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4월22일 파브리아노의 복자 프란치스코 ♬Fratello sole e sorella l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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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7-04-22 ㅣ No.1992

 

축일:4월22일
파브리아노의 복자 프란치스코 
BlessedFrancis Venimbeni of Fabriano

Beato Francesco da Fabriano
Fabriano, 1251 - Fabriano, 22 aprile 1322


 

   프란치스코 베님베네(Franciscus Venimbene,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파브리아노에서 의사인 부친 콤파뇨 베님베니와 모친 마르가리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울기보다는 웃는 아이로 자랐고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 불과 16세 때에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지만 그의 성덕과 학덕은 남달리 뛰어났다. 수련기를 마칠 즈음 그는 포르치운콜라(Porziuncola) 전대사를 받으려고 아시시(Assisi)에 갔다가 레오 수사를 만났다.  

   프란치스코는 특히 책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도서실을 만든 첫 번째 프란치스코 회원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는 연옥 영혼들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졌고, 매우 정성스럽게 미사를 봉헌하는 분으로서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가톨릭홈에서)

 

 

포르치운쿨라의 천사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 8월 2일

Perdono di Assisi (Indulgenza della Porziuncola)

Our Lady of the Angels
Also known as : La Negrita; The Little Black One; Virgin de los Angeles 

OUR LADY OF THE ANGELS OF THE PORTIUNCULA   

 



포르치운쿨라 Porziuncula(작은 몫)
작은 형제회의 머리이고 어머니이시며 천사들의 복되신 동정마리아 성당(전대사축일:8월2일)

"성인은 이 곳을 어디보다도 사랑하였다.
그는 자기 형제들에게 이곳을 특별한 경의(敬意)를 가지고 받들도록 명하였다.
그는 그 소유권을 다른 이에게 주고,
자기는 자기와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그 사용권만을 가짐으로써
이곳이 형제회의 겸손과 극도의 가난의 표본으로 언제나 보존되기를 원하였다.”(2첼라노)


뽀르지웅쿨라(작은 몫) 성당의 내부 모습

 

포르치운쿨라(작은몫) 성당 내부의 제대 벽화

 

이 벽화는 본래의 자그마한 포르치운쿨라 성당 벽화입니다.

첼라노는 성 프란치스코의 포르치운쿨라 성당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 프란치스코는 몸집이 작고, 마음은 겸손하였으며, 수도서원에서 작은 형제였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기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작은 몫(portiuncula)을 차지하였으니,

세상에서 가진 것 없이는 그리스도께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몫으로 떨어진 땅이 예부터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로 불리었으니, 이는 하느님의 예언적인 섭리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님 다음으로 모든 성인들의 화관이 될 만한 공로를

탁월한 겸덕으로 세우신 동정 성모의 성당이 이곳에 세워졌다.

이 성당에서 작은 형제회가 태동하였다.

견고한 기초인 양 그 위에서 형제들의 수가 늘어갔고 형제회의 고귀한 건물이 솟아올랐다.

성인은 이 곳을 어디보다도 사랑하였다.

그는 자기 형제들에게 이곳을 특별한 경의(敬意)를 가지고 받들도록 명하였다.

그는 그 소유권을 다른 이에게 주고,

자기는 자기와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그 사용권만을 가짐으로써

이곳이 형제회의 겸손과 극도의 가난의 표본으로 언제나 보존되기를 원하였다.”

(2생애 18항).




세라핌적 사부 성 프란치스코는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께 특별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고

’천사들의 성 마리아’, 혹은 ’포르치운쿨라’라고 불리우는 소성당을 큰 사랑으로 돌보았다.

 

그곳에서 작은형제회와 성글라라 수도회가 축복된 기원을 두었고 성인이 삶을 마감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성 프란치스코는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서 이 성당에 포르치운쿨라 전대사를 얻었다고 하며

여러 교황들께서 다른 많은 교회에 이 전대사를 확대하였다.

세라핌 수도가족은 이러한 여러 이유에서 이 성전 축성일을 경축하며 천사들의 성 마리아를 기린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포르치운쿨라의 전대사

 

성 프란치스코는 교황 호노리오3세에게서 이 성당에 포르치운쿨라 전대사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교황들께서 다른 많은 교회에 이 전대사를 확대하였다.

 

형제인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1226년 10월3일 성 프란치스코가 형제인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말년의 성인은 심한 고행과 오상으로 인해 쇠약해져 거의 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죽음울 임박했음을 깨달은 성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아씨시 읍을 축복했고 마지막 시각엔 알몸으로 맨땅에 눕혀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형제인 죽음이여, 너를 환영한다"고 말하고서

안젤로 형제와 레오 형제더러 형제인 죽음을 노래불러 달라고 명했다

 

성 프란치스코는 마지막으로 다윗의 시편을 노래하고 자신에게 재를 뿌리라고 하고서,

그가 가장 사랑했던 장소에서 형제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www.ofmconv.or.kr)


 

 

건너감 경당의 모습

 

형제회의 환자 병실로 쓴 곳으로 왼쪽 문은 성인 당대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경당의 외벽의 벽화는 1226.10.3. 사부님께서 형제적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다.
땅에 누워 시편141(142),과 요한복음을 봉독하게 하셨다.


 

전대사 全大赦
라틴어 indulgentia plenaria
영어 plenary indulgence


죄에 대한 유한(有限)한 벌을 모두 취소할 수 있는 사면.
신을 제외하고는 어는 누구도 자기가 언제 전대사를 받을 지, 혹은 받았는 지 알 수 없다.
다만 신만이 인간의 마음가짐에 따라 전대사를 주거나, 주지 않는다.
전대사를 받기 위한 내적 조선과 외적 조건이 주어지는데,
내적 조건은 "소죄(小罪)를 포함한 모든 죄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일"이고,
외적 조건은 고해성사, 성체배령, 교황이 지시한 기도 등 3가지다.
외적 조건과 내적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전대사를 받을 수 있고,
만일 어느 하나라도 불충분하다면 한 대사(限大赦)밖에 받을 수 없다.
전대사는 하루에 한 번만 주어진다.

 

 

대사 大赦 
라틴어  indulgentia  영어  indulgence  독일어  Ablass 
  
죄를 지은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에게 교회는 고백성사를 통하여 죄는 사면되었다 할지라도 그 죄에 따른 벌, 즉 잠벌(暫罰)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잠벌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보속(補贖)을 통하여 사면될 수 있는데, 현세에서 보속을 하지 못한 경우 연옥에서 보속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 보속을 면제해 주는 것을 대사라고 한다. 대사는 교황이나 주교들이 줄 수 있는데, 대사의 근거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쌓아 놓은 공로의 보고(寶庫, treasury)에 있는 공로를 교회의 권리로 각 영혼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대사는 보통 전대사(全大赦, indulgentiae plenariae)와 한대사(限大赦, indulgentiae partiales)로 나눠진다. 전대사란 죄인이 받아야 할 벌을 전부 없애 주는 것이고, 한대사란 그 벌의 일부분을 없애 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전대사나 한대사를 연옥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을 위해 대신 받을 때 그것을 대원(代願, suffrage)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대사제도는 초대 교회 박해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교회의 보속규정에 의하면 죄인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일정기간, 예컨대 40일, 혹은 80일, 300일, 혹은 몇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자신의 죄를 보속하는 속죄기간을 거쳐야 그에 해당하는 벌을 사면받는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해기간 동안에는 이러한 규정들을 지키기 힘들었고 후에 신자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오는 데 일종의 장애요소로도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특별한 경우 주교들은 속죄기간을 단축하여 주기도 하였다. 이 속죄기간의 단축이 대사의 기원을 이룬다.
그 후 중세 초가 되면 속죄기간의 단축 대신 속죄를 사면(redemptiones)하는 관습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른 속죄 규정서가 나왔다. 이것이 이른바 대사의 원형이다. 십자군운동이 일어나면서 대사는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나 십자군을 위하여 재산을 기부하는 자에게 주어졌다. 십자군운동이 끝난 후에는 일정의 공익사업을 위해 기부하는 자에게도 대사가 주어졌다. 중세 말이 되면 소위 ‘대사설교가’라는 사람들이 나타나 대사를 남용하면서 소위 ‘면죄부’라고 알려진 증서를 발매하기에 이르렀다. 교회는 이의 규제를 등한시하여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규정을 만들어 대사의 남용을 규제하였다. 잇달아 교회법에 규정되었던 엄한 보속은 폐지되었고, 교황 바오로 6세는 대사에 대한 법을 제정하며 대사의 의미와 규정을 명확히 하였다. 이에 따라 대사를 받기 위해 신자들이 해야 할 의무들도 대폭 완화되었다. 즉 대사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신자로서 고백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하고, 성당참배를 하고, 교황의 뜻이 이뤄지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보통 대사는 성년(聖年)에 베풀어지지만 성년이 아닌 경우에라도 교황이 정하는 바에 따라 대사는 이뤄질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대사가 벌의 사면에는 효과를 갖지만 죄 자체를 사면하는 효력은 없다

(가톨릭대사전에서)


 


간추린 프란치스칸 영성
복음적 그리스도 중심적 영성, 사도적 선교적 영성, 작음과 형제애

 

작음과 형제애
  프란치스꼬회의 공식명칭은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이다. 이 명칭은 바로 프란치스칸 영성을 요약해 주고 있다. 작음(minoritas)과 형제애(fraternitas)를 바탕으로해서 복음적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이 작음의 정신은 그 안에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작은형제들은 가난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의 삶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가난한 자가 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하나가 되며 그들로부터 복음화되고 복음화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인식한다. 또한 가난한 자들처럼 일과 노동을 통해 땀흘려 일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영위하며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처럼 하느님께 신뢰하며 복음적 불안정의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일과 노동은 생계유지의 제일차적인 수단이며 나머지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하며 그분이 보내주시는 은인들의 애긍을 통해서 살아가게 된다.
  형제애의 정신은 사랑과 순종을 전제로 한다. 프란치스꼬는 수도회 개념보다는 형제회 개념을 더 중시하였다. 우리 모두는 맏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이 형제애는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이다. 이러한 형제애는 가난 안에서도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형제 상호간의 사랑과 애정어린 순종은 기쁨의 영성을 프란치스칸 영성의 특징적인 요소로 부각시켜 준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체험되는 형제애는 신분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로 확장된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크리스챤이든 이교도이든 원수이든 강도이든 성한 사람이든 병자들이든 모든 이가 한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받아들이도록 해 준다. 더 나아가 프란치스꼬가 그랬듯이 이 형제애는 자연과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더욱더 확장된다. 바로 우주적인 형제애, 만인의 형제가 되는 것이 프란치스칸 형제애의 본질이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거룩한 상흔(오상)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복자 요한 파브리아노 축일:3월11일,게시판165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Fratello sole e sorella luna-Claudio Baglioni

 

 

 

 

 

 

 





Beato Francesco da Fabriano

22 aprile
 
Fabriano, 1251 - Fabriano, 22 aprile 1322

Predicatore francescano della famiglia Venimbeni, soprattutto in Umbria e nel Piceno. Nella sua città eresse una chiesa e un convento con una notevole biblioteca.
Culto approvato nel 1775.

Martirologio Romano: A Fabriano nelle Marche, beato Francesco Venimbeni, sacerdote dell’Ordine dei Minori, insigne predicatore della parola di Dio. 


Il Beato Francesco nacque a Fabriano (Ancona) da Compagno Venimbene, medico, e Margherita di Federico. Dopo aver compiuto gli studi di filosofia, all'età di 16 anni, entrò nell'Ordine Francescano. Mentre era novizio a Fabriano, ebbe il permesso di recarsi ad Assisi per lucrarvi l'indulgenza della Porziuncola. Qui incontrò frate Leone, uno dei primi compagni di San Francesco, e ne lesse gli "scritti". Per ben due volte, nel 1316 e nel 1318-21, fu superiore del nuovo convento costruito dai confratelli a Fabriano. L'eredità paterna gli permise di costruire una biblioteca dove raccolse una copiosa quantità di manoscritti e in seguito a ciò divenne il primo fondatore delle biblioteche in seno all'Ordine Francescano.
Tutta la sua vita fu devoluta all'attenzione verso i poveri, gli emarginati e gli ammalati. Egli stesso si prendeva cura dei bisognosi a cui forniva il sostegno materiale e spirituale. Infaticabile era il suo zelo per le anime: trascorreva molte ore in confessionale o nell'annunzio della parola di Dio. Vestiva una rozza tunica, si flagellava con aspre discipline , dormiva poco per dedicare più tempo possibile alla preghiera. Argomento della sua contemplazione erano i misteri della Passione di Cristo, che lo commuovevano fino al pianto. Celebrava la santa Messa con fervore ed era devotissimo delle anime del Purgatorio. Morì, come aveva previsto il 22 aprile 1322, all'età di 61 anni. Il suo culto fu riconosciuto da Pio VI il 1 aprile 1775.


Autore: Elisabetta Nardi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200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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