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2008년~2009년)

'암호'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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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열 [pri701] 쪽지 캡슐

2009-06-23 ㅣ No.901

쩌렁쩌렁하던 그 목소리는 거의 은밀한 속삭임에 가깝게 부드러워졌다.
 
"그냥 거기 문앞에 머물러서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해라."
 
이것이 이렌에게 하신 하느님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그녀는 모든 항의와 호소했지만 그분으로부터 더 이상 아무 말씀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후에는 항의하기를 단념하고 기다렸다.
그녀는 문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그곳에는 그녀와 같은 경우의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마련된 넓은 벤치들이 있었다.)
그녀 뒤를 이어 올 다음 사람을 기다렸다.
그녀는 사흘을 기다렸다.
이 사흘 동안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선택된 사람들이 줄을 지어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이렌이 그들을 보지 못했던 것 뿐이었다.
그녀의 눈이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볼 수 없도록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만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아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완전히 홀로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그녀에게 반성할 시간과 기회를 주었다.
 
사흘이 지났을 때 그녀는 한 노파가 책장 모서리가 접힌 교리문답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오는 것을 보았다.
이 훌륭한 영혼은 일생을 수천명의 어린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보낸 것이 분명했다.
노파는 문앞에 다다르자 무릎을 꿇고 침묵 속에 기다렸다.
조금 있다가 문은 저절로 열렸고 노파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렌은 마음 속으로 환성을 올리며 생각했다.
 
'자, 이제 나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녀는 노파가 하는 대로 하면서 기다렸다. 하느님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나왔다.
 
"거기 누가 있느냐?"
 
그녀는 노파가 하는 대로 하면서 기다렸다. 하느님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나왔다.
 
" 거기 누가 있느냐?"
 
이렌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진정한 사도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후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기만 하셨다.
 
"넌 아직 그 암호를 배워야 한단다,  얘야.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 언젠가는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난 다음에야 그녀는 또 다른 한 영혼이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에 온 사람은 수사였다.
그는 몸이 여위었고, 일생 동안 고행의 삶을 영위해 온 것이 분명했다.
수사는 문 앞에 이르자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다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수사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렌은 이 모든 광경을 전처럼 눈여겨 보았다.
이번에도 똑같이 문 앞에 무릎을 꿇고 기다렸다. 평소처럼 하느님의 목소리가 물었다.
 
"거기 누가 있느냐?"
 
"참회하고 있는 죄인이에요."
 
그녀는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참회하고 있는 죄인이에요."
 
그녀는 혹시 하느님이 자신의 대답을 잘 듣지 못하시지나 않았나 싶어 더 큰 목소리로 되풀이해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렇게만 말씀하실 뿐이었다.
 
"그건 암호가 아니다, 이렌. 때가 오면 다시 시도해 보아라."
 
꼬박 3년이 흘렀다.
이 기간 동안 이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자연히, 자신에 대해 반성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주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곤 했다.
처음에는 이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는 자선 바자와 빙고(수를 기입한 카드의 빈 칸을 메우는 복권식 게임)를 기획해
여러차례 대 성황을 이루었던 것을 기억했고,
사람들이 거리에서 자신에게 공손히 인사하곤 했던 것과
(어쨌든 성당 운영에서 자신이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가!),
어떻게든 본당 신부를 을러대서 모든 일을 그녀의 방식 대로 하게 하곤 했던 순간들을 기억했다.
 
'아, 그때는 그랬었지.'
 
그녀는 향수에 젖어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아름답게만 느껴지던 이러한 모든 음악에서 귀에 거슬리는 불협화음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자신은 다소오만했고,
(아, 단지 다소일 뿐이란 것을 명심하시기를!)
다소 권위에 집착했고, 다른 사람들이 명성을 얻는 것은 다소 무시해 왔던 것이 아니었나?
글쎄, 어쩌면 그것이 조금은 사실이었을지도 모르지.
결국 누구라도 완벽할 수는 없는 거니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같은 자기 비판은 곧 무시해 버리고
성당 일에서 자신이 이룩했던 많은 업적에 대한 기억들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억들조차도 퇴색되고 그것에 대한 흥미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천국 문 앞에서 좌절되고 마는 결과로 끝난다면,
거룩한 로사리오 본당을 실제적으로는 단독으로 휘둘러 온 그 의미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생각이 더 현실적인 관점으로 그녀를 일깨워 주는 일종의 자명종 역할을 하곤 했다.
그녀가 본당을 이끌어 왔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그러한 모든 것이 지금은 얼마나 하찮게 보이는지!
 
그녀는 명성을 얻기 위해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해 왔고,
그동안 내내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한 일들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방식 대로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 온 자신을,
또 교구의 존경받는 자리를 탐내 파렴치한 로비활동을 벌인 것을,
그리고 루카스 부인에 반대해 교활한 계략을 짰던 일 등을 마음의 눈으로 올바로 보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부추긴 음흉한 몇 가지 동기들, 
예를 들면 인정받고 싶은 강렬한 욕망과, 
장래가 보장되는 탄탄한 지위에 대한 열망과 같은 동기들을 조금씩 찾아 내게 되었다.
아, 그녀가열광적으로 했던 그 모든 활동들의 참모습이 이제 사실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녀는 하느님은 눈꼽만큼 조금만 사랑하고
자신은 끔찍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활동을 했던 것이다.
 
이렌이 이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할말을 잃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렇게 여러 해 동안 그처럼 완전히 망상 속에 빠져 있을 수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 다음에 부끄러움은 슬픔이 되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을 이용해왔던 것은 아니었는가?
이러한 반성의 과정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현실을 그녀에게 열어 주었다.
여기 바로 천국 문 앞에서도 여전히 그녀는 자만심을 고집하고 있으며,
그런데도 내내 하느님은 인내롭게 그녀의 마음에 대고 사랑에 대해 말씀해 오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 그녀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란!
그 사랑의 실재를 그녀는 지금에야 비로소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일생 동안 하느님이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셨는데도
그녀의 마음은 천 갈래도 넘는 길로  제멋대로 이리저리 나아가곤 했던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황량한 사막의 광경으로 아주 분명하게 그녀에게 되살아났다.
그렇지만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모래사막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의 사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랑은 그녀의 생애에서 활짝 피어났어야 했을 것이지만,
그녀는 루카스 부인과 경쟁하며 교구 명부에 여러 개의 어마어마한 직함을 올려 놓느라
너무나  동분서주 했으므로 한번도 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여러 달이 지나고 여러 해가 흐르자 이렌은 처음으로 하느님에 대한,
사심없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렴풋이 어린아이였을 때 느꼈던 것과 어느정도 비슷한 감정들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그때의 감정들은 눈에 띄고 칭찬받고 싶은 터무니 없는 욕구에 바로 묻혀 버리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달랐다.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다할 줄 모르는 사랑을 계속 깊이 숙고해 감에 따라
그녀는 헛되이 보낸 삶을 슬퍼하게 되었다.
헛되이 보낸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하느님을 무시하기까지 하는 식으로
반응한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도 슬퍼했다.
이 생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더 강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얼마나 절실히 뉘우치고 있는지를,
또 지금 그녀의 유일한 열망은 그분의 지칠 줄 모르시는 사랑에,
지극히 작고 미숙하기 짝이 없긴 하지만 어느정도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밖에 없음을
하느님께 말씀드리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게 되었는지!.....
 
이러한 열망을 하느님에 대한 깊은 갈망으로 불타오르면서
그녀 내부에서 점점 더 커져 갔다.
어느 날, 그녀는 왠지 모르지만 직감적으로 천국 문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거기 누가 있느냐?"
 
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대답할 말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녀의 가슴은 오직 무어라 분명히 말할 수 없는 극도의 그리움으로 가득 차오르기만 할 뿐이었다.
어떤 조건,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느님과 함께 있고 싶은 자신의 열망을
그 어떤 말로도 표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느님의 물음에 단지 깊은 한숨으로만 응답했다.
오직 한숨뿐, 그러나 그것은 그녀 마음 속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오는 한숨이었다.
 그러자 그 순간 문이 열렸다.
하느님은 말씀 하셨다.
 
"아,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 낸단다.
사랑의 한숨이 바로 나를 발견했다는 암호란다."
 
 
 
Nil Guillemette, S. J    '산들바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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