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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2 ㅣ No.6626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저에게 아주 어렵게 썼습니다. 한편은 사랑의 편지 이지만은 한편은 헤어지는 섭섭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떠나는 것에 대해 설명을 충분히 한다고 해도 헤어지는 아픔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겁니다. 각 사람에게 직접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려야 되겠지만 이 편지로 대신합니다.
마가렛은 1959년 12월에 한국에 도착했고 마리안나는 1962년 2월에 와서 거의 반세기를 살았습니다.
고향을 떠나 이곳에서 간호로 제일 오랫동안 일하고 살았습니다.(천막을 쳤습니다) 이제는 저희들이 천막을 접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현재 우리는 70이 넘은 나이입니다. 소록도 국립병원 공무원들은(직원) 58세~60세 나이에 퇴직합니다. 퇴직할 때는 소록도에서 떠나야 되는 것이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일할 수 있는 건강이 허락이 될지 몰라 이곳을 비워주고 다른 곳에 가서 사는 것은 저희들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우리 나이가 은퇴를 지나서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사회복지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우리는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없어도 환자들에게 잘 도와 주는 간호사들이 계셔서 마음 놓고 갑니다. 옛날에는 약과 치료품들이 많이 필요 했을 때 고향에서 도움을 받아 도와 드릴 수 있었습니다. 현재 소록도는 여러 면에서 발전되어 환자들은 많은 혜택을 받고 있어서 우리들은 아주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이 큽니다. 한국에서 같이 일하는 외국 친구들에게 가끔 저희가 충고 해 주는 말이 있는데 그곳에서 제대로 일할 수가 없고 자신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줄때는 본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자주 말해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말을 실천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보는 당신에게 많은 사랑과 신뢰를 받아서 하늘 만큼 감사합니다. 우리는 부족한 외국인으로써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이곳에서 같이 지내면서 저희에 부족으로 마음 아프게 해드렸던 일을 이 편지로 미안함과 용서를 빕니다.
여러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큽니다. 그 큰 마음에 우리가 보답을 할 수 없어 하느님께서 우리 대신 감사해 주실 겁니다.
항상 기도안에서 만납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리안나 올림
마가렛 올림
소록도 2005년 11월 22일
Heimatadresse
Margreth Pissarek
Brandjochstrasse Nr.9
A-6020 Innsbruck
Austria Europe
Marianne Stoger
Zieglstadl 34
A-6143 Matrei / Brenner
Austria Europe
     
마리안느와 마가렛 할머니,
소록도에 43년간의 사랑을 베풀고 귀국
1962년 28세의 꽃다운 젊은 나이에 이국만리 이곳 소록도를 찾아와 한센병환우들과 인연을 맺은지 43년
파란 눈을 가진 젊은 간호사가 이제 할머니가 되시어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되돌아 가신 마리안느 스퇴거, 마가렛 피사렛.
고향과 부모형제를 등지고 한센병이란 병마와 싸우고 사회의 무지한 편견을 피해 이곳 소록도에서 외롭게 살고계신 소록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며 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다 11월 21일 이른 아침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소록도를 떠나셨다.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할 때인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한국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시기라서 소록도에 있는 한센병 환자들 또한 생활상이 상당히 궁핍한 상태라 모국인 오스트리아 카톨릭 부인회을 통해 의약품과 위생용품, 의류에서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생활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면 모두 다 지원받아 환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고 지원금을 지원받아 건물을 짓고 시설을 보수하여  깨끗한 시설에서 지낼 수 있도록 주거문화의 현대화를 꿈 꾸셨던 소록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좋아하셨던 우리들의 스승이셨다.
특히 한센병으로 인한 장애를 최소화하기위해 장애를 갖게 되신 분들에게 장애교정수술 받도록 주선하셨으며, 60~70년대 물리치료를 도입하여 환자들에 재활의 기쁨과 사랑을 듬뿍 안겨주신 진솔한 사랑의 전도사로서,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마음을 전하신 우리들의 어머니로서, 자애로우신 할머니의 표상으로서의 두 분이셨다.
이 두 분의 할머니에게 아무런 보답도 아무런 마음도 전하지 못하는 아쉬움에 우리 모두는 어안이 벙벙하여 몸 둘바를 몰랐으며 이 소식을 뒤늦게 접한 소록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눈물과 이 두 분을 위해 밤샘 기도하신 한센인들의 마음을 전하고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에서 한평생을 바치신 높으신 두 어르신에게 마음속 깊이 새기기 위해 이글을 올린다.
두분의 할머니 약력
성명 : 마리안느 스퇴거 Marianne Stoeger(1934년생)
국적 : 오스트리아
봉사기간 : 43년 9월
포상내역
 1972.07.24 국민포장 10044호(대통령 박정희)
 1971.05.17 감 사 패 (보사부장관 김태동)
 1974.11.27 감 사 패 (보사부장관 고재필)
 1979.05.11 감 사 패 (대한간호협회 김모임)
 1983.04.07 표창장 제57304호 (대통령 전두환)
 1996.05.17 국민훈장모란장 제1513호 (대통령 김영삼)
 1999.04.13 호암상 사회봉사상(호암재단)
성명 : 마가렛 피사렛 Margreth Pissarek(1935년생)
국적 : 오스트리아
봉사기간 : 39년 1월
포상내역
 1971.05.17 감 사 패(보사부장관 김태동)
 1972.07.24 국민포장(대통령 박정희)
 1974.11.27 감 사 패(보사부장관 고재필)
 1979.05.11 감 사 패(대한간호협회장 김모임)
 1983.04.07 표창장 제57304호 (대통령 전두환)
 1996.05.17 국민포장증 제6491호 (대통령 김영삼)
주요공적내용
 한센병자녀 영아원운영 및 보육사업
 한센병환자의 재활치료와 계몽
 자활정착사업 및 각종시설지원
국립소록도병원 전직원 및 원생 일동
     
43년간 봉사 마치고 소록도 떠난 마리안느 수녀와 마가렛 수녀
"그들은 '살아있는 마리아' 였습니다"
한센병 환우들이 모여 사는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43년 간 봉사해온 수녀 두 명이 11월21일 새벽 짤막한 편지만 남기고 조용히 고국 오스트리아로 떠나간 사연이 알려져 우리를 숙연케 하고 있다. 1962년 28, 27살의 나이에 소록도에 들어온 ‘그리스도왕의 시녀회’ 소속 마리안느(71ㆍMarianne Stoeger) 수녀와 마가렛(70ㆍMargreth Pissarek) 수녀가 그들이다.
두 수녀는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도 없고, 자신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 했었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며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이곳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편지로 미안함과 용서를 빈다”고 적고 있다.
떠난다고 알리지 않은 것은 이별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서 였다. 두 수녀는 배를 타고서도 소록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43년 생활을 정리한 짐이라곤 낡은 여행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그날 해가 중천에 떴을 때야 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보답은커녕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주민들은 소록도병원 치료소와 성당에 모여 열흘 넘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
환자의 간청에도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돌보아왔던 이들은 60년대부터 모국 오스트리아에서 보내온 의약품과 지원금으로 열악한 치료 환경과 싸워왔다.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하고, 물리치료기를 도입해 환우들의 재활의지를 북돋워주기도 했다. 한센병 자녀들을 위해 영아원을 운영하고 보육과 자활사업 등 정부도 나서지 않는 일을 말없이 해왔다. 이들의 헌신은 한국 의사와 간호사들이 소록도로 달려가게 자극하기도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환자를 돌보는 데 생애를 바친 두 분은 TV도 없이 작은 장롱만 있는 방에서 검소한 삶을 살았다. 주민들은 전라도 사투리를 잘 구사하는 두 수녀를 ‘마리안느 할매’ ‘마가렛 할매’라 불렀다. 김명호 소록도 환우자치회장은 “병마와 싸우면서 두 수녀님의 천사 같은 웃음과 기도에 큰 희망을 얻었다”며 “두 분은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말했다.
이들은 선행에도 불구하고 결코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치 않았다. 국내외 언론들이 수없이 소록도를 찾았지만 인터뷰는커녕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누군가가 찾아오면 몸을 감추었다. 겸손과 봉사, 그 자체의 삶이었다. 수많은 감사장과 공로패가 전달됐지만 되돌려졌다. 정부가 준 국민포장(72년)과 표창장(83년), 국민훈장 모란장(96년)이 이들이 받은 전부다. [2005년 12월 8일 주간한국 조신 차장]
     
소록도의 두 천사 고향에서의 이야기
《‘천사같이 오셨다가 천사같이 떠나신 할머니, 보고 싶어요.’ 소록도에서 온 한글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푸른 눈의 수녀가 눈가를 훔쳤다. 편지에 묻어 온 소록도의 쪽빛 물결이 떠오른 것일까. 주름진 그의 얼굴에 이내 미소가 가득 번졌다.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40년이 넘도록 한센병 환자들을 돌본 마리안(71) 수녀. 그는 지난달 21일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소록도를 떠났다. 함께 소록도에서 봉사한 마가레트(70) 수녀와 함께 남긴 편지에는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할 수 없다.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겠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수녀들은 고향인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 꼭꼭 숨었다. 》
지난주 초 두 수녀를 찾아 인스브루크로 향했다. 마리안 수녀가 사는 곳은 인스브루크 시내에서 기차로 20분 거리인 마트라이라는 작은 마을.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물어물어 집을 찾았다. 마리안 수녀는 다행히 집에 있었다. 한국에서 전달받은 소록도 주민들의 편지를 전했다.
“큰 할매, 작은 할매, 감사드립니다.”
“그토록 곱던 젊음을…, 소록도 사람들의 손발이 되어 평생을 보내신 할머니 두 분께 충심으로 감사합니다.”
마리안 수녀는 편지를 읽으면서 “눈을 뜨면 한국 생각이 나고 소록도 꿈을 아직도 꾼다”고 한국말로 말했다. 두 수녀는 송별식을 요란하게 하는 것이 싫어 광주대교구 주교에게만 자신들의 뜻을 알렸다. 그러고는 비행기에 실을 수 있는 짐 20kg만 들고, 올 때 그랬던 것처럼 소리 없이 소록도를 떠났다.
두 수녀가 돌아오자 가족들은 반색을 했다. 마리안 수녀의 여동생은 집 3층에 언니를 위한 보금자리를 꾸몄다. 마가레트 수녀의 형제들도 작은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 줬다. 두 수녀는 소록도를 떠나던 날 멀어지는 섬과 쪽빛 물결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0대 후반부터 40년을 넘게 산 소록도는 ‘고향’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 이젠 오히려 오스트리아가 ‘낯선 땅’이다. 마리안 수녀는 “동생들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적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등록 신고도 새로 하고, 친지와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얼굴을 익히고 있단다. 아직도 저녁 식사는 한식으로 한다.
3평 남짓한 방 안은 한국에서 가져온 자그마한 장식품으로 가득했다. 방문에는 붓글씨로 쓴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는 문구도 붙어 있었다. “평생 마음에 담아 두고 사는 말”이라고 마리안 수녀는 설명했다. 그의 삶은 이 좌우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소록도를 찾은 것은 1962년. 처음부터 평생 소록도에서 봉사하겠다는 각오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2005년 이제는 70세가 된 마리안나 수녀"
“처음 갔을 때 환자가 6000명이었어요. 아이들도 200명쯤 됐고. 약도 없고, 돌봐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해 주려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수녀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치료했다. 약이 부족하면 오스트리아의 지인들에게 호소해 오스트리아, 독일, 스위스에서 실어 날랐다.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을 위해 영양제며 분유도 부지런히 구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소록도에선 계속 아이들이 태어났다. 한센병 환자인 부모들과 함께 지낼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두 수녀는 보육원을 세웠다. 가난한 살림살이라 옷은 직접 해서 입혔다. 아이들이 여섯 살이 돼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으면 육지의 보육원으로 보냈다.
할 일이 지천이고, 돌봐야 할 사람은 끝이 없었다. 두 수녀는 가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전했다. 마가레트 수녀의 언니 트라우데 미코스키(73) 씨는 “소록도에선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한다고 들었다”면서 “마가레트가 언젠가 재로 변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시련도 있었다. 3년 전에는 마리안 수녀가 대장암 진단을 받아 한국과 오스트리아를 오가며 3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많이 아팠어요. 그래도 소록도 사람들이 기도해 준 덕분에 나았지요.”
그렇게 정성을 쏟은 소록도는 이제 많이 좋아졌다. 환자도 600명 정도로 크게 줄었다. “더는 우리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요. 40년 동안 함께 일한 한국인 간호원장이 은퇴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가레트와 함께 이제는 한국을 떠나도 되겠다고 결심했답니다.”
마리안 수녀를 만난 뒤 마가레트 수녀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수녀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마가레트 수녀의 아파트뿐 아니라 남동생, 언니의 집을 계속 찾아갔지만 결국 언니를 만나 근황을 듣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마리안 수녀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기자의 손에 알사탕 몇 개를 꼭 쥐여주었다. 밥을 못 차려 줘 미안하다는 말도 했다. 그러고는 소록도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내비쳤다.
“지금도 우리 집, 우리 병원 다 생각나요. 바다는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 하지만 괜찮아요. 마음은 소록도에 두고 왔으니까….” 
[ 2005년 12월 29일 동아일보 인스브루크(오스트리아)=금동근 특파원]
     
“소록도 천사 수녀… 그녀들은 백로였지”
前병원장 조창원씨가 그리는 마리안느·마가렛 수녀
환자 썩은살 맨손 만지며 45년 봉사하다 훌쩍 떠나
기념관에 걸 그림 직접 그려… 다시 이 땅에 그런분 오실까
“그이들은 백로디, 백로. 인간이 아니야.”
머리 하얗게 센 조창원(趙昌源·80) 할아버지는 요즘 종일 그림을 그린다. 그림마다 어김없이 백로 두 마리가 등장한다. 백로는 수녀다. 45년 동안 소록도병원에서 봉사를 하다 지난해 11월 21일 고향 오스트리아로 떠난 마리안느·마가렛 수녀를 백로로 그리고 있다. 고향인 평양 사투리가 짙게 남아 있는 할아버지는 8년 동안 소록도병원장이었다. 육군 대령 군의관이었던 그는 5·16 군사정변 후 1961년 9월 소록도로 갔다. 이청준(李淸俊)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서 끝날 것 같지 않은 간척사업을 무섭게 몰아붙이던 조백헌 원장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와 수녀들의 인연은 특별하다. “내가 가보니까 가장 필요한 것이 영아원과 보육소더란 말이디. 아기들이 태어난 다음에 엄마랑 바로 떨어지면 한센병이 전염되지 않거든.” 할아버지는 시설이 없어 아이들이 ‘천형(天刑)’을 물려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소록도 가던 그해 광주 대교구의 미국인 신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 조창원 할아버지는 마리안느, 마가렛 두 수녀를 사람으로 그릴 수 없었다고 했다. 머리가 센‘할매’로 그리기엔 너무 천사같았기 때문이란다. /이진한기자
수녀들이 섬에 들어온 첫날 깜짝 놀랐단다. “마리안느 수녀님은 키가 나만했어. 내가 1m78㎝인데 덩치도 좋았지. 마가렛 수녀님은 호리호리했고. 스물예닐곱 살 금발 수녀 두 명이 소록도에 오니까 섬이 난리가 났디. 생전 외국인을 본 적이 없었거든.” 수녀들이 소록도에 온 것이 지난 1962년 2월. 할아버지 그림 속에선 소록도 파란 하늘 무지개 너머로 백로 두 마리가 날아오는 것으로 표현됐다.
소록도 사람들이 정작 더 놀란 것은 수녀들의 외모가 아니었다. 도착한 다음날부터 환자들의 썩어가고 문드러진 팔과 다리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그것도 맨손으로. “나도 명색이 의사(醫師)인데 너무 부끄러웠디. 그전까지 우리 병원 사람들은 마스크에 고무장갑 끼고, 고무장화 신고 완전 무장하고 나서야 환자들을 치료하곤 했거든….” 할아버지는 수녀들이 맨손으로 치료하는 것을 본 다음에도 병원 사람들의 치료방법은 바뀌지 않았다며 또 부끄러워했다. 할아버지 그림 속 백로 두 마리는 부리에 핀셋을 물고 문드러진 발가락에 약을 바른다. “그 건장한 마리안느 수녀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2000년에는 장암에 걸려서 오스트리아에 가서 장을 1m20이나 잘라 냈다는 거야. 6개월 동안 수술받고 나서는 소록도로 다시 돌아왔더란 말이디. 그게 어디 사람인가.”
지난해 11월 22일 수녀들은 한국을 떠나기 직전 할아버지에게 타이핑된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한국에서 같이 일하는 외국 친구들에게 가끔 저희가 충고해주는 말이 있는데, 그곳에서 제대로 일할 수가 없고 자신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줄 때는 본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자주 말해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말을 실천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리안느 올림. 마가렛 올림.’ 수녀들이 한국을 떠난 직후 할아버지는 그이들을 기리는 유화 22점을 그려 왔다. 그림은 소록도에 조성될 ‘마리안느·마가렛 수녀 기념관’에 놓이게 된다.
기념관은 올해 5월 17일 소록도병원이 만들어진 지 90주년이 되는 날에 맞춰 문을 열 예정이다. “소록도 역사가 90년인데, 그이들이 45년을 봉사했으니 섬 역사의 반을 보고 간 거거든. 다시 우리 땅에 그런 분들이 오실지 싶어.” 그림을 쓰다듬는 할아버지의 손이 계속 파르르 떨렸다.
김정훈기자 runto@chosun.com 2006.03.07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사설] 40년 봉사 접고 말없이 떠난 소록도 두 천사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주민들이 열흘 넘게 성당과 치료소에 모여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43년 동안 환자들을 보살피다 지난달 21일 귀국한 오스트리아 수녀 두 분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별의 슬픔을 누르는 기도다. 마리안네 스퇴거(71), 마가레트 피사렉(70) 수녀는 주민들에게 헤어지는 아픔을 주기 싫다며 ‘사랑하는 친구·恩人은인들에게’라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새벽에 몰래 섬을 떠났다. 두 수녀는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할 때”라며 “부족한 외국인이 큰 사랑을 받았다”고 오히려 감사했다.
오스트리아 간호학교를 나온 두 수녀는 소록도병원이 간호사를 원한다는 소식이 소속 修女會수녀회에 전해지자 1962년과 66년 차례로 소록도에 왔다. 두 사람은 섬에 발을 디딘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마리안네 & 마가레트’라는 표찰이 붙은 방에서 환자를 보살폈다.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다. 오후엔 죽도 쑤고 과자도 구워 들고 마을을 돌았다.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친 두 수녀를 ‘할매’라고 불렀다. 꽃다운 20대는 수천 환자의 손과 발로 살아가며 일흔 할머니가 됐다.
숨어 어루만지는 손의 奇蹟기적과, 주님밖엔 누구에게도 얼굴을 알리지 않는 베풂이 참베풂임을 믿었던 두 사람은 賞상이나 인터뷰를 번번이 물리쳤다. 10여년 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 駐韓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줄 수 있었다. 병원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다. 월 10만원씩 나오는 長期장기봉사자 食費식비도 마다해 병원측이 “식비를 안 받으면 봉사자 자격을 잃는다”고 해 간신히 손에 쥐여줄 수 있었다. 두 수녀는 이 돈은 물론, 본국 수녀회가 보내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돼 떠나는 사람들의 路資노자로 나눠줬다. 두 수녀의 귀향길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만 들려 있었다고 한다.
외로운 섬, 상처받은 사람들을 반세기 가깝게 위로한 두 수녀님의 사랑의 향기는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에 날려 어두운 곳을 밝히고 추운 세상을 덥혀 주리라고 믿는다.
2005.12.01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43년 봉사하고 말없이 떠나… 소록도 벽안의 천사들
70代 마리안느·마가렛 수녀 "나이 들어 부담주기 전에…"
편지 한장 남기고 새벽길 밟아…주민들 "그들은 성모 마리아"
마리안느(오른쪽에서 두번째) 수녀와 마가렛(왼쪽) 수녀가 출국에 앞서 21일 가톨릭 광주대교구를 방문해 최창무(왼쪽에서 두번째) 광주대교구장, 윤공희(가운데), 김희중 주교와 기념촬영을 했다.평화신문 제공
“헤어지는 아픔을 드릴 수 없어 말없이 떠납니다.”
한센병 환우들이 모여 사는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43년 간 봉사하다 21일 홀연히 본국 오스트리아로 떠난 마리안느(71), 마가렛(70) 수녀의 사연이 감동을 주고 있다.
두 수녀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소록도 주민들은 이별의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일손을 놓아버렸다. 주민들은 소록도병원 치료소와 성당에 몰려 열흘째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
이들 ‘벽안의 천사’들이 소록도에 들어온 것은 1962년 6월. 그리스도왕의 시녀회 소속으로 간호사 자격을 가진 20대 후반의 두 수녀는 병마와 싸우며 힘겹게 하루 하루를 나던 한센병 환우를 돕기 위해 소록도를 찾았다. 이들은 당시 국내의 열악한 치료 여건 때문에 오스트리아에서 보내온 의약품과 지원금 등으로 온갖 사랑을 베풀었다. 환우들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등 헌신적인 치료 활동을 했다.
두 수녀는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하고, 물리치료기를 도입해 환우들의 재활의지를 북돋아주기도 했다. 한센병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사업 등 정부도 나서지 않은 일을 척척 해냈다.
한국생활에 익숙해진 두 수녀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고 한글까지 깨치는 등 완연한 ‘한국 할머니’의 모습으로 변했다. 주민들은 그들을 “할매”라고 불렀다. 하지만 평생의 선행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극구 꺼렸다. 그 동안 국내외 수많은 언론이 그들의 선행을 알리기 위해 소록도를 찾았지만 인터뷰는커녕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수 백장의 감사장과 공로패가 전달됐지만 되돌려졌다. 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이 이들이 받은 상훈의 전부였다.
두 사람은 떠나기 하루 전 병원측에 이별을 통보했다. 주민들에게는 아픔을 준다며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란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다. 갖고 간 짐이라곤 낡은 여행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편지에서 이들은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도 없고, 자신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했었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며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이 편지로 미안함과 용서를 빈다”고 말문을 흐렸다.
그토록 큰 봉사와 희생을 한 평생 실천하고도 오히려 그 부족함을 말하는 두 수녀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 우리 시대에 진실로 필요한 크나큰 사랑이 느껴진다. 김명호 소록도 환우자치회장(56)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두 수녀님의 천사 같은 웃음과 기도에 큰 희망을 얻었다”면서 “그들은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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