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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0일 성김대건안드레아와 정하상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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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2-09-18 ㅣ No.649

 

축일;9월 20일

한국 103위 순교 성인들. 19세기

성 김대건안드레아와 정하상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대축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가톨릭 신앙이 전파된 것을 보면 대개

선교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성령의 힘은 성실한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 생활하고자 할 때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다.

 

극동 아시아의 조그마한 반도인 조선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 진것은

성실한 유학자들이 서적을 통해 학문을 연구한 끝에 스스로 입교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에 당신 성령의 힘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의 섭리일 것이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한문으로 쓴

성서와 교리서 또는 윤리와 신학 서적들이 그 당시의 외교 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다른 많은 종교 서적들과 함께

읽히던 천주 교회 서적들은 진리를 찾던 조선의 선량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이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권철신과 이벽을 중심으로 한 젊은 양반 학자들의 학문적인

모임이었던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가 1779년경에는 천주교 신앙을 알고 실천하려는 모임이 되었다.

 

1783년, 이승훈을 북경으로 파견하여 북경 선교사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게 했으며, 그 이듬해 이승훈이 귀국하여 이벽,권일신,정약용,

약종 형제들과 함께 첫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다.

 

성직자나 선교사가 없이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인 조선의 신앙 공동체는

급속도로 성장했으나 정치적 불안과 당파 싸움 및 교리와 마찰을 일으킨

조선의 풍속 때문에 심한 박해를 당했다.

1785년, 형조의 우연한 검거에 의해 야기된 최초의 박해에 이어 크고

작은 박해들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수천 수만 명이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신자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1793년에 조선에 들어온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1801년에 대부분의 교회 창설자들과 함께 순교했다.

목자 없는 조선의 신앙 공동체는 1825년, 로마 교황청에까지

그 어려움을 호소하여 1831년에는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파리 외방

선교회가 이 지방의 선교를 담당하게 되어 1835년부터 몇 명의 프랑스

선교사 들어와서 활동했으나 1839년에는 주교 한 사람과 신부 두 사람이

모두 순교했다.

1845년에는 이 땅에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잠깐 활동

했으나 그 다음해에 순교했다.

서구 열강들이 극동 지방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던 19세기 말에는 국내외의

불안이 고조되고 어리석은 정치가들의 쇄국 정책으로

1866년, 외국 성직자들이 선교 활동을 하던 천주 교회에 다시 끔찍한

박해가 일어나 1만여 명의 신자들이 학살되고 십여 명의 성직자들이

모두 살해되거나 추방되었다.

이렇게 100여 년에 걸친 박해로 적지 않은 신자들이 배교하기도 했으나

학자와 남자들 뿐 아니라 부녀자와 아이들 및 평민과 상인들까지도

신앙을 위하여 용감하게 목숨을 바쳤다.

 

이 중에서 초기의 순교자들은 증거자료의 미비로 누락되고 1839년부터

1849년까지의 순교자들 중에서 79명이 선택되어 1925년 7월 5일에

복자품에 오르게 되었고, 다시 1866년의 박해를 중심으로 순교한

24명이 1968년 10월 6일에 시복되어 모두 103명의 순교자가

시복되기에 이르렀다.

103명의 순교 복자들은 한국 선교 200주년이 되는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에서 시성되어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한국의 103위 성인 www.cbck.or.kr/KOREA/103/fr_saint_index.html

시성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1984.5.6)

 

신자들이 강요받은 것은 주로 세 가지였다.

첫째는 배교할 것,둘째는 신자들이 성명과 주소를 댈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교회 서적과 성물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이에 불복하면 참혹한 형벌을 가했는데 손과 팔,다리에 주리를 틀며

끈으로 살을 톱질하여 베어 내고 치도곤이나 곤장으로 때리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몇 차례의 매를 맞으면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기절하면 감옥에 처넣어 두는데 그 감옥이란 통나무로 된

움집 같은 것이라서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둡고 음산하며 바닥은

습기로 가득 차 신자들의 매맞은 상처는 곪고 썩어 구더기가 생길

지경이었고,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아 굶주림에 지쳐 어떤 사람들은

거적때기를 뜯어서 씹고 있을 정도였다.

많은 신자가 이렇게 비참하게 옥사했는데, 차라리 교수형이나 참수형을

받는 것이 오히려 고통을 덜 받는 편이다.

많은 신자들은 이 같은 혹독한 심문과 매질 그리고 감옥 생활에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며 때로는 심문중에 창조주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유교의 부모 공경과 임금에 대한 충성심에 비교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설파하다가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우리는 신앙 생활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만을 빌며 무사안일한

생활을 꿈꾸기 쉽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과 투쟁하며 복음의 메시지에 따라

살아가려면 비록 박해 시대가 아니더라도 갖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고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을 생각하며 구원의 길을

용감하게 걸어간 순교자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활이

무사 안일하기만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은 우리를 이 세상의 모든 악과 불행에서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어려움을 당함으로써 이 세상의 죄악

과 불행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 순교성인들의 진리에 대한 갈망과 순교 정신은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무사 안일주의에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

 

1877년에 서울의 감옥에 갇혔던 리델 주교는 옥중 생활의 비참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기아로 희생이 된 그들을 보고 너무나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해골이 걸어다니고 있는 것이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괴로움과 굶주림과 가려움과 곪아 썩어가는 상처는

그들을 볼 수 없을 만큼 흉악한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류홍렬, ’한국 천주 교회사’ 상권 p.318)

 

1845년에 입국한 다블뤼(Daveluy)신부는 기해년의 옥중 생활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교우들은 이러한 감옥 속에 빽빽이 처넣어져 있었으므로 발을 뻗고

누울 수도 없을 정도이다. 그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이 지굿지굿한 옥중의 괴로움에 비하면 고문은 문제도 안된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고름 때문에 멍석은 푹푹 썩어 가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게 되니, 이로 말미암아 고약한 병이 돌기 시작하여 2,3일내에

죽은 교우도 몇이나 있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형벌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다.

고문하는 곳에서는 용감히 그 신앙을 공표하면서도 이 기갈을 참지

못하여 굴복한 이도 적지 않았다."

(류홍렬, ’한국 천주 교회사’ 상권 pp.318-319)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7월 5일.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1821-1846년)는 충청도 솔뫼의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이 드러났다고 한다.

 

15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의 주선으로 마카오로 가서 신학공부를

마쳤으나 연령 미달로 서품받지 못하고 지내던 중, 1845년 1월

죽을 고생 끝에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는 기쁨을 얻는다.

서울에 도착한 후 그는 극도로 건강이 나빴으나 건강이 회복되기도

전에, 전교신부를 영입하려는 목적으로 다시금 상해로 떠난다.

풍랑으로 인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상해에 도착한 그는

1845년 8월 17일에 김가항에서 페레올 고주교 집전으로 서품되는

기쁨을 얻었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안 신부를 모시고 충청도 나바위에 상륙하여

선교활동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한편 그는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로 신부 일행을 입국시키려고

활약하던 중 1846년 6월 5일 밤에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그의 행적이

세상에 알려졌던 것이다.

 

성인은 수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마침내 김대건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이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께서 김신부를 비롯 79명의 순교자를

시복하시고, 비오 12세는 1949년에 한국에서 선교하는 모든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선언하였으며,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에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103위 시성식을 거행하시고,

그를 한국의 대표 성인으로 삼으신 것이다.

 

 

수선탁덕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비록 서품을 받은 지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성무집행을 했으나 그의 생은 참으로 굵직한 삶이었다.

 

동북 아시아를 무대로 전개되었던 그의 활동과 국위 구령과 개화를

위해 헌신한 참 삶의 실천은 종교적으로 한국인 성직자 특유의 가능성을

입증한 것이다.

 

페레올 고 주교는 김대건 신부를 잃은 후 파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

교장 바랑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 젊은 조선인 신부를 잃은 것은 조선교회에 거의 갚기 어려운

불행입니다. 나는 아비가 그 자식을 사랑하듯이 그를 사랑했습니다.

오직 그의 천국에서의 행복을 생각해서 그를 잃은 슬픔을 겨우 스스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동포 중에서 가장 먼저 사제 성직에

오른 분으로 그것도 오늘까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열렬한 신앙과

진지하고 성실한 공경과 놀란 만한 웅변의 사람으로 한 번만이라도

그와 접촉한 교우는 곧 존경과 사랑을 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김대건 신부의 이러한 영광된 순교는 조선교회의 영원불멸할 명예이며

완전한 승리와 불멸의 약속의 보증이 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순교한 지 11년 후인 1857년 9월 23일에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 칭호를 받게 되고,

1925년 7월 5일에는 복자위에 오르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49년 11월 15일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성직자들의 대주보를 받들게 되고,

7월5일을 김대건 신부의 축일로 정하게 되었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을 성인으로 선포하면서

김대건 사제 순교자를 그 첫 자리에 올렸다.

 

한국의 103위 성인 www.cbck.or.kr/KOREA/103/fr_saint_index.html  

성김대건안드레아 사제 기념경당내부(미리내)

 

♬ Canto Gregoriano-Christus Natus(베네딕도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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