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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치매노인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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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근 [cleaneyes] 쪽지 캡슐

2005-08-19 ㅣ No.5728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이 세상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떠난 후에도

저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제 정신은 안개처럼 희뿌옇지만

제 마음은 수정처럼 맑답니다.


제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하여 저를 탓하지 마십시오.

제 마음대로 어떤 일에 대한

작은 기억이라도 떠올릴 수 있다면!

제가 드렸던 질문을 다시 반복한다고 해서

화를 내지 마십시오.

저도 겁이 나고 혼돈스러우니까요.


제 행동거지가 올바르지 않다고 하여

더 이상 저를 사랑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친절하고 참을성 있게 이제는 사라져 간

온전했을 때의 저의 태도를 상기시켜 주십시오.


제가 이제 자주 천천히 걷는다고 하여

그리고 본향으로 가려고 한다고 하여 화내지 마십시오.

이곳은 저의 본향이 아닙니다.

이제 이곳에서는

아무 것도 친숙하지도 않고 안심이 되지도 않습니다.

본향으로 돌아가면

제 기억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아픈 기억들을 상기시키지 마십시오.

동무들이 먼저 떠났고

옛 집이 불타 버렸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저에게 마치 아이에게 하듯이 말하지 마십시오.

비록 제 행동이 어린아이 같을지라도

저에게는 인생의 풍부한 경험이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말씀해 주시고

당신이 제 삶에 동행했던 추억의 장소를 이야기해 주십시오.

저는 기억을 떠올리고 싶습니다.

제가 당신의 사랑과 친절을 느끼니까요.


저에게 세상을 보여 주십시오.

자연과 음악과 예술의 세계를 보여 주십시오.

저는 세상이 들려주는 신나는 정취를 잊었답니다.

제게 있는 얼룩들을 지우고

마음을 말끔하게 해 줄 도구가 있다면

제가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온전하지 못했던 저의 과거에 대해 용서를 청합니다.

제가 기억할 수 있다면, 일일이 사과의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많은 말로서 저를 위로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당신이 함께 있어 주는 것으로

제 빈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으니까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저와

그리고 지난날의 저라는 사람을 그냥 사랑해 주십시오.


                                     1997년 6월

                    제이. 알 하페츠 (J. Al-haf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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