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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어제 보좌신부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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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 [noel] 쪽지 캡슐

2004-09-03 ㅣ No.239

그분의 성함은 봉경종 세자요한 신부님이십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께서 아래의 글을 쓰셨습니다

그대로 옮겨봅니다.

 

우리 셋은 1972년에 소신학교인 성신고등학교에서 함께 입학한 이래로 친구로 지냈다. 그 중에서 봉 신부는 군종을 지원했기에 동창들 보다는 2년 반 정도 빨리 1981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동창들 보다 훨씬 빨리 1999년 9월 1일 세상을 떠났다.

봉 신부는 보좌신부, 군종 신부, 본당 주임 신부를 거친 다음에 성모 병원에서 10년 가까이 열심히 일 해 왔다. 신부가 본당을 떠나서 자신이 배운 것과는 상관 없는 병원 운영에 간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 친구는 의욕을 갖고 활발하게 일을 했다. 그런데 강남 성모 병원 관리 실장으로 일하던 중 1998년 8월 말 급성 백혈병에 걸렸다. 백혈병에 걸리면 치유가 어렵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백혈병에 관해서는 여의도 성모 병원이 국내 최고라고 해서, 애써 희망을 가졌다. 봉신부는 자신과 맞는 타인 골수를 찾지 못해서 자가 골수를 이식 받았다. 처음엔 건강이 회복되는 듯 보였다. 1998년 10월 한 마음 수련장에서 교구 피정 중에 그곳에서 요양하고 있는 그를 만나 여러 차례 1시간 가량 수련장 주위를 같이 산보하기도 했다.

그런데 봉신부는 병에 거린 다음 해인 1999년 6월 중순에 자가 골수 이식이 실패했다는 판명을 받았다. 동창들 몇이서 2차 수술을 준비하기 위해 입원해 있던 그를 찾았을 때, 그가 낙담하고 실망하며 괴로워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려 예수님마저도 자신에게 무의미 하게 느껴진다는 그의 솔직한 고백을 듣으면서 안타깝기도 하고, 어떤 위로의 말을 찾을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 무력하게도 느껴졌다.
그래도 봉신부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의 6월 22일자 병상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말고 할 여유가 없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아니,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한번밖에 남지 않은 기회다. 아니 한 번 더 주어진 기회다. 한번도 못해 보는 사람들보다 얼마나 큰 기회인가, 축복인가!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하느님께 맡기고 시작하자,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하지만 의료진의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세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급기야 8월 중순에 그는 병원에서의 치료를 중단하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병원에서 본 그의 모습은 너무도 초췌했다. 평소에도 간이 좋지 않았는데, 백혈병으로 인해 걸린 폐렴을 치료하다가 간이 다 망가졌다. 그래서 눈에는 황달이 오고 복수가 차서 배가 불룩했다. 방사선 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은 다 빠져서 민둥머리가 됐고. 생명이 급속히 빠져나가는 몸이었다. 도저히 회생할 가능성이 없게 보였다. "마음 독하게 먹고 견뎌봐"라는 어정쩡한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와야 했다.

자신의 숙소인 강남 성모병원 사제관으로 돌아간 봉신부에게 동생 신부는 하기 어려운 말을 해야 했다. 이젠 가망이 없으니 다시 입원하지 말고 죽음 준비를 하라는 말을 해야만 했다. 그 말을 듣고 봉신부는 가망이 없는 데 더 이상 의료진에게 수고를 끼칠 것은 없다고 말 했단다. 봉신부는 그날 일기(8월19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어 놓았다. 이젠 봉헌이다. 새로운 삶으로 가기 위한 봉헌을 잘 준비하자. 주님, 저를 온전히 받아주십시오, 앞으로 호스피스 케어를 받는데 함께 도와주십시오. 당신을 향한 마음, 최후까지 흩어지지 않게 하여주십시오. 아멘’. 이것이 4월부터 계속 써왔던 그의 병상 일기의 마지막이기도 했다.

이것으로 4월부터 계속 써웠던 그의 병상 일기는 끝이 난다. 그는 일기의 마지막을 ’아멘’으로 맺고 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운명이 비록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그래도 순종하며 받아들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말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창 왕성하게 일할 나이에(44세) 갑자기 찾아든 죽음의 손길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쉬운 사람이 있을까? ’왜 이 나이에 제가 죽어야 합니까?’ ’당신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살려주십시요’, ’아직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는데...’(그의 큰형은 그가 죽기 전인 7,8년 전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둘째인 그가 죽으면 부모님은 아들 둘을 잃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 아마도 그는 하느님께 이런 원망과 탄원을 수 없이 드렸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병상 일기(6월 1일)에 보면 "주님, 부모님 보다는 오래 살게 해주세요"라는 구절이 나온다.
형민을 앞세우고 맏아들 노릇을 하던 그가 연로하신 부모님께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안겨드리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괴로웠을 것이다.

봉신부는 임종 전 2주가량 죽음을 준비하는 호스피스 케어를 받았다. 마침내 9월 1일 아침 일찍부터 임종의 기미가 엿보였다. 동생 신부는 이미 말은 할 수 없고 겨우 듣기만 하는 형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형, 하느님이 부르시면 ’예’하고 기쁘게 가". 오후 1시 20분경부터 가빠졌던 호흡이 차차 잦아들면서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그리고 봉신부는 마지막 숨을 길게 내 쉬면서 "예"하는 응답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 임종을 지켜본 동생 신부의 이 얘기를 들으면서, 나의 친구 봉신부가 아주 사제답게 세상을 떠났구나, 정말 아름답게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다는 생각을 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동생 신부의 권고를 듣고서 그가 자신의 죽음과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결심한 것을 마지막 숨을 내쉬기까지 지켰던것이다. 그런 그가 무척 자랑스럽고 고맙기까지 하다.

하느님께서 병마와 투쟁하던 봉신부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고 나는 믿는다. 그분은 힘겨워하는 그를 옆에서 보이지 않게 지켜주시고 잡아주셨다. 마지막 순간에는 하느님께서 당신 손을 봉신부에게 내미셨고, 봉 신부는 그 손을 잡고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건너 더 이상 백혈병도, 무균실도, 방사선 치료도, 고통도, 슬픔도, 눈물도 없는 곳으로 갔다. 하느님 친히 그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고 그의 아픈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고쳐주셨을 것이다.

나의 친구 경종이는 달릴 길을 다 달려 목적지에 이르러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인간적인 마음에서는 그가 떠난 것이 참으로 아쉽다. 그의 빈자리가 여전히 허전하고, 그의 활달한 모습이 그립다. 하지만 믿음의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희망을 갖는다. 언젠가는 내 친구 경종이를 그가 있는 곳에서 만갑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그는 갔지만, 그가 나에게 남긴 아름다운 임종은 오래 동안 내 기억에서 향기롭게 남아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싶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에 열심히 살아야겠지만.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대로 죽는다는데...

자비하신 하느님, 제 친구 경종이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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