 발췌문에서 일부 글자들을 굵게 하고 그리고 색칠을 한 것은 필자가 한 것입니다:

 

출처: http://bible.cbck.or.kr/bible_read.asp?p_code=&GS=S&Bible=50&Jang=20&x=21&y=14
(발췌 시작)

부활하시다(마태 28,1-8; 마르 16,1-8; 루카 24,1-12)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 발췌 끝)
 
          비록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순간을 직접 목격한 자는 없었으나, 적어도 예수님의 제자 한 명(다른 제자, 즉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보고 믿었다"는 더 이상 구체적일 수 없는 수준의 "목격 증언"바로 빈 무덤 안을 살펴본 후에 있었음을 이 복음 말씀은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즉, 사도 요한)의 바로 이 "보고 믿었다"에 대한 2011년 4월 23일자의 정밀한 고찰의 글, "개켜져 있었다" 라는 번역 표현이 심각한 번역 오류임을 지적하는 글은 다음에 있습니다. 이 글에서 말씀드리는 바와 대단히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으며, 따라서 되도록 많은 분들께서 읽으실 것을 권고드립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42.htm <----- 필독 권고


1-2. 이번 글에서는, 예수님의 제자 한 명(다른 제자, 즉 사도 요한)이 "보고 믿었다" 고 증언하는 제8절에 이어지는 요한 복음서 20,9을,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다음은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8-9 전문입니다:

 

(발췌 시작)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 발췌 끝)

 

이들 두 개의 절들을 잘 읽어보면, 제8절은 "빈 무덥 안에 남겨져 있었던 것들을 눈으로 보자마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다른 제자(즉, 사도 요한)가 믿게 되었다"는 내용이나, 그러나 제8절에서 다른 제자(즉, 사도 요한)가 "보고 믿었다"는 내용과 모순적인 언급, 즉 양립할 수 없는 언급이 바로 이어지는 제9절에 주어져 있습니다. 즉,

 

질문 1: 이렇게 다른 제자 한 명(즉 사도 요한)이 이미 "보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찌하여 혹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할 수가 있었다는 것인지요???

 

아래에 계속되는 글에는, 예를 들어, 다음의 내용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출처들의 제시와 함께,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 다음 -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1에서 "아직도" 로 번역된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와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9에서 "아직" 으로 번역된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결코 동일하지 않으며, 따라서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9에서 "아직" 으로 번역된 단어는, "공동번역성서"의 해당 절에서 처럼, "그때까지" 로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상, 다음 끝)

 

게시자 주: 그리고 다음은, 2011년 1월 16일자 가톨릭신문 기사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 지역 교회 교도권의 의향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1: https://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197433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01.htm [2011년 1월 17일자 글] 

(발췌 시작)
...

 

그동안 한국교회 안에서는 분도출판사의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도서출판 일과 놀이의 「해설판 공동번역 성서」 등이 나온 바 있으나, 본격적인 의미의 주석 성경으로는 평가받지 못했다.

 

...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이형우 아빠스도 "성경말씀은 개개인의 생각보다는 교회의 거룩한 전통과 가르침을 배경으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며 "「주석 성경」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오류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돕는 길잡이와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라고 역설했다.

 

...

 

주교회의 사무총장 이기락 신부는 "「성경」은 가능한 한 본문에 충실한 번역과 교회 공용으로 쓴다는 두가지 목표 아래 번역됐지만, 이 두 목표를 한꺼번에 이룬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실제 전례 사용 등에서는 다소 불편한 측면이 있었다"며 "이제 본문에 충실한 번역이 나왔으니, 이를 토대로 더욱 많은 성서학자들이 진지하고 독창적인 연구를 이어가길 바란다"고 역설했다.

또한 이 신부는 "언어는 사회문화적 발전과 더불어 끊임없이 진화하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그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성경 번역은 늘 새롭게 시작되고 끊임없이 지속돼야할 과제"라며 "이러한 연구 활동이 독자적인 새로운 주석 작업을 촉진하고 나아가 번역문의 개정 또는 새로운 번역으로 이어져야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상, 발췌 끝)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께서는, 요한 복음서 20,9"아직""그때까지" 로 교체한 후에, 요한 복음서 20,9과 20,9를 한 두 번 정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1-3. 우선적으로, 다음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아직" 이라는 우리말 단어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출처: http://124.137.201.223/search/View.jsp

(발췌 시작)
아직

 

부사

어떤 일이나 상태 또는 어떻게 되기까지 시간이 더 지나야 함을 나타내거나, 어떤 일이나 상태가 끝나지 아니하고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


¶ 동생이 아직 잠을 잔다./그는 아직 청춘이다./봄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밥이 아직 덜 됐다./시험은 아직 두 달이나 남았다./배는 고픈데 아직 3시밖에 안 됐다./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아직까지 나만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여봐라, 저놈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매우 쳐라!≪문순태, 타오르는 강≫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1-3: 따라서, "아직""여전(如前)히(즉, 전과 같이, still)" 와 동의어임을 할 수 있습니다.

 

1-4. 그리고 다음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그때" 라는 우리말 단어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출처: http://124.137.201.223/search/View.jsp

(발췌 시작)

그때

 

「명사」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시간상의 어떤 점이나 부분. ≒이시02(伊時).


¶ 짐이 너무 무거웠는데 그때 도와주어서 고마웠다./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나의 손을 붙잡고 무던히도 기뻐하셨는데, 그때의 광경을 나는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정비석, 비석과 금강산의 대화≫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1-4: 따라서, "아직" "그때까지" 와 결코 동의어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2. (질문 1에 대한 답변 시작)

 

게시자 주 2: "새 번역 성경" 자체가 번역서이므로, 이번 항에서는 여러 지역 언어들로 번역된 (그리스어본과 라틴어본 포함) 요한 복음서 20,9을 정밀하게 서로 비교/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1. 그리스어본 요한 복음서 20,8-9:

출처: http://www.ellopos.net/elpenor/greek-texts/new-testament/john/20.asp

(발췌 시작)
 

 

[위의 주소에서 함께 제공되고 있는 영어 번역문}

8 Then went in also that other disciple, which came first to the sepulchre, and he saw, anded.

9 For as yet they knew not the scripture, that he must rise again from the dead.

(이상, 발췌 끝)

 

2-2. 대중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 요한 복음서 20,6-9:

출처: http://www.newadvent.org/bible/joh020.htm

(발췌 시작)
6 Venit ergo Simon Petrus sequens eum, et introivit in monumentum, et vidit linteamina posita,

7 et sudarium, quod fuerat super caput ejus, non cum linteaminibus positum, sed separatim involutum in unum locum.

8 Tunc ergo introivit et ille discipulus qui venerat primus ad monumentum: et vidit, et credidit:

9 nondum enim sciebant Scripturam, quia oportebat eum a mortuis resurgere.

 

[위의 주소에서 함께 제공되고 있는 Knox Bible 요한 복음서 20,6-9]

6 Simon Peter, coming up after him, went into the tomb and saw the linen cloths lying there,

7 and also the veil which had been put over Jesus’ head, not lying with the linen cloths, but still wrapped round and round in a place by itself.

8 Then the other disciple, who had reached the tomb first, also went in, and saw this, and learned to believe.

9 They had not yet mastered what was written of him, that he was to rise from the dead. 

(이상, 발췌 끝)

 

2-3.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새 대중 라틴말 성경(Nova Vulgata) 요한 복음서 20,6-9: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bible/nova_vulgata/documents/
nova-vulgata_nt_evang-ioannem_lt.html#20

(발췌 시작)

6 Venit ergo et Simon Petrus sequens eum et introivit in monumentum; et videt linteamina posita
7 et sudarium, quod fuerat super caput eius, non cum linteaminibus positum, sed separatim involutum in unum locum.
8 Tunc ergo introivit et alter discipulus, qui venerat primus ad monumentum, et vidit et credidit.
9 Nondum enim sciebant Scripturam, quia oportet eum a mortuis resurgere.
(이상, 발췌 끝)

 

2-4. Douay-Rheim Version 요한 복음서 20,8-9:

출처: http://haydock1859.tripod.com/id113.html

(발췌 시작)
8 Then that other disciple also went in, who came first to the sepulchre; and he saw, and believed.

9 For as yet they knew not the Scripture, that he must rise again from the dead.
(이상, 발췌 끝) 

 

2-5. 1611년에 초판 발행된 King James Version 요한 복음서 20,8-9:

출처: http://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John%2020&version=KJV

(발췌 시작)

8 Then went in also that other disciple, which came first to the sepulchre, and he saw, and believed.
9 For as yet they knew not the Scripture, that he must rise again from the dead.
(이상, 발췌 끝)

 

2-6. RSVCE (Revised Standard Version Catholic Edition) 요한 복음서 20,6-9: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easter.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6] Then Simon Peter came, following him, and went into the tomb; he saw the linen cloths
lying,

[7] and the napkin, which had been on His head, not lying with the linen cloths but rolled up in a place by itself.

[8] Then the other disciple, who reached the tomb first, also went in, and he saw and believed;

[9] for as yet they did not know the Scripture, that He must rise from the dead.

(이상, 발췌 끝)

 

2-7.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영어본 성경인 NAB(New American Bible) 요한 복음서 20,8-9: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XS.HTM

(발췌 시작)

8 Then the other disciple also went in, the one who had arrived at the tomb first, and he saw and believed.

9 For they did not yet understand the scripture that he had to rise from the dead.

 

-----
[9] Probably a general reference to the scriptures is intended, as in ⇒ Luke 24:26 and ⇒ 1 Cor 15:4. Some individual Old Testament passages suggested are ⇒ Psalm 16:10; ⇒ Hosea 6:2; ⇒ Jonah 2:1, 2, ⇒ 10.

-----

(이상, 발췌 끝)

 

2-8.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이탈리아어본 요한 복음서 20,8-9: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ITA0001/__PW4.HTM

(발췌 시작)
[8] Allora entrò anche l'altro discepolo, che era giunto per primo al sepolcro, e vide e credette.
[9] Non avevano infatti ancora compreso la Scrittura, che egli cioè doveva risuscitare dai morti.

(이상, 발췌 끝) 

 

2-9.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스페인어본 요한 복음서 20,8-9: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SL0506/__PWQ.HTM

(발췌 시작)

8 Luego entró el otro discípulo, que había llegado antes al sepulcro: él también vio y creyó.

9 Todavía no habían comprendido que, según la Escritura, él debía resucitar de entre los muertos.
(이상, 발췌 끝)

 

2-10. "공동번역성서" 요한 복음서 20,8-9:

(발췌 시작)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 가서 보고 믿었다.

9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 발췌 끝)

 

(*) 게시자 주: "그떄까지" 라고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을 하는 대신에, 다른 지역 언어본 성경들의 요한 복음서 20,9에서 사용되고 있지 않은, "also" 에 해당하는 강조의 표현인 "도"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 굳이 추가하여, "그때까지" 라고 번역한 이유를 알 수 없다.

 

2-11.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8-9:

(발췌 시작)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 발췌 끝)

 

3.

3-1. 다른 한편으로, 위의 제2-1항부터 제2-9항에 이르기까지, 영어 "not as yet" 혹은 "not yet" 으로 번역된, 란 색칠을 한 여러 지역 언어로 번역된 단어들에 대응하는, 그리스어본 요한 복음서 20,9에서 사용되고 있는 그리스어 단어의 어원, 의미는 "not yet(그때까지 ... 하지 못하다), never before(그 시점 이전에 결코 ... 하지 못하다)" 라고 합니다:

 

출처 3-1-1: http://biblehub.com/lexicon/john/20-9.htm

출처3-2- 2: http://biblehub.com/greek/3764.htm <----- 클릭하여 반드시 직접 확인하십시오

 

3-2. (이번 글의 결론)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하더라도, 우리말 어법에 의하면, 우리말 표현에 있어 "그때까지""특정 시점 이전의 시기부터 바로 이 특정 시점까지"를 말하나, 그러나 "아직(도)" "특정 시점 이후의 어느 시점까지"를 말하므로, 이들 우리말 두 표현들을 결코 함부로 동일시하여서는 아니됩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여러 지역 언어들로 번역된 요한 복음서 20,8-9를 함께 정밀하게 비교/검토한 바에 의하면, 전후 문맥 안에서 "그 시점까지"의 의미를 지닌, 요한 복음서 20,9에서 영어로 "as yet" 혹은 "yet", 으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를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9에서, "그때까지" 로 번역하는 대신에, "아직" 으로 번역한 것은, 위의 제1-3항에 발췌된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아직" 이라는 우리말 단어의 설명에 따르면, 번역 오류가 분명함을 알 수 있습니다.

 

3-3. 혹시 위의 제3-2항의 결론에 동의하는 데에 망설이는 분들께서는, 예를 들어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1989년 2얼 1일자 교리 교육용 일반 알현 강론 말씀 [제목: From the Empty Tomb to the Meeting with the Risen Christ (빈 무덤에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남까지)] 중에서 발췌 된 다음의 해석을 또한 여러 번 읽으면서 묵상하실 것을 권고드립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audiences/alpha/data/aud19890201en.html

(발췌 시작)

Peter and John were among those who received the news from Mary Magdalen (cf. Jn 20:3-8). They went to the tomb with a certain hesitancy, all the more so since Mary had told them that Jesus' body was missing from the tomb (cf. Jn 20:2). On arriving at the tomb, they too found it empty. They ended by believing, after quite some hesitation, because as John says, "they did not yet understand the Scriptures, that he had to rise from the dead" (Jn 20:9).

 

베드로(Peter)와 요한(John)은 마리아 막달레나(Mary Maggdalen)으로부터 이 소식을 받았던 자들 중에 있었습니다(요한 복음서 20,3-8 참조). 그들은 어떤 분명한 망설임과 함께 무덤으로 갔는데, 마리아가 그들에게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없어졌다고 말하였기 때문에(요한 복음서 20,2 참조) [그들은] 더욱더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무덤에 도착하자마자, 그들도 또한 이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상당한 망설임 후에, 믿는 것으로 끝났는데(ended by believing),(*) 왜냐하면 요한이 말하듯이, "그들은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본문을 그 시점(**)까지 전혀(yet) 깨닫지 못하였기" (요한 복음서 20,9) 때문입니다.

 

-----

(*) 번역자 주: 복자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다른 제자(즉, 사도 요한) 혼자가 아니라, 베드로와 다른 제자(즉, 사도 요한) 둘 다가, 상당한 망설임 후에, 믿는 것으로 끝났다고 말씀하심에 주목하라.

 

(**) 번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그 시점"이란 요한 복음서 20,9 이전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즉 사도 요한) 각자가 자신 고유의 두 눈들로 직접 본 시점"을 말한다.

-----

 

Truth to tell, the fact was dumbfounding for those men who were confronted by a situation which was far beyond them. The same difficulty which the traditions of the event show in giving a fully consistent account of it, confirms its extraordinary character and the upsetting effect it had on the minds of the fortunate witnesses. The reference "to the Scripture" is a proof of their confused perception of finding themselves in the presence of a mystery, on which only revelation could throw light.

 

사실은, 이 사실이 그들[의 이해] 넘어 멀리에 있는 한 개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 자들에게 말문이 막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한 개의 충분히 일관된 이야기를 제공함에 있어 이 사건에 대한 [교회의] 전승(the traditions)들이 보여주는 바로 이 동일한 어려움은 이 사건의 비상한 특징(extraordinary character)을 그리고 운이 좋았던 목격자들의 마음(minds)들에 이 사건이 유지하였던(had) 뒤집어 엎는 결과(the upsetting effect)를 확인합니다.(*) "성경 본문에" 대한 언급은, 그 위에 오로지 계시(revelation)만이 빛을 던질 수 있는, 한 개의 오적(奧跡, 깊은 흔적)(a mystery, 신비)의 현존(presence) 안에 있는 그들 자신들을 발견함이라는 그들의 헷갈리는 인지(認知)(their confused perception)에 대한 한 개의 증거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5월 30일]

-----

(*) 번역자 주: 바로 이 설명은, 우리말본이 아닌, 예를 들어, 다음의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643항에 잘 설명되어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643_en.htm

-----

[이상, 내용 추가 끝]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3-3: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부터 우리는 요한 복음서 20,1-8에 서술되어 있는 "빈 무덤" 상황 전반에 대한 전후 문맥 및 그리스어 단어의 어원 등으로부터,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9에 "아직" 으로 번역된 표현은, 요한 복음서 20,1-9까지의 내용 전달에 있어 우리말 어법에 어긋나는 잘못 선정된 차용(借用) 번역 용어이므로"그때까지" 로 마땅히 교체되어야 함을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확인하였습니다.

(이상, 질문 1에 대한 답변)

 

3-4. 사실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는 번역 오류는, 일찌기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성경 본문의 무오성에 대하여 지적하였던 세 가지 경우들 중에서, 지역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번역 오류의 경우에 해당하며, 이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79.htm <----- 필독 권고

 

4.

국내의 개신교측과 함께 작업하여 1977년에 초판 발행되었던 "공동번역성서" 요한 복음서 20,9에서 "그때까지도" 로 대단히 정확하게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이 되었던 단어가, 어찌하여 2005년에 초판 발행된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9에서 "아직" 이라는 성경 본문의 내용을 대단히 많이 왜곡하는 단어로 바뀌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어떠한 과정과 어떠한 상황에서 이러한 신앙적으로 대단히 불행한 일이 발생하였는지에 대하여, 지금부터 함께 고찰하고자 합니다. 

 

4-1. 우선적으로 다음은,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 제공의 국내의 개신교측의 우리말 성경 중의 요한 복음서 20,9를 읽을 수 있는데, "아직도" 라는, 전후 문맥에 있어 우리말 어법에도 또한 맞지 않는, 차용 번역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발췌 시작)
[1993년에 초판 발행된 표준새번역 요한 복음서 20,8-9]

8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9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998년에 초판 발행된 개역개정판 요한 복음서 20,8-9]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2001년에 초판 발행된 새번역 요한 복음서 20,8-9]

8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9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상, 발췌 끝)

 

그래서, 2014년 3월 26일 오후에 성경 본문에 상당히 밝은 개신교 신자인 교수님 한 분과 함께 개신교측 영어본 요한 복음서 20,9와의 비교/검토를 하면서 말씀을 나누었던 바, 이 검토 후에 이 분 또한, "그때까지" 아니라"아직도"라고 번역한 것은 전후 문맥 안에서 분명한 번역 오류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가깝게 지내는 개신교 목회자들께 이 번역 오류 문제를 전달해 주실 것을 이 교수님께 또한 요청드렸습니다.

 

게시자 주 4-1: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하더라도, 우리말 어법에 의하면, 우리말 표현에 있어 "그때까지""특정 시점 이전의 시기부터 바로 이 특정 시점까지"를 말하나, 그러나 "아직(도)" "특정 시점 이후의 어느 시점까지"를 말하므로, 이들 우리말 두 표현들을 결코 함부로 동일시하여서는 아니됩니다.

 

4-2. 이미 위에서 제시해 드렸습니다만, 다음은 1977년에 초판 발행된 "공동번역성서" 요한 복음서 20,8-9 전문입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bible/bbl_read_sori.asp?gubun=new&code=50&JangNo=20&JangSum=21

(발췌 시작)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 가서 보고 믿었다.

9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 발췌 끝)

 

4-3. 다른 한편으로, 다음은 "200주년 신약성서" 요한 복음서 20,8-9 전문입니다. 위에 발췌된 "공동번역성서" 요한 복음서 20,9에서의 "그 때까지도""아직도" 바뀌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bible/bbl_read_sori.asp?gubun=200new&code=77&JangNo=20&JangSum=21

(발췌 시작)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와서는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아직도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는 성경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 발췌 끝)

 

그리고 1977년"공동번역성서"가 초판 발행된 이후, 국내의 가톨릭측에 있어 "200주년 신약성서"가 초판 발행될 때까지 발행된 성경이 없다고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는 알고 있으며, 따라서, "200주년 신약성서" 요한 복음서가 집필되는 과정에서, 요한 복음서 20,9에서, "공동번역성서"의 해당 구절에서와는 달리, "아직도" 라는 용어가 잘못 선정되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정을 하게 됩니다.  

 

게시자 주 4-3: 다음의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발행의 사목 잡지, 1997년 1월 216호에 실린 논문 [제목: 신약성서의 공동체관]에 주어진 각주 22)에 의하면, "200주년 신약성서" 요한 복음서 주해서 (이영헌 역주) 초판이 늦어도 1996년에 분도출판사에서 출판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http://samok.cbck.or.kr/content/PrintArticle.asp?idx=3615 

 (이상, 게시자 주 끝)

 

그리고, 만약에 이 추정이 사실이라고 할 때에, 더 나아가, "아직" 이라는 잘못된 번역 용어의 선정이
(i) 단순히 우발적인 행위였는지,
(ii) 혹은 의도적으로 자행된 행위였는지에 대하여서도

또한 별도로 고찰하여야 할 것입니다.

 

4-4. 다음은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8-9 전문입니다:

 

츨처: http://info.catholic.or.kr/bible/bbl_read_sori.asp?gubun=new2&code=150&JangNo=20&JangSum=21 

(발췌 시작)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4-4: 바로 위의 제4-4항에 발췌된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8-9와 위의 제4-3항에 발췌된 "200주년 신약성서" 요한 복음서 20,8-9를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면, 이들이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습니다.

 

5.

5-1. 그런데 대단히 놀랍게도, 그리고 정말로 예상밖으로,

 

(i) "공동번역성서", "200주년 신약성서", 그리고 "새 번역 성경" 의 요한 복음서 20,1 모두에서 동일하게 "아직(도)" 로 번역되고 있는 그리스어 단어의 어원,

 

(ii) 위의 제3-1항에서 말씀드린,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9에서 "아직(도) ... 하지 못하다" 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의 어원과

 

결코 동일하지 않음, 

 

위의 제3-1항에서 말씀드린 요한 복음서 20,9의 그리스어 원문 출처 주소들과

출처 3-1-1: http://biblehub.com/lexicon/john/20-9.htm (oudepó, not as yet)

출처3-2- 2: http://biblehub.com/greek/3764.htm <----- 클릭하여 반드시 직접 확인하십시오

 

다음의 요한 복음서 20,1의 그리스어 원문 출처 주소들을

출처 5-1-1: http://biblehub.com/lexicon/john/20-1.htm  (eti, still)

출처 5-1-2: http://biblehub.com/greek/2089.htm  <----- 클릭하여 반드시 직접 확인하십시오

 

클릭하여 서로 비교/검토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4월 12일]

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요한 복음서 20,9 에서 사용된 단어와 동일한 어원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새 번역 성경" 의 신약의 네 개의 절들인데 모두, "그때까지" 대신에, "아직" 으로 잘못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어느 차용 번역 용어의 선택이 우리말 어법에도 맞는 올바를 차용 번역 용어인지, 전후 문맥 안에서, 다음의 발췌문들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면서 읽도록 하십시오:

 

5-1-1. 기존의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7,39

[주: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 전야 복음 말씀(요한 7,37-39)에 포함됨]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5918&gomonth=2014-06-07

(발췌 시작)
37 축제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시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39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와 계시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5-1-1: 위의 제1-3항에 발췌된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아직" 이라는 우리말 단어에 대한 설명을 반드시 숙지한 후에, 바로 위의 발췌문 전문과 바로 아래의 전문을, 전후의 문맥 안에서, 우리말 어법에 맞는지에 대하여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십시오:

(바로 잡은 문장)

37 축제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시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39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때까지 와 계시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 바로잡기 끝)

 

5-1-2. 기존의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19,41

(발췌 시작)

39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케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40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41 예수님께서 심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5-1-2: 위의 제1-3항에 발췌된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아직" 이라는 우리말 단어에 대한 설명을 반드시 숙지한 후에, 바로 위의 발췌문 전문과 바로 아래의 전문을, 전후의 문맥 안에서, 우리말 어법에 맞는지에 대하여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십시오:

(바로 잡은 문장)

39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케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40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41 예수님께서 심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그때까지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이상, 바로잡기 끝)

 

5-1-3. 기존의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9

본글에서 집중적으로 고찰 중에 있음.

 

5-1-4. 기존의 "새 번역 성경" 사도 행전 8,16

[주: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가해 부활 제6주일 제1독서(사도 행전 8,5-8.14-17)에 포함됨]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5904&gomonth=2014-05-25

(발췌 시작)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다. 15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16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17 그때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5-1-4: 위의 제1-3항에 발췌된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아직" 이라는 우리말 단어에 대한 설명을 반드시 숙지한 후에, 바로 위의 발췌문 전문과 바로 아래의 전문을, 전후의 문맥 안에서, 우리말 어법에 맞는지에 대하여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십시오:

(바로 잡은 문장)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다. 15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16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17 그때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이상, 바로잡기 끝)

[이상, 2015년 4월 12일자 내용 추가 끝]

 

질문 2: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그 어원들이 완전히 다른, 따라서 그 자구적 의미/어의(liteal sense)들이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들을, "공동번역성서" 요한 복음서 20,1에서는 "아직" 그리고 "공동번역성서" 요한 복음서 20,9에서는 "그때까지도" 로 서로 분명하게 구분하여 매우 정확하게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한 것[단, 영어로 "also"에 해당하는 단어인 "도"를 우리말 번역 과정에서 임의적/자의적으로 추가한 것은 제외]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대신에,  "200주년 신약성서" 와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1과 20,9에서 동일한 단어인 "아직(도)" 로 번역하였습니까???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하더라도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발생한 이러한 종류의 번역 오류는, 정말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으며, 따라서 "200주년 신약성서" 요한 복음서 20,9 에서, 해당 그리스어 단어를 "그때까지 ... 하지 못하다" 로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하지 않고, 굳이 "아직도 ... 하지 못하다" 로 대단히 잘못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한 것에 대하여,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물적 증거들이 기록된 성경 본문인 요한 복음서 20,1-9에 대한 국내의 가톨릭 신자들의 올바른 이해를 힘들게 하는 결과의 초래라는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이 번역 오류가 우연적이었거나(accidental) 혹은 의도적이었거나(intentional)의 여부와 무관하게, 대단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우리나라 지역 가톨릭 교회의 주교님들께서 이 번역 오류에 대한 그 책임 소재의 구체적인 파악과 함께, 필요하다면, 상응하는 처벌을 하셔야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감히 하게 됩니다.

 

그리고, "새 번역 성경" 이 마련되는 과정에서도, 요한 복음서 20,9에 잘못 선정된 차용 번역 용어인 "아직"이 사용되고 있음을, 비록 여러 번 윤독을 하였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였음도 또한 상당히 아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되도록 빨리, 조만간 바로잡졌으면 하는 바램뿐입니다.

 

5-2. 현재의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9에 잘못 선정된 차용 번역 용어인 "아직"이 사용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없는 대다수의 가톨릭 교우들(여기에는 성직자 및 수도자들 포함)이 어떠한 오류(errors)들에 빠져들게 되는지 한두 개의 예(examples)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5-2-1. 현재의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1-9에 대한 강론 혹은 훈화를 준비하면서 마련된 글에서, 현재의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9을 읽고서 이 절에 언급된 바가 바로 직전의 요한 복음서 20,1-8의 내용과 충돌한다고 잘못 판단하여, 심적 갈등에 빠지고, 그러나, 더 나아가, 본의 아니게,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훼손하는, 오류가 있는 글을 작성하게 될 수도 있고, 그리고 그러한 잘못을 담고 있는 글을, 예를 들어, 성작자 고유의 권위 혹은 듣기에 그럴듯한 어떤 사목적 이유 등을 내세우면서, 혹은 "영성" 운운하면서, 예를 들어, 시쳇말로 "염화시중의 미소" 까지 들먹이면서, 도가 지나친 정당화의 시도 등과 같은 또다른 형태의 오류.

 

5-2-2. 더 심각한 문제는, "200주년 신약성서" 요한 복음서 20,9 혹은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9에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는 그러한 종류의, 인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 수준의, 그러나 대단히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가 있을 수도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대부분의 보통 수준의 교우들이 그러하듯이, 오히려, 100% 신뢰하면서, 누군가가 이 절에 근거하여 요한 복음서 20,1-9의 여러 절들에 대한 주석들을 마련하였다면, 이 주석들에서 과연 어떠한 주장까지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 번쯤 해 보셨는지요? 그리고 지금 지적한 바에 대하여서는, 예(example)를 들어,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 특히 국내의 성직자(주교님들 포함) 및 수도자들께서 필히 확인하도록 하십시오

 

게시자 주 5-2-2: 위의 요한 복음서 20,1-10에 대한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서"의 주장은, 개신교측의 자유주의 성서 학자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년)에 의하여 신성시되었고(canonized by) 그리고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에 속하는 미국의 개신교측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널리 사용되어온,(*) 그러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서의 성서 해석에 대한 가르침에 전적으로 상반되는 방향으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물적 증거들이 기록된 성경 본문인 요한 복음서 20,1-9이 전하는 역사적 사실을 최대한 훼손하려고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 게시자 주: 다음의 글들을 꼭 읽도록 하라:

1.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67.htm 
[주: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의 잘못된 주장들에 대한 2009년 10월 8일자 글]


2.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44.htm 
[주: 불트만(Bultmann)의 이러한 시도가 끼친 해악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2010년 8월 2일자 글]

 

3.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13.htm 
[주: 교황청 성서 위원회 100주년에 즈음하여 마련된 신앙 교리성 장관 라칭거 추기경님(이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2003년 글 (제목: RELATIONSHIP BETWEEN MAGISTERIUM AND EXEGETES, 교도권과 성경 주석 사이의 관계)]

 

4.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38.htm <----- 꼭 필독하십시오.

[주: 2008년 10월 14일에 개최된 제12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4차 전체회의에서 주어진 성서 해석과 신앙에 대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연설문과 이 연설문에 대한 몬시뇰 John F. McCarthy의 해설]

 

(**) 게시자 주: 아래의 제6-5항에 안내된 글 중의 제4-4항에서 또한 발췌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42.htm

(발췌 시작)

Therefore, St. Thomas Aquinas can say that "the individual arguments taken alone are not sufficient proof of Christ's resurrection, but taken together, in a cumulative way, they manifest it perfectly. Particularly important in this regard are the spiritual proofs (cf. specially Luke 24:25-27), the angelic testimony (cf. Luke 24:4-7) and Christ's own post-resurrection word confirmed by miracles (cf. John 3:13; Matthew 16:21; 17:22; 20:18)" (St.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III, q. 55, a. 6 ad 1).

 

그러므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단독으로 거론하게 되는 개별적 논증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아니며, 함께 취합되어, 누적되는 방식으로, 이 논증들은 당신의 부활을 완벽하게 입증한다(manifest). 특히 이것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들에는 영적 입증(spiritual proofs)들 (특별히 루카 복음서 24,25-27를 참조하라), 천사들의 증언 (루카 복음서 24,4-7을 참조하라) 그리고 그리스도 당신 고유의 부활 후의 말씀이 있다(요한 복음서 3,13; 마태오 복음서 16,21; 17,22; 20,18을 참조하라)"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ans),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II, q. 55, a. 6 ad 1].

(이상, 발췌 끝)

-----

 

6.

이번 항에서는, 요한 복음서 20,8-9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주석들을 연대순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주석들이, 바로 위의 제5-2-2항에서 예(example)로서 제시된, 요한 복음서 20,1-10에 대한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서"의 주장과 그 내용에 있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다른지에 대하여 정밀하게 비교/검토하시기 바랍니다.

 

6-1.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에 의하여 편집되어 마련된 황금 사슬(Golden Chains)에 주어진 요한 복음서 20,1-9헤 대한 교부들과 성경 주해자들의 주석들인,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제목: 부활 주일 복음 말씀에서, 개켜져 있었다??? - 요한 20,7] 의 제4-1항을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42.htm

 

6-2. 요한 복음서 20,9에 대한 해설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요한 복음서 주해서 제2488항과 제2489항에 주어진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dhspriory.org/thomas/John20.htm

(발췌 시작)

2488 Next when he says, he saw and believed, we see the effect of the investigation. At first glance it seems to mean that he saw the situation and believed that Christ had arisen. But according to Augustine this is not correct, because the next thing the Evangelist says is, for as yet they did not know the scripture, that he must rise from the dead.[4] Therefore, one must say that he saw the empty tomb and believed what the woman had said, which is that someone had taken the Lord. Then we read, for as yet they did not know the scripture, because the meaning of the Scripture was not yet opened to them so they could understand it (Lk 24:45).

 

2488 그 다음에, 그는 보았고 그리고 믿었다, 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이 조사의 결과를 봅니다. 얼핏 보기에 이 구절은 그가 이 상황을 보았으며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미 부활하셨음을 믿었던(had believed)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Augustine, 354-430년)에 따르면 이것은 정확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이 복음사가가 말한 그 다음의 것이 이는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그때까지(as yet)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기 때문입니다.[4]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빈 무덤을 보았으며 그리고, 어떤 자가 주님[의 시신]을 이미 가져가 버렸다는, 그 여자가 이미 하였던 말을 믿었다(believed)고 말하여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그때까지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다, 로 읽는데, 왜냐하면 성경 말씀의 의미는 그들이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그때까지(yet) 개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루카 복음서 24,45).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5월 28일]
-----

(*) 번역자 주:

(1) 우선적으로, 성경의 경전들 중에서 오로지 요한 복음서의 저자인 성 요한이,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의 제7-4항에서 정밀하게 고찰하고 있듯이, 자신의 복음서인 요한 복음서 본문 중에서, "believe" 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가 나타내는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와 "believe in" 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표현이 나타내는 자구적 의미 사이의 대단히 커다란 차이점(enormous difference)을 분명하게 구분하면서, 이들 두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8.htm <----- 필독 권고

 

(2) 이제, 바로 이 (*) 부분에서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가 이렇게 주석한 이유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에 주어져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정의하는(define) "believe" 라는 동사의 자구적 의미/정의(definition)에 따르면, 이 복음서의 인간 저자인 성 요한이 요한 20,8에서, "believed in" 이라는 표현 대신에, "believed" 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9.htm <----- 필독 권고

 

(3) 왜냐하면, 성 요한이 요한 복음서 20,6-7에 기록된 바를 자신의 눈들로 목격하였을 바로 그 시점에 또한, 바로 이어지는 20,9절에서의 언급과는 정 반대로, 만약에(if)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예언의] 성경 말씀을 이미 깨닫고 있었더라면(knew), 자신이 요한 복음서 20,6-7에 기록한 바와 같은 대단히 놀라운 빈무덤 안에 남겨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증거물(witnesses)들로부터,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의 구현(fulfilment)을 알아차렸을 것이고(recognized), 그리하여 더 나아가, 자신의 의지(will)의 동의(assent)와 함께, 이 예언의 말씀을 믿었을 것이기(believed), 즉, 그분께서 이미 부활하셨음을 참(true)으로서, 진본(authentic)으로서, 혹은 실재(實在, reality)로서 받아들였을 것이기(accepted), 때문이다. 

-----

[이상, 내용 추가 끝].

 

But certainly Christ had foretold his passion and resurrection? "I will rise on the third day" [Mt 20:19]. I answer that we should say that in keeping with the way they heard his parables, they failed here also to understand many things which he had said plainly, thinking that he meant something else.

 

그러나 확실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이미 예고하셨지요? "나는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20,19).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그들은 당신의 비유들을 들었던 방식을 따라가는 행위 안에서, 당신께서 다른 그 무엇을 의미하셨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들은 당신께서 명백하게(plainly) 이미 말씀하셨던 다수의 것들을 또한 여기서 이해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우리는 반드시 말하여야만 합니다(should). 

 

2489 Or, according to Chrysostom's understanding, he saw the linen cloths so folded and arranged which would not have been the case if the body had been furtively snatched away; and believed, with a true faith, that Christ had risen from the dead.[5] What follows, for as yet they did not know the scripture, refers to the statement, he saw and believed. It was like saying: before he saw these things he did not understand the scripture that he must rise from the dead; but when he saw he believed that he had risen from the dead.

 

2489 혹은, 크리소스토모(Chrysostom, 347-407년경)의 이해에 따르면, 만약에 시신이 몰래 강탈당하였더라면 그 경우가 아니었을 것인, 아마포 천들이 잘 둘둘 말려져 있고(folded) 그리고 정돈되어 있는(arranged) 것을 그는 보았고 그리하여 그는, 참된 신앙(faith, 믿음)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로부터 이미 부활하셨음을 믿었습니다(believed)[5]. 뒤따르는 바인 성경 말씀을 그때까지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다는, 그가 보았고 그리하여 믿었다라는 문장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거의 같았습니다: 그가 이들 사물들을 보기 전에 그는 그분께서 죽은 이들로부터 다시 살아나셔야만 한다는 성경 본문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그러나 그가 [이들 사물들을] 보았을 때에 그는 그분께서 죽은 이들로부터 이미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었습니다(believed).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6-3. 다음은 The Great Biblical Commentary of Cornelius a Lapide(1567-1637년)에 주어진 요한 복음서 20,8-9에 대한 주석들에서 유관 주석들을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corneliusbiblecommentary.faithweb.com/20john.htm

(발췌 시작)

And he saw and believed. Both of them, that is, believed that what Mary Magdalene said was true, namely, that the Body of Christ had been taken away. So says S. Augustine, Theophylact, and Jansen.  S. Cyril, Chrysostom, Euthymius, and Nyssen add that both believed that Christ had risen. But this word “believed” more clearly and correctly applies only to S. John, who remembered the words of Christ, that He would rise on the third day. But Peter, on account of the strangeness of a Resurrection, and from His earnest desire to see Him alive again, was more slow to believe that Christ had risen. Whence the Angel significantly said to the women, “Go, tell His disciples and Peter.” (Mark xvi. 7.)

 

그는 보았고 그리고 믿었다(believed). 즉 그들 둘 다는 그리스도의 시신이 이미 치워져 버렸다는 마리아 막달레나(Mary Magdalene)가 말하였던 바를 믿었습니다(believed).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 테오필락토(Theophylact), 그리고 얀센(Jansen)도 그렇게 말합니다. 성 치릴로(St. Cyril), 크리소스토모(Chrysostom), 에우티미오(Euthymius, 377-473년), 그리고 니센(Nyssen)은 둘 다가 그리스도께서 이미 부활하셨음을 믿었다고 추가하여 말합니다(add). 그러나 바로 이 단어 "믿었다(believed)" 는, 그분께서 사흗 날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였던 자인 성 요한(St. John)에게 더 분명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적용됩니다. 그러나 베드로(Peter)는, 거룩한 부활(a Resurrecction)의 이상함 때문에,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뵙고자 하는 자신의 진지한 욕망(desire)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부활하셨음을 믿는(believe that) 데에 더 더디었습니다(slow). 그런 이유으로 그 천사는 여자들에게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알려라" 라고 두드러지게 말하였던 것입니다(마르코 복음서 16,7).

 

Ver. 9. For as yet they knew not the scriptures, that He must rise again from the dead. For although He had solemnly assured them that He would rise, yet on account of its strange and wonderful nature they believed it not, but thought that He spoke in a figure and parable, as He was wont to do.

 

제9절.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그때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비록 당신이 부활할 것이라고 당신께서 그들에게 이미 장엄하게 확실히 말씀하셨음(assured)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 말씀의 이상하고 그리고 경이로운 본성(nature) 때문에 그들은 이 말씀을 믿지 않고, 당신께서 익숙하셨듯이, 다만 한 표상(a figure)과 비유(parable)로 당신께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6-4. 복자 요한 바오로 2세1989년 2월 1일자 교리 교육용 일반 알현 강론 말씀 [제목: From the Empty Tomb to the Meeting with the Risen Christ (빈 무덤에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남까지)] 중에서 발췌한 위의 제3-3항의 해석을 여러 번 읽고 묵상하도록 하십시오.

 

6-5.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부활절 주일의 복음 말씀(요한 복음서 20,1-9)에 대한

(i)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

(ii)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출판사: 가톨릭 출판사, 엮은이: 소순태)의 해설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2011년 4월 23일자 글의 제4-4항제5항에 각각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42.htm <----- 필독 권고

 

게시자 주: 그리스도교 신자이라면,

(i) 바로 위의 제6항에 구체적으로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문헌들과

 

(ii) 아래의 부록에 첨부한 "200주년 신약 성서 주해서"요한 복음서 20,1-10에 대한 주석들의 억지 주장들 사이의 차이점을 면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십시오.

 

(iii) 더 나아가, 인류 문화사에 있어 1995년경에 처음으로 등장한 시공간을 초월하는 인터넷 시대의 개시 이후,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서" 는, 예를 들어, 영어로 번역을 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미 자리잡은 나라들로 보급하고자 하더라도, 이 주해서의 요한 복음서 20,1-10에 대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해설과 주석들 때문에라도, 해당 나라의 가톨릭 지역 교회의 출판 검열을 통과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7.

질문 3: 그리스도교 신자이라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역사적 사실들" 이 있기나 한지요? 만약에 있다고 한다면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질문3에 대한 답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한 후에, 제2-1항에 발췌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43항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71.htm <----- 필독 권고

 

2014년 가해 사순 제4주일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이 글을 마치다

2014년 3월 30일

평신도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
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30시간 (자료 조사, 분석 및 우리말 번역 포함)

 

====================

 

<< 부 록 >>

 

게시자 주: 다음은 "200주년 신약성서"에서,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아무런 소제목이 없는, 요한 복음서 20,1-10에 대한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서"에 주어진 해설과 주석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 해설과 주석들은,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새 번역 성경"에서 "부활하시다" 라는 소제목이 붙은요한 복음서 20,1-10에 대한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의 전통적 해석(위의 본글의 제6항)과 정면으로 배치(背馳)되므로, 결코 신뢰하거나 혹은 동의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고드립니다: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발췌 시작)

빈 무덤 발견 ㅡ 예수 부활

 

이 대목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시몬 베드로와 "애제자"에게 그 사실을

알린 일(1-2절)과 그 두 제자가 예수의 빈 무덤을 확인 한 일(3-10)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발현사화(11-18절)에서 계속 언급된다. 이런 맥락 가운데 두 제자에 관한

내용이 삽입된 셈이다. 공관복음(마르 16,1-8//)과 일치하는 점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빈

무덤에 대한 목격 증인으로 언급된 내용이다.

 

공관복음에는 다른 여자들도 보도되는 데 비해,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2절: "우리는 ...")

가운데 혼자가 아니었음이 전제될 뿐이다. 베드로가 예수의 무덤에 갔다는 내용도 루카복음에만

보도된다(24,12). 따라서 "애제자"에 관한 내용(2-5.8-9절 참조)은 요한복음의 독자적 전승으로서

나중에 삽입되었다는 추정을 배제할 수 없다. 그 제자의 믿음(8절)과 예수의 부활에 관한 성경

말씀의 몰이해(9절)는 상충되고, 바로 이 점이 그 추정을 반증한다.

 

대조적이고 상반되는 표현, 즉 "보다"(1.5.6.8절)와 "모르다"(2절) 또는 "깨닫지 못하다"(9절)란

표현은 빈무덤사건이 신비스러운 일로 전해져 왔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 두제자가 에수 부활에

 

관한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서 그 무덤을 떠나 집으로 갔다는 내용(9-10절)으로 인해 빈무덤

사건이 곧 예수의 부활신앙의 근원은 아니었음이 명시된다.

 

* "사람들이 무덤에서 주님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분을 어디에다 두었는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서 빼돌렸다는 당시 유다인들의 소문(마태 28,13-15 참조)과는

달리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서 가져가 버렸다는 뜻이다. 이 말은 다른 대목에서도 막달라

마리아의 입을 통해 반복된다.(13.15절 참조). 물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부활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주님"이란 존칭에 대한 이해 13,13 주석 참조).

 

예수의 시신이 무덤에 없다는 사실을 두 제자에게 알림으로써 급히 무덤에 가서 확인토록 했을

따름이다. "우리"라는 표현은 무덤에 찾아간 이가 막달라 마리아가 혼자가 아님을 시사한다.

(마르 16,1-3// 참조). 일부 사본에는 "우리" 대신 "나는"으로 되어 있으나(13절 참조) 본문비판의

원칙에 따라 전자에 더 신빙성을 둔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마르 16,1// 참조)과 달리 무덤에 찾아간 동기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공관복음처럼 예수의 시신에 도유하러 간 것은 아닐 것이다. 장례 때 이미 도유했기 때문이다

(19,40). 아마도 슬픔 때문에 곡하러 갔을 것이다(11,31 참조).

 

* 둘은 같이 달렸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앞서 달려 무덤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몸을 굽혀서 염포들이 놓여 있는 것을 들여다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않았다."

: 예수와 "애제자"의 관계가 시사된 듯하고(13,23-25; 19,26-27; 21,7.20-23 참조). 베드로의 권의

있는 위치(6,69; 21,15-19 참조)와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서 역활(1코린 15,4-5 참조). 곧 위계질서

가 반영된 듯하다. 아무튼 경주로 표현되듯이 베드로와 "애제자"의 어떤 경쟁임은 분명하다. 아마도

저자는 "애제자"가 베드로에게 모든 우선권을 내주지만 베드로보다 크지도 작지도 않다고 말하고자

"애제자"를 전면에 내세운 듯하다(13,23-25; 19,26-27; 21,20-23 참조).

 

* 그러자 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 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보니, 염포들이 놓여 있었고, 또한

그분의 머리를 덮었던 수건은 염포들과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

: 이 빈무덤사화의 전개과정에서 돋보이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눈으로 본 대상들이 점점 극적으로

고조되며 묘사된다는 점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임구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고,

"애제자"는 무덤 안에 놓인 "염포들"을 보았으며, 베드로는 "염포들"과 "수건"을 보았다.

 

이런 묘사는 저자의 의도가 담긴 문학적 기교로 여겨진다. 즉, 베드로의 권위와 역활이 반영되며

(5절 주석 참조), 그들이 눈으로 본 대상들은 예수의 부활을 알리는 일종의 표징으로 여길 수 있다.

부활한 예수는 새로운 천상적 실존을 취했기 때문에 "염포들"이나 "수건"을 남겨놓고 무덤을 떠나간

것이다. "염포들" 옆에 "수건"이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는 묘사는 "애제자"가 믿음을 가지게

된 맥락(8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소생한 라자로의 얼굴이 수건으로 감겨져 있었다는 묘사(11,44)

와 비교할 때, 예수는 소생한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부활했다는 표징적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 그제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 빈무덤사화의 절정이다. "애제자"는 무덤 안에 들어가 정황을 보자 즉시 예수의 부할을 믿게 되었

다는 것이다(21,7 참조). 무덤 안의 정황은 예수 부활의 표징이요. 동시에 증언의 역활을 하게 된

셈이다.

 

* 사실 그들은 아직도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 빈 무덤 또는 예수 부활에 대한 두 제자의 불신이나 놀라움을 전체한(루카 24,11-12 참조)

설명은 현 문맥에서 "애제자"의  믿음(8절)에 상충되지만, 내용상 그 믿음을 역으로 더욱 강조하는

역활을 한다(간접적으로는 베드로의 믿음도 함축된다). 그러나 막달라와 베드로는 빈 무덤을 보고도

아직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으로 언급된 맥락에서 볼 때, 이 구절은 오히려 저자의 전승자료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애제자"에 관한 언급은 추가된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1-10절 제목주석 참조).

 

"성경"은 여기서 성경 말씀 전체를 가리키고(2,22; 10,35 참조) 인용된 말("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은 공관복음의 선포적 수난예고(마르 8,31//))와 관련된 말로서 특히 루카복

음의 빈무덤사화(24,7)와 맥락을 같이한다.

 

루카복음은 예수의 수난. 죽음. 부활이 성경에 이미 기록된 대로라고 보도한다(24,25-27.44-46 참조:

1코린 15,4). "그들은 아직도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란 말은 후대 신학적 성찰과 예수 부활을

통해 얻게 된 새오룬 성경 이해를 시사한다(2,22 주석 참조). 루카복음도 흡사한 말을 한다(루카 24,45)

 

* 그래서 제자들은 다시 자기들의 집으로 물러갔다."

: 제자들이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예수 부활이 시사된 빈무덤사건과 매우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9절과 함께 원래 전승으로 보는 한. "애제자"가 예수의 빈 무덤을 보고 믿게

되었다는 것(8절)이 오히려 어색한 감을 준다. 부활신앙은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보고 비로소

가지게 되었다. 이 구절에는 믿음에 관한 보도가 없었을 것이다. 즉, 원래 전승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남아 있었고(11절 참조), 아직 믿음에 이르지 못한 베드로만 집에 간 것으로

보도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이상, 발췌 끝)

(이상, 부록 끝)

========================================

 

위의 본글의 요약본: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부활절 주일 미사 중에 봉독되는 복음 말씀(요한 복음서 20,1-9) 전문입니다. 아래의 발췌문에서 일부 글자들을 굵게 하고 그리고 색칠을 한 것은 필자가 한 것입니다:

출처: http://bible.cbck.or.kr/bible_read.asp?p_code=&GS=S&Bible=50&Jang=20&x=21&y=14
(발췌 시작)

부활하시다(마태 28,1-8; 마르 16,1-8; 루카 24,1-12)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 발췌 끝)

          이 글은, 비록 위의 발췌문이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기적에 대한 직접적인 목격 증거는 아니나, 신약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가장 근접한 물리적 증거인 위에 발췌된 우리말 번역문 중에 번역 오류/미숙들이 있다는 생각에, 이들에 대한 보고를 드리고자 작성되었습니다.(1)

2.

2-1.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7에서 "개켜져 있었다" 로 번역된 표현은,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의 의미와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개키다"의 의미를 정밀하게 비교/검토하였을 때에 그 의미들이 결코 동일하지 않으며, 따라서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7에서 "개켜져 있었다" 로 번역된 표현은, 대신에, 예를 들어, "둥글게 말아져 있었다" 로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2)

2-2.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1에서 "아직도" 로 번역된 단어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와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9에서 "아직" 으로 번역된 단어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결코 동일하지 않으며, 따라서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9에서 "아직" 으로 번역된 단어는, "공동번역성서"의 해당 절에서 처럼, "그때까지" 로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3)

2-3. 그런데, 바로 위의 제2-2항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는, "공동번역성서" 요한 복음서 20,9에서 이미 "그때까지도" 로 올바르게 번역이 되었기에 그리고 "공동번역성서"는 여전히 유효한 성경이므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유관 부서에서,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20,9의 현재의 "아직"을 "그때까지" 로 교체하는 것은 그리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진행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4)

-----
(1) 게시자 주: 지역 언어로의 번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번역오류 때문에 때로는 성경 본문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of Hippo, 354-430년)의 지적은 다음의 글[제목: 성경 본문의 무오성(inerrancy)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입장]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79.htm

(2) 게시자 주: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출처들을 또한 제시하는, 이 지적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42.htm

(3) 게시자 주: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출처들을 또한 제시하는, 이 지적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35.htm <----- 필독 권고

(4) 다음은, 2011년 1월 16일자 가톨릭신문 기사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 지역 교회 교도권의 의향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1: https://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197433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01.htm  [2011년 1월 17일자 글]
(발췌 시작)
...

그동안 한국교회 안에서는 분도출판사의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도서출판 일과 놀이의 「해설판 공동번역 성서」 등이 나온 바 있으나, 본격적인 의미의 주석 성경으로는 평가받지 못했다.

...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이형우 아빠스도 "성경말씀은 개개인의 생각보다는 교회의 거룩한 전통과 가르침을 배경으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며 "「주석 성경」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오류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돕는 길잡이와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라고 역설했다.
...

주교회의 사무총장 이기락 신부는 "「성경」은 가능한 한 본문에 충실한 번역과 교회 공용으로 쓴다는 두가지 목표 아래 번역됐지만, 이 두 목표를 한꺼번에 이룬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실제 전례 사용 등에서는 다소 불편한 측면이 있었다"며 "이제 본문에 충실한 번역이 나왔으니, 이를 토대로 더욱 많은 성서학자들이 진지하고 독창적인 연구를 이어가길 바란다"고 역설했다.

또한 이 신부는 "언어는 사회문화적 발전과 더불어 끊임없이 진화하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그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성경 번역은 늘 새롭게 시작되고 끊임없이 지속돼야할 과제"라며 "이러한 연구 활동이 독자적인 새로운 주석 작업을 촉진하고 나아가 번역문의 개정 또는 새로운 번역으로 이어져야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상, 발췌 끝)
-----

 

 



2,299 2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