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영상물 게시판

7/3함께하는여정 서울의 순교사적지순례(사진촬영 김정자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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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순 [cosmos413] 쪽지 캡슐

2005-07-07 ㅣ No.78

절두산 성지
절두산 성지는 옛 이름이 "가을두", "잠두봉", "양화진나루"였으며 경치가 수려하여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이 반드시 들려 풍류를 즐기던 명승지였다. 그러나 고종때 프랑스 함대가 이 곳까지 침입하자, 당시 섭정을 하던 대원군은 '오랑캐들이 우리나라를 더렵혔으니 이는 천주교 때문'이라 하여 이 자리에서 천주교인들을 죽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866년 병인박해 때 이의송(프란치스코) 일가족을 비롯하여 숨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참수한 후 낭떠러지로 떨어뜨려 한강물에 던짐으로써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서울대교구에서는 1966년에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성당과 기념관(박물과)을 건축하였으며, 1984년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 기념행사 때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 이곳을 방문하였기 때문에 기념비가 하나 추가되었다. 절두산 기념관은 건물 3층(325평)과 종탑(35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지항 경당에는 국내외 순교자 28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며, 절두산 성지 동쪽 정원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과 순교자석상, 영과의 돌기둥, 형구돌, 주어사에서 이전해 온 비, 남상교 송덕비, 성 남종삼의 순교사적비와 흉상 등이 있다. 

 

4. 새남터 성지

   "새남터"는 조선 초기부터 군인들의 연무장이자 중죄인들의 처형지로 이용되어 온 곳이다.

그러다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그 지도층 인물로 지목된 순교자들의 처형지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처음 순교한 이래,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세분의 프랑스 선교사가 순교하였다. 도 1846년의 병오박해 때는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현석문(가롤로)이 순교하였으며, 1806년의 병인박해 때도 8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이 곳에서 순교하신 열네 분 순교자 중에서 성직자 여덟 분과 평신도 세 분 등 모두 열한 분은 1984년 성인뿔에 올랐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순교 성지이다.

  본래의 순교 터는 용산구 이촌동의 철도 공작창 인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장소 문제 때문에 부지 매입이 어렵게 되자,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50년 현재의 새남터 성당 자리를 매입하고 1956년에는 그 자리에 순교 현양비를 건립하였다. 현재의 새남처 순교 성지 성당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1987년에 완공하였다.

1층에 있는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그 당시에 처형 장면 유리관안에 있슴

성당 안에는 전력을 아끼기 위해서 불을 켜지 않은 상태가 컴컴한 상태에서 찍은 사진


당고개 성지

이 곳 '당고개 성지'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순교성지로,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이곳에서 순교한 열 분의 남녀 교우 중에서 아홉 분이 성인품에 올라 있다.

  이곳에서의 처형은 1839년 12월 27일과 28일(양력 1840년 2월1일)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 졌다.

  당고개는 지금의 용산구청에서 삼각지를 거쳐 한강 나루로 가던 길목에 위치 해 있었으며,

본래 사형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1839년 섣달까지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처형이 마무리 되지 않고

다시 서소문 밖의 형장에서 처형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 곳 상인 들이 설 대목에 지장이 있다고 조정에 항의 하였다. 이 때문에 처형지가 서소문 밖에서 당고개로 바뀌게 된 것이다.

  1984년 한국 103위 성인 시성식 후 교회에서는 현재의 성지 일대를 매입한 뒤 중앙에 순교 현양탑을 세웠으며, 이후 순교자 열분 분 이름이 새겨진 제대, 순교 기념 청동 부조, 파티마 성모상, 십자가의 길을 안치하였다.


' 서소문 밖 순교 터'는 의주로와 아현고가가 교차되는 지점, 즉 지금의 중앙일보사 북서쪽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 서소문 공원 안의 순교 현양탑은 이곳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셈이다. 교외선 철로와 도로 문제로 본래의 순교 터에서 현양탑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 서소문 밖은 조선 초기부터 사형수들의 처형 장소로 이용되어 왔었다. 그러다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순교자들의 처형지가 되었다.

  본래 이 곳은 남대문 밖이나 아현 지역으로 이어지는 시장 거리로 평소에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에는 아주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이 곳에서 처음 순교자가 탄생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였다. 이어 1839년의 기해박해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도 이 곳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 기록에 나타나는 순교자 수는 98명이며, 성인품에 오른 순교자수는 44명이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순교 성지인 것이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03위 시성식을 계기로 이 곳 서소문 공원 안에 순교 현양탑을 세우고

축복식을 가졌다. 그러나 1997년 공원 재정비 사업으로 이 현양탑이 헐리게 되자,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 지금의 현양탑을 마련하여 1999년 5월에 새로 건립하였다

 

명동성당 약사

 서울 대교구 주교좌 성당이며, 한국 천주교희의 상징이기도 한 이 명동 대성당은, 서양의 고딕식 건물로 1977년에 국가 사적 제 258호로 지정되었다. 1882년 한미통상조약이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신양의 장유를 얻게 될 것으로 예견하고 이 곳 종현(명동의 옛이름)에 본당을 창설한다. 이 지역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수표교 인근에서 창설된 직후 그 신아 공동체가 옮겨져 온 곳이었다. 이름하여 '명례방 신앙 공동체'가 바로 그것이다. 블랑 주교는 명동 본당을 창성한 직후부터 종현 언덕 인근의 부지를 30여 차례에 걸쳐 매입하였고, 1886년 한불조양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자 부지 정리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런 다음 코스트(고( 신부에게 대성당과 주교관을 설계간독하도록 하고, 우선 주교관 건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블랑 주교는 1890년에 선종하고 그 뒤를 이어 뮈텔(민) 주교가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영되었다. 뮈텔 주교는 1892년 부터 본격적으로 대성당 건축을 시작하면서 용산의 와현에서 벽돌을 구어다 사용하였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데려와 벽체와 천장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6년 만인 1898년 5월 29일에는 마침내 대성당을 완공하여 성대하게 봉헌식을 가졌다. 대성당의 주보는 '원죄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이다. 
 


 

지하의 순교자 묘역

명동대성당은 설계 당시에 이미 지하 묘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성당 완공 이후인 1900년부터 각처에 있던 순교자들의 유해가 이 곳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순교 성인 다섯 분과 순교자 내 분 등 모두 아홉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839년의 기해 박해 때 순교하신 성 앵베르(범) 주교, 성모방(나) 신부, 성 ?X스탕(정)신부,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성 김성우(안토니오)의 유해와 1866년에 순교하신 푸르티에(신) 신부와 프티니콜라(박( 신부의 유해, 그리고 무명 순교자 2명의 유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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