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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조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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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한 [ejadore] 쪽지 캡슐

2000-04-07 ㅣ No.1028

이 겨울, 어디선가 내 사랑 이팝나무가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매운 삭풍에 헐벗은 몸을 부대끼며 내 마음의 동요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오랜 동안의 사랑이 이렇게 허망하게 흔들릴 수 있는가. 애증으로 처절하게 몸을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봄이 온다 해도 이제 다시는 꽃을 피우지 않으리라. 제 스스로 생장을 멈추고 형벌의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이런 일을 상상해 본 적 없으니 당하는 입장에서야 오죽 섧고 뼈에 사무치랴.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공교롭게도 이팝나무에 한창 꽃이 필 무렵이었다. 지난 4월 어느날, 학술 심포지엄에 참석했다가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것은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고 또한 믿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드넓은 학술회의장 한가운데 이팝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게 아닌가. 눈이 부실 정도로 수려한 외관에 흰 설화처럼 다소곳한 자태로 서 있던 그녀.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그녀는 내 눈에 이팝나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세상에. . .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꼈지만 나는 잠시 뒤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삼림자원학 심포지엄의 발표자 명단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배포된 팸플릿을 통해 그녀가 연구해 온 수목의 종류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팸플릿을 든 내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내 눈에는 이팝나무로만 보이는 그녀가 발표한다는 연구수종, 그것은 놀랍게도 조팝나무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팝나무, 조팝나무.

그날 그녀가 조팝나무의 생태와 변이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동안 나는 세상에 태어난 이후 가장 극심한 혼란을 경험했다. 함성처럼 피어난 이팝나무와 조팝나무의 꽃들이 때를 같이하여 내 눈앞을 어지럽히는 것 같아서였다. 희디흰 꽃잎들이 난분분하게 흩날리는 환영을 보다 못해 나는 도리 없이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어지럼증이 느껴지고 속이 메스꺼워 도저히 더는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자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눈앞을 어지럽히던 환영이 사라지고 비로소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 오, 하느님 맙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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