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일반 게시판

젖은 수건 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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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연 [enos1956] 쪽지 캡슐

2002-10-10 ㅣ No.537

 

     

      어릴적에 가끔 시골 할머니댁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한 여름 땡볕아래 텃밭에서

    김매기를 하시던 할머니께서 한참을 일하시다 밭에서 나오셔서 목에 감았던 누렇게

    바랜 젖은 수건을 풀어 짜면 땀이 몇 방울 마른 풀위로 떨어집니다. 그리고는 미지

    근한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시면서, 저에게는 더운데 원두막으로 올라가 있으

    라고 하셨습니다.

 

      산골짜기 시골에서 힘겹게 일하시면서 외아들의 학업 뒷바라지에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을 할머니는, 그 외아들의 막내 아들이 태어나고 커 갈 무렵까지도

    여전히 일을 하시며 사셨습니다. 정말 젖은 수건을 짜면서 사셨습니다.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콜콜한 옷가지나 떨어진 양말을 꿰매시면서 가끔씩 안경을

    위로 치켜 올리시던 할머니, 멋있는(?) 며느리가 핀잔 섞인 말투로 이제 그만 버리

    고 새로 사 입으시라고 해도 묵묵히 하시던 일만 계속 하시던 할머니, 그 할머니는

    평생을 젖은 수건을 짜면서 사시다 돌아가셨습니다.

 

      메마른 세상에서, 메마른 사람들 속에서, 신을 갈망하는 순수한 영혼들에게 우리

    곁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이 전교라면, 과연, 저 자신이 그럴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보니,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이웃을 위하여 땀을 흘리고 땀에

    젖은 수건을 짠적이 없습니다.

 

      마른 수건 짜기는 젖은 수건 짜기보다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하물며, 젖은 수

    건 짜기도 해 보지 못한 제가 마른 수건을 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우선은

    젖은 수건 짜기부터 시도해 보고자 합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학생때, 할머니댁에 있다가 집으로 갈

    무렵 할머니께서 빨아 놓은 제 옷이 덜 말랐을때, 할머니는 마른 수건을 젖은 옷위

    에 올려 놓고 연신 발로 꾹꾹 밟아서 젖은 옷의 물기를 마른 수건으로 찍어 내시고

    는 숯불 다리미로 곧게 펴서 다려주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이웃의 세파에 젖은 마음을 저의 마른 마음으로 받아 내는 것, 또한

    의미있는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가오는 예비자 환영 미사를 앞두고 이웃을 위

    하여 마른 수건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 마른 수건 짜기를 하는 것 일까

    요? (말이 되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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