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골 자유 게시판

짝사랑이야기[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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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성 [greenbee] 쪽지 캡슐

2000-06-10 ㅣ No.871

부제. 18년간의 짝사랑이야기.

 

 

두번째로 같은 반이 되었지만 철민은 여전히 현주에게 서먹했다. 지윤과 현주

는 더 친해져서 단짝이 되어 서로 같이 하는 시간이 많았다. 철민은 지윤과 같

이 있던 현주와 이야기 할 기회가 많았지만 스스로가 포기해 버리곤 했다.

 

"선생님이 오늘 삼교시 때 이학년 삼반 애들 조소실에서 찰흙 만들기 한다고 우

리더러 찰흙 퍼 내는 거 도와 주라고 했어."

"너랑 나랑?"

"응 부반장들 가서 도와 주래. 우리 자매반이 이학년 삼반이잖아."

오전 조례를 끝내고 담임을 따라갔다 온 지윤이가 철민에게 말을 꺼내었다.

"삼교시 수업은?"

"조금 늦어도 된대."

"그러지 뭐."

 

이 교시를 마치고 철민은 혼자 조소실로 갔다. 쉬는 시간에 갑자기 사라진 지윤

을 만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소실에서 자신보다 많이 작은 이학년들 꼬마 앞에서 조금 우쭐할 수 있었던

철민은 잠시 후 바로 당황을 하며 말을 더듬었다. 지윤이가 올 줄 알았는데 조소

실에 현주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 지윤이는?"

"지윤이는 컴퓨터 들어 왔다고 거기 갔어. 지윤이가 컴퓨터에 대해서 아는게 많

나봐."

"응, 그렇구나. 지윤이 집에는 컴퓨터가 있어."

"학교에 컴퓨터도 설치되고 신기하다 그치?"

"엉."

철민이는 찰흙을 저장해 놓은 창고 문을 열면서 자신에게 친구처럼 말을 꺼내

는 현주를 보며 새삼 신기한 느낌을 받았다. 컴퓨터가 학교에 설치된다는 것 때

문이 아니었다. 자신을 낯설지 않게 대하는 현주의 태도때문이었다.

"뭐해. 니가 들어가서 찰흙을 퍼 내야지. 나는 아이들에게 갖다 줄게."

"어, 그래."

철민은 찰흙을 퍼내면서 기분 좋은 미소가 스미고 있었다. 현주와의 거리감이

좁혀진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철민이 퍼내는 찰흙을 현주가 밝은 표정으로 받

아 갔다.

"선생님이 이제 됐대. 교실로 돌아가자."

"알았어."

철민은 다소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의 마음 속 소녀와 조소실에서 육

학년 일반까지 비록 짧은 거리였지만 단 둘이 나란히 걷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말이다. 봄 날의 햇살이 교실 앞 향나무에 걸터 앉아 따스한 내음새를 흩날리고

있는 사월의 늦은 날이었다.

"철민아."

철민은 성을 붙이지 않고 자기를 친근하게 불러 주는 현주가 고마웠다.

"왜."

"너, 이번 체육대회때도 야구 할거지?"

"엉? 응."

"이번에도 우승했으면 좋겠다. 너 공 잘던지잖아."

"그래. 있는 힘껏 던지지 뭐."

철민의 말투가 많이 안정되었다. 철민은 현주와 같은 반이 된지 일년 일개월 만

에 그애와 가장 길게 나눈 대화를 가졌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철민은 간혹 현주에게 말을 붙였다. 짧은 대화였지만 철민으

로서는 상당히 발전한 것이었다.

철민은 전교회의 때 손을 들어 안건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회자 옆, 칠판 앞에

서있는 현주 때문에 그 동안 철민은 한 번도 손을 들어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지

못했었다.

"네. 철민님께서 안건을 발표했습니다. 제청합니까? 그럼 안건으로 채택하겠습

니다."

철민이 말한 안건을 회장이 받자 현주가 칠판에 적었다.

"철민님께서 말한 안건 ******을 적었습니다."

현주가 칠판에 안건을 적고는 회장에게 회의 진행을 계속해도 된다는 의사를 보

냈다. 그 모습을 보며 철민은 대단히 흐뭇해 했다.

 

철민은 속으로 현주와 많이 친해 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다시 철민

이가 현주를 어색하게 대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작년 오학년 담임에게 동엽과 마찬가지로 많은 차별을 받았던 자신의 친

구 준용이 때문이었다.

어린이날도 어버이날도 지났다. 스승의 날이었다. 담임이 촌지는 받지 않는다

고 잘라 말해서 많은 학생들이 카네이션 꽃을 사가지고 왔었다. 조례가 시작하

기 전 아침이었다.

오학년때부터 철민과 친했던 준용은 지윤과도 많이 친했었다. 준용이 지윤과 장

난 치듯 놀다가 실수로 지윤이 가져 온 카네이션 꽃을 부르터리고 말았다.

"야이, 조심해야지 임마."

철민이 그 모습을 보고 준용이에게 핀잔을 주었다.

"미안해 지윤아."

지윤은 왠만하면 괜찮다고 말하는 아이였으나 그 날은 달랐다. 담임 선생님은 여

자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지윤은 선생님께 꼭 자신의 카네이션을 달아 주

고 싶어 했었다. 그런데 자신의 카네이션은 부러져 버렸다. 다시 사러 나갈 수

있는 시간도 아니었다.

"어떡해. 나 몰라."

지윤이 울상을 짓고는 준용을 흘겨 보았다.

"내 것이라도 줄까?"

준용은 자기가 가져온 카네이션을 들어 보이며 지윤을 달래려 했다. 준용이 가

지고 온 것은 생화가 아닌 모조품이었다. 그것도 구내 매정에서 파는 값싼 것이

었다. 꽃집에서 예쁘게 포장한 생화로 된 지윤의 카네이션과는 아주 비교가 되

는 것이었다.

"이런 싸구려를 어떻게 선생님께 드려. 물어 내."

어쩔 줄 몰라하던 준용의 표정이 아주 기분 나쁜 표정으로 순식간에 변해 버렸

다. 준용이는 ’욱’하는 성질이 있었다. 어릴 적 가지던 가벼운 열등감이

나 자존심으로 아이들은 싸움을 곧잘 한다. 준용이는 부러진 지윤의 카네이션을 들더니

지윤이에게 홱 던졌다.

"나중에 사주께 씨발. 그래 내가 들고 온 것은 싸구려다."

준용은 모멸감을 느꼈었나 보다. 상스런 욕까지 내뱉으며 지윤에게 꽃을 던졌

다.

"아야!"

꽃이 지윤의 얼굴에 가 맞았다. 지윤은 붉어진 눈으로 준용을 흘겨 보다 이내

책상 바닥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야 임마, 왜 그래."

철민은 난처한 표정으로 불그락 거리는 준용을 잡았다. 철민은 누구 편을 들까

망설여 졌다. 지윤과 준용, 둘 다 그에게는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때 현주

가 걸상을 빼더니 일어서 지윤의 얼굴에 맞고 떨어진 꽃을 집었다. 그리

고 준용의 얼굴에다 되던졌다.

"야, 배준용. 니가 잘못했잖아. 무슨 이런 애가 다 있어?"

현주는 바로 지윤을 달래기 시작했다. 준용의 얼굴이 더 불그락 거렸다. 그런

현주의 모습을 보고 감복해 하며 철민은 준용을 잡았던 손에 힘을 뺐다. 바로 준

용이 일어 섰다. 준용은 지윤의 뒷 책상을 빼더니 지윤을 달래고 있던 현주를 바

로 걷어 차 버렸다. 현주가 뒤로 넘어 졌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한 곳으

로 모였다. 현주는 지윤처럼 소리를 내지 않고 바로 일어서 준용의 앞으로 다가

갔다.

"야이, 이년아 내가 니 꽃을 부러뜨렸냐? 니가 왜 지랄이야."

준용은 자기 앞에 선 현주를 올려 보며 큰소리를 내 뱉었다. 다시 걷어 찰 기세

였다. 철민이 바로 달려와 준용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현주가 그 모습을 보고

선 말을 꺼내었다.

"너 참 나쁜 애구나. 말도 상스럽게 하고, 철민아 너 이런 애 하고 놀지 마."

현주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철민은 준용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현주

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 현주의 말에 더 화가난 준용이가 손으로 현주의 뺨을 사

정없이 내려 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현주도 그때는 지윤처럼 바로

주저 앉아 소리를 내며 울어 버렸다.

철민은 그저 어안이 벙벙 할 뿐이다. 철민이에게 허리를 잡힌 준용은 그래도 화

가 풀리지 않았는지 숨을 쌕쌕 거렸다.

"뭐 이런게 다있어. 지가 얼마나 잘났는데 철민이더러 놀지 말라는 말을 해."

흐느끼던 지윤이가 고개를 들어 울음을 멈추고 이젠 반대로 현주를 달래기 시작

했다. 아까 현주가 준용에게 뺨을 맞을 때 큰 소리가 났었다. 지윤은 무서웠는

지 준용을 바로 쳐다 보지 못하고 아무런 말도 못 꺼내었다. 자신의 마음 속 높

디 높은 소녀가 자신의 친구에게 걷어 차이고 심지어 뺨까지 맞았다. 철민은 준

용의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었다.

"준용아, 잠깐 따라 나와 봐."

"왜."

"따라 나와 봐."

철민이는 조용한 어투로 준용을 골마루로 끌어 내었다. 준용이가 현철이

를 지날 때 현철이가 준용이의 팔을 잡으며 "너 새끼야."라는 말을 뱉었으나 철

민이가 험한 표정으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준용은 철민을 따

라 교실 밖으로 나갔다. 교실의 뒷 문이 열릴 때 까지 현주는 지윤의 책상 앞 바

닥에 앉아 울었다. 현철이가 지윤을 거들어 달랬으나 현주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

다.

 

"곧 선생님 오실텐데 왜 나오라 그랬어?"

골마루로 나간 준용이가 철민에게 물었다. 철민은 고개를 돌리자 마자 준용을

패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날아 온 주먹을 맞고 준용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

다. 계속 되는 철민의 주먹질을 맥없이, 왜 맞는지 이유도 모른 채 계속 맞았

다.

"퍽, 퍽, 퍼퍽."

그렇게 철민에게 두들겨 맞는 준용이를 교무실에서 나오던 선생님들이 보았다.

육학년 일반의 담임은 매우 난처한 표정으로 그 둘에게 달려갔다.

"야, 김철민 그만 해."

둘의 싸움을 말리고 담임 선생은 그 둘이가 싸우는 모습을 본 다른 선생님께 사

과의 인사를 어렵게 하고는 둘을 데리고 교실로 들어갔다. 준용의 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 내리고 있다. 교실 안에서는 현주가 계속 바닥에 앉아 울고 있을 것이

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자리에 가 앉아 있었다.

거의 매를 들지 않는 담임이었지만, 그날은 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날은 특별

한 날이었다. 바로 스승의 날. 담임은 그날 아침에 다른 동료 선생들과 함께 자

신의 반아이가 또 다른 자신의 반 아이를 두들겨 패는 모습을 보았다. 교실로 들어

서자 마자 출석부로 사정없이 철민이와 준용이의 머리를 후리쳤다. 그리고 다시

철민이의 머리를 두 번 더 후리쳤다.

"김철민. 넌 부반장이나 되어서 준용이를 그렇게 때려? 엉? 왜 때렸어. 무슨 이

유야? 오늘이 무슨 날인줄이나 알아?"

철민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고개만 숙인 채 담임의 말을 받아 먹고 있었

다. 철민이가 말이 없자. 담임은 다시 준용이에게 물었다. 화난 선생님의 모습

에 반 아이들은 조용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뭐!"

그때 철민을 좋아하던 지윤이가 말을 꺼내려 일어섰다. 선생님,하고 외치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 왔을 때 현주가 지윤을 말렸다. 그냥 모른채 하자는 뜻이

었는지, 일을 더 크게 벌이지 말자는 뜻이었는지. 지윤은 알지 못했지만 말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선 입을 닫아 버렸다.

"철민이, 준용이와 왜 싸웠어?"

"....."

철민이 말이 없자 준용이가 대신 답을 했다.

"그냥 말다툼 하다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철민이가 준용의 말을 듣자 고개를 숙인 채 미안하다는 뜻으로 준용의 허리를

툭 쳤다.

담임이 한참을 말없이 고개 숙인 채 교탁 옆에 서 있는 준용과 철민을 쳐다 보

았다.

"너네들 만할 때 싸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야. 싸운 것을 크게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오늘은 참았어야지. 또 하필이면 다른 선생님들도 다 볼 수 있는 골마루

였냐? 그것도 조례시간 다 되어서..."

"죄송합니다."

철민과 준용이 동시에 대답을 했다. 선생님이 피식 웃으며 다시 말을 뱉었다.

"둘은 앞으로 일주일 간 화장실 청소다.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 둘은 보니

까 친하던데 왜 싸웠어. 악수하고 자리로 들어가."

선생이 악수를 시키고 둘을 자리로 돌려 보냈다. 지윤과 현주가 동시에 철민을

건너 준용이에게 눈을 흘겼다. 그리고 지윤은 안스런 미소로 철민을 달랬다. 지

윤은 자기 때문에 철민이가 준용과 싸웠다고 생각을 하고선 철민이가 더욱 좋아

보였다. 아름다운 오해가 잘못 된 이해 보다 나을 때가 있다.

 

하여튼 철민은 자신의 친구때문에 현주에게 잠시 가까워 졌다는 느낌을 버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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