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동성당 게시판

두번째 백수의 사랑이야기... 11-15/27

인쇄

임동현 [imjoseph] 쪽지 캡슐

2000-04-27 ㅣ No.1761

 

†. 찬미예수

 

안녕하세요? 제기동식구들....

 

눈이 아플만도 하네요.

 

어쩌지?

 

Font변경? 크기 변경?(이건 그럼 양이 너무 늘어나겠다)

 

색깔 변경? - 이게 좀 가능할꺼 같군.

 

최대한 잘 보이도록 해서 올릴께요.

 

글구, 여러분들의 반응에 감사드립니다.

 

이번글 올린다음에 이 글의 작자에 대해서 알려드리도록 하죠.

 

그 사람 글 보느라 어제두 밤을 세웠네요.

 


 

11편

 

만화방총각: 눈을 떴더니 밖이 환하다. 아침햇살이 내 창문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걸로 봐서, 늦잠을 잔거 같다.

 

백수아가씨: 녀석의 미소가 늦은밤까지 머물다 갔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무도 없다. 엄마는 밥도 안차려 놓고 또 어디를 가셨을까?

 

자취생: 잠에서 깨었는데 밖은 아직 어둠속에 있다. 시험공부한다고 요며칠 새벽에 일어났더니 그게 또 몸에 베였나보다. 아직 어제의 두근거림이 있다. 조깅이나 할까? 그녀집쪽으로... 그녀 집골목으로 점퍼하나 입고 뛰었다.

 

만화방총각: 오전에 공책을 펼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감상적이 될 줄 알았는데..의외로 글이 잘 이어진다. 이제 마무리 부분으로 접어들고 있다. 주인공이 많은 심적 변화와 유혹을 뿌리치고 한여자를 찾아간다는 내용으로 끝이날것이다. 정경이 생각으로 한여자를 그렸다. 그래서 요며칠 소설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 마음이 차분한게 글이 잘이어지고 있다.

후후... 큰 두눈과 맑은 눈물, 그리고 이제와서야 달콤함을 주는 그 찰나의 입술느낌... 정경이 때문에 답답했던 내 마음이 누군가의 생각으로 참 맑아졌다. 오늘 소설속 한여자의 모습에는 혜지씨의 모습이 담겨졌다. 손님이 들어왔다. 이제 그만 적어야겠다.

 

백수아가씨: 며칠만에 편안하게 잠이 들었었다. 창문을 여니 찹지만 상쾌한 바람이 들어온다. 아침은 내가 만들어 먹어야겠다. 오늘은 뭘 할까? 요앞 대학도서관에 책이나 보러갈까?

녀석도 그 학교 다니는거 같다. 몇살일까? 몇마디 안해봤지만 억양이 서울사람 같지가 않았는데... 이름은 또 뭘까? 어제 이름이나 물어볼걸 그랬다. 이 근처에 사는건 확실한데...

그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생긴다. 그 궁금증들이 이병씨에 대한 불안한 설레임과 답답함을 걷어내는거 같다.

 

자취생: 그녀 집앞을 지나 골목 끝까지 달렸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집을 보며 달려왔다. 즐겁다. 춥지만 달리고 싶다. 그녀 집쪽으로 달려가는데. 그녀의 아버지인 듯한 사람이 나왔다. 내가 또 인사성은 밝잖아.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어! 열심히네. 그래 나중에 봐." 날 아나? 아버님께서 출근을 하시는 반대방향으로 뛰었다. 다시 돌아왔다. 너무 무리하는 걸까? 약간 숨이 가프고 찬바람에 얼굴이 따끈거린다.

혹시나 한번 볼 수 있을까. 집앞을 뛰어봤지만, 이제는 안되겠다. 그녀의 집을 쳐다보며 천천한 걸음으로 내 자취방쪽으로 향했다. 그녈 볼수는 없었지만 저곳에 지금 그녀가 내가 알지 못한 어떤 삶을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하다. 집 대문이 열렸다. 많이 놀랬다. 그녀가 보고 싶어 왔지만 여기서 마주치면 난감하다.

"안녕하세요."

"어. 누구지?"

 

만화방총각: 만화방안이 많이 덥다. 졸음이 온다. 전화기를 보니 음반점에 전화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망설임이 생긴다. 하지만 지금 이 차분한 기분을 잃고 싶지가 않다.

 

백수아가씨: 어라? 엄마가 오늘 왠일로 약수통에 물을 받아 오시는 거지. 저건 아빠도 들고가시길 꺼려하던 큰것인데?  바깥날씨처럼 차가운 그 물이 내 마음을 적셨다. 아 시원하다. 그 시원함에 어디 외출을 하고 싶다. 그래 아까 맘먹은데로 요앞 학교나 가보자. 혹시 아냐? 그녀석이라도 보게될지...

 

자취생: "아.. 그때 눈길에 넘어졌던 학생이구나." 이런! 내가 쌀가마니 들어준것은 기억 못하시나? 아줌마의 한손에는 자그마한 물통이 들려있었다. "어디. 운동가나보지?" 운동 다했는데... "예. 매일 여기서 학교까지 조깅하는데요. 참 상쾌하거든요." 잘 보일려면 할 수 없다.

"학교? 요앞 대학교말이지? 그 학교 학생인가보지?"

"예."

"잘 되었네. 나도 그 학교안에 있는 약수터가는데..."

"아. 그래요."

"나하고 같이가면 되겠다."

"예?" 집에 가야되는데... 이제는 배도 고픈데.

"잠깐만..." 그 아줌마께서, 아니 어머님께서 집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래 가다 이런저런 이야기하다보면 그녀 이야기도 나오겠지. 근데 집에는 왜 다시 들어가셨을까? 한번밖에 안 봤는데, 이집 식구들은 사람들한테 친하게 잘 대한다. 어머님께서 나오셨을땐 아까의 작은 물통대신 20리터 큰 물통이 들려져 있었다.

"우리 아들도 이학교 다니는데."

"아. 예."

"학생은 무슨과야?"

"기계공학과 다니는데요."

"정말? 우리아들도 기계공학과 다니는데. 지금은 군대가 있지만."

"아. 예. 몇학번 누군데요? 제가 아는 학생일수도 있겠는데요."

"95학번이고 이름은 최혜철인데..작년 봄에 군대갔어. 내년봄에 제대할거야."

두가지 정보를 얻었다. 그녀의 성은 최씨고 남동생이 하나 있구나.

"아. 제가 군대 있을때 입학했네요. 그리고 제가 복학했을때는 군대가버렸고.. 전 92학번이거든요."

"그래? 학생이 많이 선배네. 호호 길게 말하니까. 사투리가 많이 표난다. 경상도

어디서 올라왔어?"

"예. 진주라고...혹시 아세요?"

"진주? 우리남편이 진주사람이잖아. 나도 삼천포사람이고.. 우리 예전에 진주에서 살았었어. 야 반갑네.".

"예. 반갑네요. 만나면 꼬박꼬박 인사드려야 겠네요."

"그래. 내년에 우리아들 제대하면 잘 봐줘"

"저 곧 졸업하는데요."

학교 안 약수터에 도착할때까지 어머님은 혜지씨에 관한 말씀은 하지 않았다.

에고 무거워라. 어머님은 여전히 말을 많이 하신다. 사촌이 땅을 샀다느니. 자기 남편이 어디회사 실장이다라느니. 군대가서 고생하는 아들보니 맘이 아팠다느니.. 하지만 올때도 그녀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설사 그녀얘기를 하셨다하더라도 난 대답이나 다른 어떤 질문도 하지 못했을것이다. 물통이 장난이 아니게 무겁다. 배도 고프고 이미 뜀박질로 체력이 다한상태서 이 무거운 물통은 차라리 삶의 무게였다. 하지만 사랑은 노력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 애써 힘든 표정을 감추고 물통을 낑낑 들고 걸었다. 그녀 집앞에 물통을 내려놓았을때 난 반사상태였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이렇게 많은 땀을 흘려 본게 몇년만일까? 어머님께서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나다." 참 반가운 목소릴 들었다.

문이 열리고 어머님께서 낑낑거리시며 겨우 물통을 끌고 들어가신다. 첨부터 나한테 맡길려고 작정하시고 큰 물통으로 바꾸신게 틀림없다. "고마워. 학생. 참. 아까 그 목소리 내딸인데.. 참 이뻐. 담에 소개시켜주께."

하하. 드디어 그녀 얘기가 나왔다. 그리고 소개까지 시켜준댄다. 참 기뻐해야 하는데, 내몸은 이미 내몸이 아니었다.

 

만화방총각: 혜지씨가 출근하는 시간이 되어온다. 오늘도 나오지 않는걸까? 기다려진다. 그 단골녀석이라도 와주면 좋겠는데, 그녀석도 보이질 않았다. 많이 기다렸지만 혜지씨는 오지 않았다. 또 답답해진다. 그 답답함에 정경이에 대한 생각까지 겹쳤다. 괜히 정경이한테 전화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혜지씨의 오지않음이 전화할 용기마저 꺾어 놓았다. 마음이 불안하게 붕떠오른다. 잡지 못한다면 울음이 나올것만 같았다. 밖이 깜깜해져오고 있다.

더 깊이 짚어보면 더 아름다게 정겨운 추억이 있었지만. 최근의 음반점에서의 애틋함과 밝은 표정의 정경이 모습이 떠 올랐다.  그리고 지금 별것 아닌것 같은 일로 태도가 참 많이도 바꼈던 정경이의 모습이 날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  그걸 잊고싶어서였을까? 아니면 무언가 잡힐듯한 꿈때문이었을까? 오늘 혜지씨가 많이 기다려졌었고 올것만 같은 기대가 들었는데... 이제 내 옆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공허함만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백수아가씨: 쌀가마니 들어 주었던 학생이 조금 들어주었다는 엄마말씀에 의심이 간다. 그때도 그랬지만 대부분 엄마가 들고 왔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 아무래도 엄마의 술수에 선량한 학생하나가 희생당한거 같다. 것두 두번이나... 에구 불쌍한 사람. 우리엄마한테 찍혔구만. 앞으로 우리엄마눈에 안뜨이기만을 빌어줄께. 그래도 그 착한 학생이라는 사람이 고맙긴하다. 우리엄마 수고들어주어서... 밥을 먹고나서  오랜만에 화장도 하고 정장차림에 버버리코트까지 입었다.

기분전환이다. 내가봐도 모델같다. 립스틱은 바르지 않았다. 분위기 망치기 싫기 때문이다.

학교를 한바퀴 걸었다. 학기말 고사가 끝나 학생이 별로 없는 차분한 분위기의 교정이다. 차운 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이 학교에서 녀석이 캠퍼스추억을 만들고 있었구만. 몇번 와봤지만 오늘은 느낌이 다르다. 도서관엘 갔다.

바코드출입구가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내가 못들어갈소냐? 남학생하나 붙잡고 학생증좀 빌려달랬다. 기분좋게 빌려준다. 들어가서 돌려주었다. 내미모는 학교때 제법 인정을 받지 않았더냐. 호호.

소설책하나를 골라 오랜시간 보았다. 여유롭다. 왜 진작 이런생활을 못했을까? 시간은 자기가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 여유로울 수도 있구나. 졸업하고 너무 마음적으로 여유가 없었던게 별로 하는것도 없이 시간적으로도 여유를 갖지 못했었다. 저녁이 되어 갈무렵 도서관을 나왔다. 혹시나 하며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공대앞에서 커피를 하나 뽑아 마셨다. 후후. 족구금지푯말을 네트삼아 족구를 하고 있는 공대생들을 보았다. 우리학교는 공대가 없었다.

여고생이 남자고등학교에 온듯한 묘한 설레임이 든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두워져 가는 겨울하늘 아래 공대지붕이 걸려있다. 녀석을 못보고 돌아왔지만 마음은 차분하게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다. 만화방불빛이 오늘은 그렇게 초라하게만 느껴지질 않았다. 내일은 만화방을 다시 나가봐야겠다.

 

자취생: 집에 돌아오니 팔에 감각마저 없어졌다. 밥이고 뭐고 귀찮다. 저번에 사다놓은 초코파이랑 박카스로 허기만 때우고 깊은 잠에 빠졌다. 일어나니 해가 꾸역꾸역 지고 있었다. 내창문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빨갛다.

더 자고 싶지만 배가 너무 고프다. 만화방아저씨한테 혜지씨가 내일은 나온다는

말도 전해주어야 된다. 일어나자.

 

12편

 

만화방총각: 저녁의 어둠이 애처롭게 짙어지고 있다. 답답함에 정경이한테 전화를 했다. 전화기속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오늘도 그녀는 일상처럼 그곳에 있었구나. 하하. 녀석이 왔다. 예전에 본 한여름들판의 잡초같이 머리가 엉맘이다. 거울을 안보고 나왔나보다.

"아저씨! 혜지씨가 내일은 나온다고 그러던데요." 무척이나 반가운 말을 들었다. 이말을 들을려고 내맘은 낮부터 그렇게 떨렸었나보다. "근데 무슨 안좋은 일 있었어요? 아프지도 않은거 같았는데... 혹시?" 혹시 뭐? 녀석이 내맘을 알기나 할까? 황당한 소릴한다. "라면 못끓인다고 핀잔 주었어요?" 쿠쿠 생각하는게 자네다와보인다.

"아니에요. 그냥 제가 화를 좀 내어가지고..." 나의 이말을 듣자 뭔가 큰 불만이 있는듯 날 째려보고 간다. 내일은 혜지씨가 나오는구나. 다시 며칠전의 그 밝은 모습속에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오랜시간이 지나버린것 같은 그때의 설레이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음 좋겠다.

 

백수아가씨: 날씨가 많이 춥다. 목있는 니트를 입고 나왔지만 그래도 목이 시리다. 집에 들어가려다 발길을 돌렸다. 털실을 살려고 수예점을 찾았다. 털실은 내가 그것을 멀리하던 사이 엄청 비싸있었다. 이 돈이면 고급 립스틱도 살수 있겠는데... 집에 남아 있는 이달 용돈이 위태하다는 것도 잊고 가지고 온 돈을 다틀어 털실을 샀다.  다시 만화방을 지나쳤다. 털실에 담긴 따스함때문일까? 이젠 초라해져보이지 않는 만화방불빛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자취생: 밖에 나가야되는데 거울을 보니 내 머리가 엉망이다. 머리를 감아야겠다. 물이 너무 차다. 물이 타이타닉이다. 제대를 하고 나서 외모에 대해 많은 자신감이 생겼다. 남들이 느낄땐 객기라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녀는 내일 만화방에 나온다고 했다. 잘보일 사람도 없다. 이대로 나가자. 스웨터를 하나 껴입었다. 늘어난 목. 자취생의 비애다. 아무리 깔끔하게 옷을 입고 있어도 티나 스웨터의 목이 늘어져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자취생이다.

목이 허전하다. 만화방아저씨가 힘없는 표정을 하고 있더니 내말을 듣고 표정이 밝아졌다. 이 아저씨도 혜지씨 찍은거 아닌가? 반반한게 의심이 간다. 하지만 주제를 알아야지. 내가 감히 찍었는데 어디 만화방아저씨 주제에...

’근데 무엇 때문에 그녀에게 화를 냈을까?’

("혜지씨 당신을 좋아합니다. 제 사랑을 받아주세요." "안돼요. 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기 단골로 오는 멋있는 그 자취생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아저씨는 절 포기하세요" "제 맘을 몰라주시다니 너무 합니다. 흑흑. 화. 화. 화!")쿠쿠 만화방아저씨를 쳐다보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기분좋다.

 

만화방총각: 많은 기대감으로 혜지씨를 기다렸다. 오후 세시가 거의 되어서 그녀가 밝지만 어색한 듯한 인사를 하고 들어왔다. 나도 그녀의 모습처럼 어색하지만 밝게 답해주었다. 혜지씨가 카운터안 내 바로옆에서 신간책을 정리하고 있다. 예전처럼 편하게 대하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이안에 있기가 부담스럽다. 그녀도 뭔가 어색하다. "그때는 정말 미안했습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떨리는 음의 내말을 그녀는 "괜찮아요. 그럴수도 있죠. 뭐. 다 잊어버렸어요."라고 그또한 작지만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답을 들으니 여기 있기다 더 부담스럽고 어색하다.  그러던 차에 단골녀석이 들어왔다.

그도 분위기를 느꼈을까? 혜지씨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혜지씨. 나좀 나갔다 올께요." 그녀에게 만화방을 맡기도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갈때가 마땅치가 않다.

 

백수아가씨: 예전처럼 만화방을 단지 아르바이트생으로 가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갈 시간이 다가올수록 내 심장이 빨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만화방에서 이병씨를 보았다. 반가움보다 낯설음으로 다가온 모습이다.

그가 내옆에 어색한 모양새로 약간 안절부절하는 모습이다. 미안하다고 하는 그의 말이 무얼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내 마음속 느낌표로 다가왔는데, 이제는 물음표다. 그가 예전처럼 어딜 가주었음 좋겠다. 그렇게 지금 분위기는 싫다.

단골녀석이 밝은 모습으로 들어왔다. 이병씨와 나의 분위기를 느꼈을까? 그와 나를 번갈아 보고 있다. 이병씨가 헛기침을 한번하며 인사를 하고 나갔다. 만화방문을 나서는 그의 모습이 예전처럼 활기차지가 않다. 힘없고 처량해보인다. 후. 녀석이 이병씨가 나가자 나에게 다가왔다. 자기가 나하고  친한친구나 되는냥 묻는다.

"주인아저씨가 혜지씨한테 화내었다면서요? 뭔일인데요?" 어쭈 이제는 이름까지 부르네. 내이름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아까 이병씨가 던지고 간 인사속의 내이름을 들었나보다. 그냥 저번처럼 나 알아요? 라고 대답해 버릴까? 그러기에는 이녀석 얼굴이 너무 천진난만하다.

"오늘은 이상한 말 안하세요?"

녀석이 머리를 긁적인다. 그렇게 긁적이니 맨날 머리가 그 모양이지. 오늘은 그래도 단정한 편이구만. 녀석이 한참 머뭇거리더니.

"어른들도 누구나 처음엔 어린아이였다. 생떽쥐베리." 쿠쿠 니가 그러면 그렇지. 현상황과는 여전히 맞지가 않구나. 그런데 다음 그가 던진 말이 결코 앞의말이 엉뚱한 말이 아님을 일깨워 주었다.

 

자취생: 오늘은 그녀가 만화방에 있을것이다. 신난다. 물은 여전히 타이타닉이다. 하지만 머리를 감았다. 그러나 면도는 도저히 안되겠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면도를 했다. 음 깔끔해 보이는군. 거울속 내모습이 어제와는 다르다.

만화방에 갔더니 기대한데로 그녀가 있었다. 오늘은 만화방아저씨도 어딜 안가고 같이 있었다. 조금 어색했다.

내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만화방아저씨가 자리를 비켜준다. 이 아저씨 어디가서 밥은 얻어먹겠군. 눈치가 빠르다. 그녀의 모습이 그렇게 밝지가 못하다. 또 안좋은 소리 들었나? 으이씨 내가 기껏 외어서 해준 말들을 그녀는 이상한 말이라고 했다. 아니 선현들의 주옥같은 명언들을... 이제 하지 말까 보다. 그치만 오늘은 뭘까? 하는 저눈동자. 그녀의 기대를 저버릴수가 없다. 근데 어제는 안 외웠는데... 명언은 생각이 나는데 누가 한말인지는 모르겠다. 문득 생각난게 어린왕자였다. 이런말 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지만... 하고나니 그럴싸하다. 오늘 왠지 어두운 빛이 감도는 그녀모습 때문에 한마디 더해 주었다.

"아직은 밝은 표정 잃지마세요."

그녀가 오랜만에 나와서 그럴까? 만화방에 예전처럼 늑대들이 많지가 않았다. 라면 끓여달라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그녀한테 다시가 말을 걸 껀수가 생기지 않았다.

 

만화방총각: 밖에 괜히 나왔다. 엄청 춥다. 갈 곳도 없는데... 분위기 때문에 외투도 걸치지 못하고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추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러다 간 곳은 정경이의 음반점 앞이었다. 정경이의 모습이 비추어지는 유리문이다. 그녀의 분위기가 슬퍼보인다. 내 마음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테지...

그게 아니다. 손님이 없는 음반점안에서 그녀가 글썽거린다. 그모습에 용기를 내어 들어가 보았다. 그녀가 내 모습을 보더니 눈물을 훔친다. "응? 이병이구나. 요며칠 왜 안왔어?" 참내. 자기가 오지 말라고 해놓고선.. 하지만 그 답이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비록 울음섞인 말투였지만...

"술한잔 할래? 내가 한잔 살께"

"술? 지금? 가계는?"

그녀가 가계는 괜찮다는 듯... 날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가계문을 닫고 정경이와 나는 근처 작은 칵테일바로 들어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스트레이트 몇잔 들이키더니, 말이없다. 한참뒤 대뜸 내뱉은 소리는 "그가 새장가 간데."였다.

"요즘 찾아온것도 이거 줄려고 했던 거였어."

정경이가 보여준것은 청첩장이었다.

"누군데? 새장가는 또 뭐야?"

"내 전남편." 내가 뭘 잘못했다고. 꼭 나한테 따지듯 말했다.

"난. 그래도 날 못잊었다며 찾아온 그가 진심인 줄 알았는데... 결혼한다는 말을 못해서였다는 걸 오늘이야 알았어."

뭐야 그놈. 그냥 새장가 들려면 모른척 가버리면 되지...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잘가라. 정경이가 또 한동안 아무말 없다. 그냥 앉아서 조용히 몇잔 더 마셨다.

"일어서자."

정경이 눈치를 살피며 홀짝홀짝 하던 나는 그냥 아까 술집에 끌려 올때처럼 또 끌려나와야 겠다. 시간은 생각보다 많이 흘러 있었다. 아홉시가 다되었다. 정경이가 자기집이 예근처인데 바래다 달랬다. 물론 바래다 주지. 암... 그녀 집은 근처의 그리 크지않은 오피스텔이었다. 문앞까지 왔다. 열쇠를 따고 정경인

"잘가."

라는 인사만 남기고 바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그 문앞에 약간은 멍한채 몇분간 서 있었다. 오늘 정경이가 자기 기분데로 날 대했다. 그렇지만 내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정경이가 안되어보였다. 그래 잘갈께. 너도 잘자라. 돌아갈려는데 문이 열렸다.

"안가고 있었네? 들어와서 차한잔 하고갈래?"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러면 기분데로 뭔 일을 저지를것도 같다.

"아니야. 만화방일 때문에..."

"만화방?" 아차 실수했다.

"아 저번에 말한 도서사업이라는게 만화방이야. 하하. 그럼 나 갈께."

등을 돌려 발걸음 떼었다. 아직 문을 닫지 않고 있는 그녀 방의 불빛이 오피스텔복도에 비치고 있다.

"이병아. 내일도 올거지?"

그녀의 그말에 내 입술에 미소가 맺혔다.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만 흔들었다.

"그래. 잘자."

"내일 꼭 와야돼. 나. 지난 일년동안 너무나 외로웠었어..."

그녀의 독백같은 작은 목소릴 들었다. 뒤돌아 그녀한테 달려가고 싶었지만... 오늘 만화방에서처럼 어색한 후회를 하긴 싫다. 급히 만화방으로 갔다.

혜지씨는 카운터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는 모습에 뜨개질하던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올때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었는데...? 만화방안을 둘러보았다. 단골녀석이 아직도 있다. 만화책은 보지 않고 난로옆 만화방등받이 의자에 기대어 곤하게 자고 있었다. 만약 계속 있었다면 지금이 열시니까.. 여섯시간정도 만화방에 있었던게 된다.

단골녀석과 혜지씨가 같이 나갔다. 나가는 그 둘의 모습이 서로 아무말없었지만

동화처럼 정답게 느껴진다.

 

백수아가씨: 단골녀석이 들어와서 한마디 하고 난후로는 아무말이 없다. 나도 굳이 그를 불러 말시키고 싶지는 않다. 오랜만에 왔더니 만화책 볼것도 많아서 좋네 뭐. 그런데 만화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털실이나 가져올걸 그랬다. 뜨개질이나 하는건데... 단골녀석을 불렀다. 잠깐동안만 만화방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집으로 털실을 가지러 갔다. 만화방에 돌아왔더니 녀석이 라면을 끓여 손님한분에게 갖다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웃음짓게 한다. 내가 온것을 보자 다시 여기로 오지 않고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막상 짤려니까 뭘 짜야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시작은 해보자 맘에 안들면 다시 풀면 되니까... 만화방안이 따뜻한게 아늑하다. 손님도 더 이상들어 오지 않는게 뜨개질하기에는 너무나 좋은 환경이다. 그리고 녀석이 여기 있다는 느낌이 또한 좋다. 한참동안 뜨개질에만 열중했다. 목이 조금 아프다. 고개를 들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 녀석이 갈 생각을 안하네? 녀석을 찾았다.푸하하..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예 이부자릴 깔아라 깔아.

기도하는 듯 두손을 가슴에 얹고 의자에 기대어 녀석이 잠들어 있다. 이털실처럼 푸근한 느낌으로 녀석이 만화방안에서 자고 있다. 곤한 녀석의 모습을 괜히깨워 돌려보내기가 싫다. 다시 뜨개질을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배가 고프다. 손님들이 하나둘 나갔다. 아직 그는 일어날 생각을 안한다. 거의 열시가 되어서 이병씨가 돌아왔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의 말투는 낮에처럼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술냄새가 났다.

그가 단골녀석을 보더니 나보고 "깨울까요?" 라고 물어보았다. 저녀석 깨우는데 왜 나한테 물어보는걸까? 만화방을 녀석이 부시시한 모습으로 나를 따라나왔다. 이병씨가 녀석한테 만화요금을 받지 않았다.

집으로 오는 길에서 나는 일부러 빨리 걷지를 안했다. 녀석이 나를 지나쳐 앞서 가기를 바랬지만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신경이 쓰인다. 녀석의 뒷모습이 보고싶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녀석이 하품을 하다가 놀라 입을 손으로 가린다. 골목이 나뉘는 부분에서도 녀석은 아무말없이 녀석의 골목쪽으로 사라졌다. 아직 잠 덜깼나?

늦은밤 저녁도 안먹고 배는 고프지만 그냥 잠들어야겠다. 녀석이 오늘 한말 때문에 괜히 다시 일어나 불을 켰다. 그리고 유치원 앨범을 꺼내 보았다. 그앨범에 최혜지란 꼬마아이가 수줍은 듯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내가아닌냥 그립다. 그날 난  머리맡에 유치원 앨범을 놓아두고 잠이 들었다.

 

13편

 

자취생: 그녀가 나보고 만화방을 봐달라고 했다. 신났다.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보았다. 따뜻하다.   더 앉아 그녀생각을 하고 싶었는데 수능끝난 고등학생이 라면을 끓여 달랬다. 얌마! 집에가서 공부나 해. 시험끝났다고 저렇게 바로 노는 놈들이 꼭 대학가서도 바로 학고 먹어요. 명언집이나 사서봐라. 그렇지만 끓여 줄 수밖에. 그녀가 곧 돌아왔다. 뭘 들고 들어왔다. 그녀가 만화방안 한 모퉁이에서 뜨개질을 시작했다. 뜨개질이라?

참 오랜만에 느끼는 어린날의 정감처럼 그리웠던 모습이다. 어릴적 나는 엄마가 짜준 털실조끼로 겨울의 찬바람을 이겨냈었다. 무얼짤까? 고개를 숙이니 늘어난 스웨터목안으로 내하얀 속살이 보인다. 저게 내 목돌이였음 좋겠다. 그녀가 짜준 목도리라면  엄마의 입김처럼 포근할 것만 같다. 만화방이 따뜻한게 좋다. 그리고 그녀가 여기 있다는 그 사실이 또한 좋다.

잠이 온다. 일어났을때 내눈앞에 만화방아저씨가 미소짓는 모습이 들어왔다. 술냄새! 그러나 그의 모습은 오후의 모습과는 다른 평온함이 있다. 시간티켓을 보니 만화비가 만원가까이 된다. 큰일났다. 천원짜리 석장뿐인데... 다행히 아저씨가 돈을 받지 않았다. 단골혜택을 받았다. 그녀가 집에 간다. 쪽팔린다. 도대체 만화방에서 몇시간을 잔거야? 그녀가 날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이 간다.

나가다 거울에 비친 내모습을 보았다. 부어오른 내얼굴위로 뒷머리가 놀리듯 서 있었다. 거울의 내 모습은 앞서가는 그녀옆을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가 오늘따라 지독히 천천히 걷고 있다. 따라잡아 말아? 하품이 날정도로 천천히 걷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뒷모습은 오늘 잠처럼 편안하다.

그렇게 자고 집에와서 또 잤다. 시험기간의 피로가 이제서야 찾아왔나보다.

 

만화방총각: 정경이의 외롭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 외롭다는 말을 내 모습으로 지워주고 싶다.  다시본 정경이의 모습은 애처로왔지만 내 답답함을 걷어내 주었다. 음반점을 계속 찾아갔었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그녀의 오피스텔에 들어가지 않았던 건 잘한 일이다.

곤히 잠들고 있는 단골녀석을 바라보던 혜지씨의 눈동자가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그 단골녀석의 뒷모습또한 묘한 여운을 주었다. 이제 혜지씨 이름뒤에 찍었던 물음표는 지워야되겠다.

 

백수아가씨: 오늘도 날씨가 춥다. 목이 참 시리다. 털실로 내 목돌이나 하나 짜야겠다. 만화방에서 이병씨의 태도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얼마전처럼 밝은 뒷모습으로 만화방을 나갔다.

내일은 만화방 한달째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비가 나온다. 기쁘다. 시험이 끝나서인지 만화방에 예전처럼 사람이 많지가 않다. 여기 찾아왔던 사람들이 근처 하숙생이나 자취생이었나보다. 모두들 집에 내려갔음직 하다.

단골녀석이 찾아왔다. 반가운 얼굴이다. 아무말없이 만화책만 보았다. 그가 나한테로 다가왔다. 또 무슨 말하려나?

오늘은 무슨말할까? 궁금하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천오백을 주었다. 무슨 의밀까? 하하. 녀석이 카운터안으로 들어오더니 싱크대로가 라면을 끓일려고 한다. 그럼 이돈은 라면값? 아이씨. 내가 끓인 라면이 그렇게 맛이 없었단 말이야?

 

자취생:  마지막으로 원서넣은 회사 면접날이 한달 후로 잡혔다. 뭘 좀 준비해야 겠다. 그러나 일과처럼 만화방을 찾아갔다. 그녀가 어제처럼 뜨개질을 하고 있다.

오늘은 말걸기가 힘들겠다. 라면이나 하나 끓여달라고 할까? 하지만 뜨개질하는 그녀의 지금 모습을 깨트리기가 싫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가 끓인 라면을 먹을 자신도 없었다.  돈만 내고 내가 라면을 끓일려고 했다. 나에게 이런 배짱이 생기다니, 다른여자 같으면 어림도 없을텐데 왠지 그녀는 나의 이런행동에 화를 낼것 같지 않아보였다. 라면을 끓이고 있는데 그녀가 내 옆으로 왔다. 어라 화낼려고 그러나? 그러나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건냈다.

"물을 이정도로 맞추어야 하나요?"

하하. 자기도 라면 못끓이는 줄은 아나보다.

"하나만 끓인다면요."

"그럼 두개는요?"

참내 이정도 물만 더부으면 되지. 냄비에다 물을 더 부었다. 라면두개를 넣었다.

"한번 먹어봐요."

그녀가 내가 조금 집어준 라면을 받아서 먹었다. 하하 이러니까 꼭 연인같잖아. "아직 생라면같은게 씹히는데요."

"이때쯤 계란을 풀고 바로 불을 꺼세요."

"아직 덜익은것 같은데."

"불을 꺼도 뜨거운 물에 라면은 계속 익고 있어요. 다른 준비를 하다보면 적당하게 익을겁니다."

라면을 그릇에 담았다. 꿈처럼 그녀와 함께 그녀곁에서 라면을 먹었다. 맛있게 라면을 먹고 있는 그녀가 이제는 단지 내가 찍어논 여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님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만화방총각: 혜지씨가 만화방에 왔다. 어제처럼 어색하지가 않다. 편안한 소녀의 느낌으로 혜지씨는 미소 짓고 있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혜지씨에게 만화방을 맡기고 믿음이 가는 설레임으로 음반점에 갈 수 있었다.

어제의 느낌과는 다른 오랜 친구같은 정경이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고 싶은 내마음은 이제 옛추억을 그리는게 아니라 지금 정경이의 모습을 품어주고 싶다.

 

백수아가씨: 녀석이 지금 라면을 끓이고 있다. 건방져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곁에 다가가고 싶었다. 녀석이 지금 자기가 끓인 라면을 먹고 있다. 나와함께... 맛있다. 억양과 라면 잘끓이는걸로 봐서 자취생인거 같다. 녀석 스웨터의 목이 많이도 늘어나 있었다. 풋! 조금 춥겠다.

 

자취생: 아주 기쁘고 또한 설레이며 집으로 돌아왔다. 배도 고프지 않다. 집에서 전화가 왔다. 시험도 끝났다면서 서울에 왜 있냐고 한다. 내일이나 모래쯤 집에 내려오라고 했다. 안되는데... 이제 막 잘되어갈려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아버지의 명을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으랴. 그리고 너무 추워서 안되겠다. 겨울옷도 가지고 오자. 길어야 일주일인데 뭐.

 

만화방총각: 정경이와 좋은 시간을 가졌다. 들어오는 손님들이 찾는 음반을 모르지만 열심히 찾아다 주었다. 격렬하지만 잔잔하고 또한 애절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좋다. 정경이한테 물어보았다.

"이음악 제목이 뭐야?"

"쿠쿠. 전에 네가 찾았던 그 지고이네르바이젠(ZIGEUNERWEISEN)이잖아."

에고 쪽팔려라. 하지만 무심결에 말했던 그 사소한 것도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이 마음을 따스하게 했다.

 

백수아가씨: 녀석은 많이 설레이지는 않지만 친근한 느낌을 준다. 이병씨에 대한 설레임보다 이제는 녀석의 순박한 친근함에 더 맘이 가버렸나보다. 뜨개질을 하고 있는 내 맘에 녀석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길고 하얀 그의 목...

 

자취생: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와 있었다. 눈길을 헤치며 그녀 집앞으로 달려가 보았다. 아침 일찌기 누군가 이길을 걸었나보다. 나왔다 들어간것인지. 들어왔다 나온건지 같은 크기의 발자욱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녀 집에서 누군가 나온다. 피해야 된다. 그녀 어머님이면 또 뭔가 힘든일이 생길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그러나 나온사람은 전에 나를 아는척 하셨던 혜지씨의 아버님이었다. 또 인사를 했다.

"어. 그래. 열심히 해. 다음에 봐"

이상하네? 꼭 날 아는 사람처럼 대하신단말이야. 혹시 그녀가 나에 대한 얘기를 했나? 도저히 궁금해 안되겠다. 아버님을 뒤쫗아 갔다.

"저기 선생님."

"나 말인가?"

"예. 혹시 저를 아십니까?"

"아니. 자네도 날 모르나?"

"아 그런건 아니지만. 전 그냥 같은 동네 아저씨라서 인사한건데"

"그럼 된거 아닌가. 내가 잘모른다고 해서 인사하는 자네에게 자네 누군가? 이러면 자네 기분이 별루겠지?"

"예."

"그럼 출근 때문에 바빠서. 다음에 보세."

하하. 괜찮은 분이시네. 그런데 혜지씨는 나 알아요?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만화방총각: 눈이 왔다. 만화방눈앞을 깨끗이 쓸었다. 날씨가 추운게 곧 녹을거 같지가 않다.

 

백수아가씨: 새벽부터 누가 날 깨우는거야? "나다. 니에미"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여섯시다. 정수기 필터나갔다며 이런 새벽에 나보고 생수 사오랜다. 서러운 내 신세야. 혜철이가 만약 백수되면 이렇게 하지는 않겠지? 춥지만 양말신기도 그렇다. 외투하나만 걸치고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 야! 눈이다. 밖은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길이 펼쳐져 있었다. 찍히는 내 발자욱을 보며 걸었다. 선명하게 내 발자국들이 나를 따라오고 있다.

다시는 이런짓 안할껴. 동상걸렸나봐. 방에 들어와 내 발을 보니 너무 안스럽다.

감각도 없다. 일찍일어나서 아빠 출근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았다.

"아빠. 잘다녀오세요."

 

자취생: 내일은 집에 가야되는데... 어제 그녀와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야하는데... 그냥 집에 내려가면 다음에 또 서먹해질텐데...  뭔가 기억에 남는 선물하나 주고 내려가고 싶다. 맞다! 그녀가 요즘들어 립스틱을 바르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새빨간 입술이 그립다. 빨간 립스틱하나 선물해야겠다.

"어머니한테 선물하시려나 봐요?"

"아닌데요. 제또래 아가씨한테 선물하려고..."

"이 색깔은 아줌마들이나 찾는건데..."

"그래요?"

"애인한테 선물할려면 이 색깔로 해보세요. 요즘 제일 잘나가는 색이에요."

화장품가게 아가씨가 거무죽죽한 립스틱을 하나 건넸다. 별로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애인이라고 하는 말 때문에 그걸 사고야 말았다.  립스틱이 생각보다 비싸네. 그녈 생각하며 적은 쪽지와 함께 포장을 했다. 너무 작다.

 

만화방총각: 내 소설을 거의 완성시켰다. 누군가에게 한번 보이고 싶다. 그래 이공책 때문에 혜지씨에게 어설픈 키스를 했었지. 혜지씨한테 사과하는맘으로 먼저 보여줘야겠다. 언제가 좋을까? 내가 약간 수정을 하고 괜찮다싶으면 이번주라도 보여주어야겠다. 그녀가 이걸 안본다고해도 내마음이 상처받을거 같지는 않다. 소설속에서처럼 정경이와 나는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밖에 쌓인 눈처럼 내마음이 여유롭다. 혜지씨에게 그동안 급료를 계산해서 봉투에다 넣었다. 그녀가 이걸받고 예전처럼 맑게 기뻐했으면 좋겠다.

그녀가 봉투를 받고 참 기뻐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서 내가 하고픈 부탁을 들어줄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백수아가씨: 드디어 내 월급을 받았다. 돈을 처음 벌어본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기쁠수가 없다.  어색했던 이병씨가 이제는 그렇지가 않다. 잘쓰겠다며 가뿐하게 받았다. 내생활에 도움이 되겠다. 그동안 모아논 돈이 요즘들어 자꾸 줄었었는데... 호호 립스틱하나 사야겠다. 유행따라가며 립스틱 바른지가 언제쯤이었을까?

이병씨가 나가고 조금뒤에 녀석이 들어왔다. 즐거운 내마음을 녀석은 모르는 듯 다른날보다 굳어있다. 녀석이 카운터를 한손으로 내리쳤다. 쿠 또 무슨말 할려나보다. 유심히 듣자. 녀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웃음이 나올까?

"선물이오."

그가 조선시대 남정네처럼 말했다. 선물? 어디?  그의 내리친 손을 보았다. 펼친 그의 손에 조그맣게 포장된 무엇이 있었다. 얼마나 봤다고 벌써 선물이냐? 근데 뭘까? 조심스럽게 그의 손바닥에 놓여 있던 선물이란걸 잡았다. 녀석 손의 감촉이 바깥바람처럼 차가왔다. 내가 선물을 받아 들자, 또 머리를 긁적이더니

"일주일쯤이나 뒤에 봅시다."

라는 말을 남기고 횡하니 나가 버렸다. 어디가나? 내일은 안올려나? 기대하는 맘으로 포장을 뜯었다. 쪽지가 있었다.

"언젠가부터 당신의 입술은 누드였습니다. 단골소년"

완전히 아저씨같은 놈이 소년이란다. 참내.. 선물은 립스틱이었다. 색깔을 보니 요즘 유행하는 색깔이다. 묘한 느낌이 왔다.  어떻게 내가 립스틱살려고 했던걸 알았을까? 그런 그가 오늘은 괜시리 사랑스럽다. 바로 거울을 보고 발라보았다. 거울에 비친 내모습이 화사하다. 이병씨가 와서 조금 부끄러운 듯한 어조로 "입술이 참 예뻐졌네요."

라고 말했다.

"그래요? 정말 예뻐 졌어요?"  "

예. 정말 예쁘네요. 참 내일은 하루 쉽시다."

집에 와서 녀석이 준 립스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내 화장대 한쪽에 고이 세워놓았다. 밤에 난 녀석을 생각하며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꼭 그의 목도리를 만드는 것처럼...

 

자취생: 바깥 날씨가 차가왔지만 그녀에게 줄 선물을 쥔 손은 포켓에 넣지 않았다. 오늘 그녀 손을 처음 느껴보았다. 단지 두손가락만이 내 손바닥에 다았지만 그 느낌은 혜지씨에 대한 내마음과도 같이 따뜻했다.  맘에 들지나 않았을까?

 

만화방총각: 이제는 내 맘이 완전히 정경이 쪽으로 가고 있다. 정경이에 대한 내맘은 불안하지 않지만 석연치 않은 무언가가 있을거 같은 느낌이 온다. 내맘에 그녀를 이제 내여자로 만들고 싶다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또 조금씩 불안해져 온다.

만화방에 가보니 혜지씨가 무척이나 즐거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 미소를 머금은 입술이 아까와 다르다. 림스틱을 바른 입술이다. 그녀의 분위기와 너무 잘어울리는 색깔이다. 오늘밤은 집에 들어가서 자야겠다. 그리고 내일은 모처럼 하루 쉬자.

 

자취생: 짐을 다 챙겼다. 한쪽어깨에 조금 크다싶은 가방을 메고 자취방을 나섰다. 아직 녹지 않은 눈들 때문에 걷기가 부담스럽다. 만화방을 지나쳤다. 만화방문이 닫혀 있다. 오늘은 만화방이 쉬는가벼. 저기 길 멀리서 낯설지 않은 두사람이 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만화방총각: 아침에 식사를 하는데 어머니의 말이 내 마음속 석연치 않았던게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너도 장가를 보내야 할텐데. 조건 좋은 여자가 있는데 선한번 볼래?"

"아직은 싫어요. 연애해서 갈거란 말이에요."

농담처럼 대답했지만 뭔가 어려운일이 닥칠것만 같다.

 

백수아가씨: 오늘은 만화방에도 안나가고, 립스틱은 한번 발라보고 싶은데, 집에서 립스틱 바르고 있으면 울엄마가 또 뭐라 그러시겠지. 오늘 우리엄마가 왜 그러실까? 내 옷한벌 사줄테니 백화점 가자고 그랬다. 이쁘게 차려입고 또 이쁘게

화장했다. 그리고 녀석이 준 립스틱을 발랐다. 야! 괜찮은데...!

꽤 비싼옷인데 엄마가 두말않고 사주셨다. 혹시 시집보낼려고 그러는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 옷 싫어? 다시 돈으로 바꿀까? "  

아무생각없이 그냥 입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근한 누구를 만났다. 그런데 큰일이다. 옆에 우리엄마가 있다. 녀석이 아는체라도 하면 우리엄마 성격에 녀석이 누군지 삼일은 물어대실게 틀림없다. 한쪽 어깨에 큰 가방이 들려있다. 진짜 어디를 가나보다. 녀석이 선물한 립스틱 바른모습을  하루도 못가 들키고 만게 조금 쑥스럽다. 기어이 녀석이 아는체를 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옆에 엄마 때문에 조금 머뭇거렸다.

"어. 그때 눈길에 넘어졌던 학생이네. 반가워."

"예. 요즘은 약수물 받으러 안가세요?"

뭐야? 왜 우리엄마하고 녀석이 친한척하지?

"호호. 무거워서...   근데 어디가나보지?"

"예. 방학이라 집에 가는길이에요."

"아. 진주가는구나. 참 내 딸이야."

"예. 에... 안녕하세요."

녀석이 모르는사람처럼 나에게 인사를 했다. 조금 기분이 그렇다. 나도 처음만나는 사람처럼 인사를 했다. 녀석 집이 진주에 있었구나.  진주면 내가 어릴때 살았던 곳이다. 동향녀석이네.

"그럼 저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녀석이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지나쳐 멀어져간다.

"엄마 누구야?"

"응. 쌀가마니하고 약수통 들어준 학생인데 참 착한거 같애."

하하. 녀석이 엄마가 말하던 바로 그 착한학생이었어? 엄마는 녀석의 이름을 알고 있음직하다.

"몇살인데?"

"92학번이면 몇살이냐?"

"엄만 내나이도 모르세요?"

"아. 너도 92학번이지."

"이름이 뭔데?"

"너 관심있니?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안물어봤네."

과연 우리엄마다우시다. 바로 고개를 돌려 제법 멀리 걸어간 녀석을 다시 불렀다. 녀석이 뭔일인도 모른채 종종걸음으로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내가 물어볼게 있어서. 미안해. 괜찮지?"

"예."

"이름이 뭐야?"

"예?"

녀석이 나를 물끄러미 한번 쳐다보았다. 뭐해 빨리 말하지 않고.

"예. 이현재라고 합니다."

 

14편

 

자취생: 오늘은 모르는 사람처럼 그녀 곁을 지나쳐 갔습니다. 그녀 눈에 맺힌 내 모습이 무척이나 반가왔지만. 애써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쳐야 했지요. 제가 선물한 것이 아닌것 같은 그녀의 이쁜 입술색을 보았습니다. 아마 제선물이 싫어나 봅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제 이름을 물어봅디다. 그녀가 제 이름을 물어보길 바랬지만, 이제 그녀도 제 이름을 알았을겁니다. 하지만 아직 그녀와 난 타인사이였습니다. 마냥 모른척 지나쳐가다가 잠시 뒤돌아 봤지요. 미끄러워 부담스럽던 그 눈길을 그녀는 참 빨리도 걸어가버렸나봅니다. 길은 그저 길만의 모습이었기에...

 

만화방총각: 집을 나와 정경이의 음반점을 찾아갔다. 문이 닫혀있다. 어디 갔나? 전화를 해보았다. 가게도 집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디 갔나보지 뭐. 만화방에 돌아왔다. 이 만화방의 생활이 별로 길지가 않을 것 같다.

 

백수아가씨: 아이구 엄마 좀 조심하지 그랬어. 엄마를 한쪽골목으로 부축했다. 아까부터 눈길이 미끄럽더니만 결국 엄마가 넘어지셨다. 별로 심하게 넘어지지도 않았는데 많이도 아픈척 하신다.

저녁이 되어서 그게 엄마의 작전이었단걸 알 수 있었다. 우쒸 다리긁힌거하고 저녁상 차리는거하고는 무슨 상관이람. 오늘 저녁상은 엄마가 조리만 해준 국이랑 밥이랑 모조리 내가 차려야 했다. 그래도 오늘 엄마가 겨울옷한벌 기분좋게 사주셨다. 다음에 제가 돈벌면 저도 옷한벌 사드릴께요.

녀석이 내 어릴적 추억이 있던 곳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첨부터 친근한 무엇이 있었나보다. 나이도 나보다 한두살 많은줄 알았는데 동갑이었다. 이름도 알았다.

이름마저 낯설지 않았다.

밤에 자면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이현재, 이현재...?  내 마음속 오랜시간 지워지지않고 숨쉬고 있는 이름이 떠올랐다.  유치원 앨범을 꺼냈다. 동그라미 쳐진 사진밑에 선명하게 이현재라고 쓰여있다. 어찌보면 닮은 것도 같다. 특히나 진주사람. 나하고 나이도 같다. 설마?  아니겠지. 그런 영화같은 우연이 어디있어. 하지만 이상하게 녀석이 이 사진의 주인공일수도 있다는 생각은 커져만 갔다.

 

자취생: 집에 와 하룻밤 묵었다. 방이 장난이 아니게 따뜻했다. 기분좋다. 더운물도 막 나온다. 그리고 내 방에는 없던 가족의 웃음이 있었다. 그래 여기가 내 집이다. 내일은 친구들도 만나야겠다. 부모님은 대학원을 가라고 하신다. 하지만 이제 나도 사회로 나가고 싶다.

 

만화방총각: 밤이 되어서야 정경이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많이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예전처럼 싸늘하지는 않았다. 내일은 자기가 찾아온다며 만화방위치를 알려달라고 했다. 내가 간다고 말했지만, 내일도 가게를 열기 싫다면서 자기도 한번 내가 숨쉬는 곳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라 그럼.

 

백수아가씨: 오전 내내 녀석이 혹시 내 첫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붕떠 있었다. 첫사랑은 그냥 마음속에 묻어야 그때의 느낌을 잃지 않는다고 하던데... 소중한 내 추억이 깨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녀석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훗 천진난만하게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쩌면... 만화방에 왠 여자가 이병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병씨가 날 아는체 하자.

그제서야 그녀가 나한테 눈인사를 보냈다. 성깔있어 보인다. 이병씨가 그녀가 바로 정경씨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이병씨 마음에 어떤 모습의 느낌표일까? 내가 오자 그 둘은 이병씨의 방으로 들어갔다. 유심히 그녀의 입술을 보았다. 딴짓이라도 하면 금방알아챌 수 있도록 그녀 입술의 루즈선을 똑똑히 기억했다.

뜨개질이나 하자. 뜨개질을 하고 있는데 , 그녀석 목이 자꾸 생각이 난다. 목도리폭이 내가 하기엔 너무 커져 있었다.  내가 왜 이럴까? 정경씨가 나가며 또 차분한 눈인사를 보냈다. 나도 차분하게 미소를 지어보여주었다. 들어갈때와 똑 같은 입술로 그녀는 미소짓고 만화방을 나갔다. 그녀를 마중나간 이병씨의 들어올때의 모습은 기분이 좋은가보다.

 

자취생: 일어나니 아버진 출근을 하셨다. 엄마가 고생했다며 곰탕을 끓여 놓으셨다. 구수한게 속이 시원하다. 오늘은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친구들은 내일 만나야겠다. 밤에 그녀 생각을 해보았다. 다시 서울가면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다가올까? 며칠 비운 서울처럼 한동안 낯설은 모습으로 들어올까?

 

만화방총각: 점심이 좀 지나서 전화도없이 그녀가 찾아왔다. 만화방찾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텐데...

"꽤 큰 만화방이네."

"응.."

"좋아 보인다."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혜지씨가 들어왔다. 약간 놀라는 눈치다. 그럴수도 있겠지.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에 모르는 여자가 앉아 있으니. 소개를 해주었다. 정경인 내입을 통해서 혜지씰 알고 있었고, 혜지씬 내 공책을 통해서 그 이름을 보았을것이다. 그런 둘이었지만 가벼운 눈인사만 오고갔다. 혜지씨에게 이 자리를 넘기고 정경이와 난 방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네가 자는 방이야? 남자치고는 깨끗하다."

"하하 그래?"

"별로 재밌는게 없네."

"밖에 만화책 많이 있잖아. 하하"

한참 그러다. 어제는 왜 가게문을 안열었냐고 물어보았다.

"응. 내 남편 결혼식장에 갔었어."

무덤덤히 말하는 그녀의 대답이 썩 달갑지 않게 들렸다.

"신부가 참 예쁘더라. 훗... 이젠 그 남자 완전히 정리했어."

이번 대답은 내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항상 전남편을 얘기할때 남편이란 호칭을 빼지 않던 그녀가 오늘 처음 그 남자라고 말했다.

"왜? 너도 시집가고 싶어?"

"아니. 그냥 이대로 살래."

"시집가라. 그래야 그사람한테 너도 청첩장 보낼수 있잖아."

"풋. 왜 좋은 사람이라도 있어.?"

"...어... 나는 어떨까?"

"너? 호호 농담이라도  고맙다."

"씨. 농담 아닌데..."

한동안 대화가 끊어졌다. 잠시 다른 말 몇마디 하고 그녀가 작별인사를 했다.  정경이가 가벼운 눈인사를 혜지씨에게 남기고 만화방문을 나섰다. 멀리 배웅하려고 했는데, 들어가라고 한다. 요전의 집에 가라고 했던것처럼 차가운 어투였지만 얼굴엔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럼 잘가.."

"그래 내일봐. 후후 아까 그 농담 기분은 참 좋았었어. 안녕"

그녀의 인사는 내맘에 차갑게 느껴졌으나 또한 용기를 심어주었다.

 

만화방아가씨:어젯밤에 유치원 앨범을 유심히 살폈다. 뭔가 단서를 잡기위해서... 그러나 그러기에는 앨범이 너무 낡아 있었고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녀석이 서울에 있으면 물어라도 볼텐데... 오늘 오전은  가을날 바람에 소근거리는 단풍처럼 내맘이 떨고 있다. 쉼호흡을 크게 한번 했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전화기 옆에는 유치원 앨범의 주소란이 펼쳐져 있었다.

"이번호는 결번이오니 다시한번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This call number

is...."

쿠.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걸까? 20년 가까이 지난 번호를 지금 눌러서 뭘 어쩌겠다고... 이사를 가도 벌써 갔겠지. 그래도 녀석은 그곳에 살고 있을것 같은 느낌이 항상 들었었는데... 괜한 짓을 했다.

유치원 앨범을 천천히 넘겨 보았다. 칠대삼 가르마에 한꼬마가 그또한 뭔가 수줍은듯 입만 웃고 있었다.

천천히 한장한장 앨범을 넘겨 보았다. 모두들 기억에 잡히지 않는 모습들이다 그렇게 한장 한장 넘기다보니 다시 주소란까지 넘겨져 버렸다. 2-**** 가만 요즘 단자리 국번 쓰는 곳이 있나? 뭔가 또 설레임이 왔다. 전화기를 들었다. 0591-114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교환원 ***입니다."

"저기요. 2국이 몇번으로 바뀌었나요?"

"예? 지금 장난하세요?"

"아니 진짜 몰라서 그러는데요..."

"참내... 2국은 12년전에 41국으로 바뀌었고요. 41국은 2년전에 741국으로 바뀌었어요. 앞으로 이런전화 하지마세요."

딸깍.. 대게 불친절하네. 다시 크게 호흡을 하고 번호를 눌렀다. 아. 통화가 간다. 짧은 시간동안이었지만 이 통화음이 참 크고도 길게 내 귓가에 울려퍼졌다.

딸깍.

"여보세요?"

억양이 강한 경상도 아줌마의 목소리다.

"여보세요. 혹시 거기가 현재네 집이 맞나요?"

"우리 아들인디... 누구세요?"

"예? 맞아요? 전 친군데요."

"친구? 이놈이 아침부터 당구친다고 나가버렸는데.."

"...저.. 그럼요 혹시 현재가 언제쯤 서울 올라간다 하던가요?"

"아. 서울친구구만. 아마 모래쯤 올라갈랑가? 아직 잘모르겠는데."

"저기요 혹시 현재가 **대학 기계공학과 다니는 거 맞죠?"

"맞는데. 학교친구가 아닌가봐?"

"..예.. 아니에요.."

"바쁜일이면 헨드폰번호 가르쳐줄까. 이놈이 지애비 핸드폰을 몰래 들고 나갔네."

"예? 아니에요.."

"그럼 나중에 다시하던가."

"예. 나중에 다시할게요. 안녕히계세요."

하하. 내 첫사랑은 추억이 되어 추억만으로 남을것 같은 그곳에 여전히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첫사랑은 바로 나의 옆에 우연처럼 아무것도 모른채 다가와 숨쉬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사이 무수한 기억들이 지나쳐졌지만 그걸 모르시는듯 그의 어머닌 태연하게 내 가슴떨림을 일상의 한부분처럼 받으셨다.

 

15편

 

자취생: 한판 붙었다. 그건 차라리 혼신을 다한 필사의 사투였다. 녀석의 삑사리에 웃음이 나왔다. 침착하자. 공이 이쁘게 모였으나, 각이 얇다. 내리찍기를 할수 밖에 없다. 그게 성공한다면 적어도 서너개정도는 가볍게 몰아칠수 있다. 그리고 쉬운 쓰리가락으로 게임 끝. 3대0에서 4대3의 기적같은 역전을 할 수 있다. 폼을 잡았다. 녀석의 견제 동작이 들어왔다.

"아저씨! 150이 맛세 찍네예."

픽... 얼라이요? 삑사리! 녀석에게 너무 좋은 공을 주었다. 녀석이 내리 아홉개를 쳤다. 독한놈. 그리고 50도 코후비며 친다는 기본우라가 떴다. 게임 끝이었다. 두시간에 걸친 사투는 결국 나의 패배였다. 으... 삑사리가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불알과 우라는 주지말라. 그런데 난 그 두개를 동시에 주고 말았으니...나의 패배를 인정했다. 녀석이 또 전화를 한다.

"내다. 내 또 이깄다. 오늘 저녁사줄테니 나와라."

"애인있는 놈은 조오~겄다!"

비꼬듯 말했다.

"배아프면. 너도 만들어 임마."

친구애인과 함께 저녁을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과 과일을 먹으며 비디오를 한판 때리고 있는데, 어머니의 눈초리가 수상쩍다.

"니, 서울에서 여자 사귀제?"

어머니의 뜬금없는 질문을 받았다.

"와. 사귀모 어때서..."

아버지도 거드신다. 아직 영문을 모르겠다.

"오늘 서울에서 어떤 여자한테서 전화가 왔데이. 서울에서 여기로 전화할 정도면 사귀는 여자아니겠냐?"

"자식이 날 닮아서 인기는 좋구만!"

누가 나한테 전화를 해? 서울에서 나한테 전화할 여자가 있나? 혹시 여기 친구들이 장난친거 아닌가? 지난 설날에도 한번 우리집에 (어머님. 안녕하세요. 저 현재 애인인데요. 현재 내려왔죠? 제가 미안했다고 말좀 전해주시겠어요. 새해 복많이받으세요.)라는 전화가 와가지고 낭패를 당한적이 있었다. 그때는 요 앞동네에서 찍은 여자한테 퇴짜맞고 괴로움에 몇마디 한걸 녀석들이 바로 놀려 먹은거였었다. 그때는 용이 애인의 짓이었다.

"엄마. 혹시 서울말이 어눌하지 않던가요?"

"아니. 아주 부드럽던데... 좀 떨긴 하더라."

부모님 앞에서 여자친구얘기는 어쩐지 어색하다. 이것들이 정말! 이번에도 제일 의심이 가는건 오늘 당구이긴 용이 녀석의 애인이다. 장난이면 내일 죽어! 밤에 잠자리에 드는데 오늘 전화한 서울여자가 누군지 궁금했다. 그리고 며칠 만화방그녀를 못봐서였을까. 그녀생각이 많이 난다. 모래쯤 올라가야겠다.

 

만화방총각: 후후. 소설제목을 바꿔야 겠다. "애들은 가. 뱃가죽이 타는밤."은 내가 생각해도 유치하다. 그냥 "타는밤"으로 해야겠다. 있어보인다. 오후에 혜지씨의 모습에 힘이 없어 보인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바늘을 든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나의 어슬펐던 행동을 기억하고 있는건 아닐까? 미안하다. 나는 이제 다 잊어버렸는데...

오늘은 정경이한테 가지를 못했다. 어머니께서 오늘 저녁에 집으로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일까? 혹시.

"혜지씨? 내일은 오전에 나와 주실 수 있으세요?"

그녀의 긍정적인 답을 받고 열쇠를 주었다. 일찍 문을 닫았다.

 

백수아가씨: 단골 그녀석이 내 어릴적 그리운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놈이란게 믿기지 않는다. 철모르고 녀석에게 시집간다고 했던 그때의 내 맘이 사랑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난 그때의 기억을 첫사랑의 느낌이라 생각하며 지금껏 살아왔었다. 이상하다. 그냥 어릴적 친구라 생각하고 사귀어버려?

좀 분하고 추억에 대한 느낌이 깨져서 허탈했다. 그러나 내 맘은 그가 지금껏 어떻게 살았으며, 아직 나란 존재를 기억하고, 그런 나를 만나면 어떻게 대할까?라는 생각들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자취생: 엄마한테 내일 올라간다고 그랬다.

"니. 어제 전화온 여자 때문에 일찍 올라 갈려고 그러는 거지?"

"마지막 면접시험 공부해야지요."

좀 뜨끔하다. 우리 어머니께서 떡을 만드시고 계시다. 분명 내일 내가 들고갈 짐속에 저 떡이 들어있을 것이다. 내가 자기자식은 자식인가 보다. 점심때 친구들을 만나보았다. 지지배들한테 혹시 어제 우리집에 전화했었냐고 물어보았다. 모두들 배째라다. 아무도 그런짓 안했다고 했다. 그전화 때문에 부모님께 낭패를 당했다고 했더니

"그래?"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아무래도 애인없는 날 놀릴려고 장난친것 같은데 단서가 없다. 오후에 집에 혼자 있는데 전화가 왔다. 받았는데 아무말 없다가 끊는다. 뭔가 느낌이 왔다. ’녀석들이다.’

조금 있으니 또 왔다.

"여보세요?...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또 왔다.

"여보세요? ... 용이냐? 아니면 그 놈 애인이냐?"

네번째로 왔다. 또 말이 없다. 짐작이 가서 다짜고짜 말해버렸다.

"난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 그래이~"

"예?"

전혀 생각지 못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었다. 그 ’예?’란 대답 한마디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누구야? 용이 애인목소리는 아닌것 같았는데... 다른앤가?

 

만화방총각: 내 예상이 맞았다. 어머닌 내일 선보라고 하셨다. 내일 입을 양복을 건네 주셨다. 깨끗하게 드라이크리닝 되어 있었고. 그속에 와이셔츠또한 새것으로 깨끗해 보인다.

"내일 점심때 **호텔앞에서 보자."

먹을것도 좀 챙겨주셨다. 그런데 별로 선보기가 싫다. 아침에 만화방 문열기전에 양복을 입었다. 만화방은 좀 늦게 열었다. 혜지씨는 어제 내 부탁처럼 일찍왔었다. 저번 일이 아직도 생각이 났을까? 어제준 열쇠를 바로 건네준다.

"오늘은 양복을 입으셨네요. 멋있네요."

혜지씨가 내 모습에 대해 좋은 말을 해주었다. 그러나 그 말이 별로 듣기가 좋지 않다. 난 지금 모르는 어떤 여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에... 어머니께 곧 말해야될것 같다.

 

백수아가씨: 만화방에 가니 이병씨가 양복을 입고 있었다. 단정하고 멋있어 보인다. 처음볼때부터 이병씨는 보통의 만화방주인아저씨들과는 조금 틀린 귀공자느낌의 무언가가 있었다. 밖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당당해 보인다. 후후. 비교된다. 예전에 내 짐을 들어주고 뒤돌아선 녀석의 떨고 있었던 모습이 떠 올랐다.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감싸주고 싶은 모습이었다.

만화방에 손님이 별로 없다. 심심하다. 단골녀석이라도 있으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는건데.. 전화나 해볼까? 내 지갑 작은 쪽지에 그녀석 집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여보세요?"

앗 녀석같았다. 깜짝놀라 전화를 끊었다. 다시 진정을 하고 한번 더 해보았다. 말씀하면 내가 누군지 알겠냐? 재밌네. 한번더 해보았다. 엥? 용이는 누구야? 겨우 세번에 화를 내네. 또 해보았다.

"...너 용이지? 그래이씨. 내 애인없다. 너 잡히면 주거!"

"예?"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놀라서 전화를 끊었다. 황당한 녀석의 대답을 듣고 무심결에 말이 나오고 말았다. 앞으로  녀석한테 전화할일이 생기면 예의를 갖추어야겠다. 잘못하면 맞아 죽을것 같다. 그나저나 이녀석이 언제쯤 올라올려나?

 

자취생: 내일 또 서울로 올라갈려니 마음이 심난하다. 또 추억을 되짚으려 앨범들을 꺼내보았다. 즐거운 모습의 나를 보고 웃었다. 잘나온 사진들을 볼때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음. 이만하면 미남이군!’ 졸업앨범들도 넘겨보았다. 잘나오지 못했다. 웃을걸 그랬는데... 유치원앨범도 넘겨보았다. 그래 이때는 잘나갔었지. 누군지 모르겠지만 항상 손잡고 다녔던 여자아이가 있었다.

어릴때는 그 기억이 별로 떠오르지 않아 유심히 봐두지 않았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 여자아이가 누구였을까?하는  궁금증이 자꾸 생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내기억은 바래져버렸다. 국민학교도 같이 들어갔었다. 그때 나이를 한 살 더먹었다고 그애가 손잡고 가자는걸 뿌리치고 도망갔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그러나 기억만 있을뿐 그녀의 모습은 생각이 안난다.

누구였지? 내 사진 주위의 여자애들을 짚어보았다. ’김정미, 박소영, 이지연, 정미자, 최혜지, 하이미, 홍주영,,,.’ 에이,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만화방총각: 내앞에 한여자가 앉아있다. 예쁘고 착해보였다. 그러나 난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녀와 같이 있던 시간은 그렇게 길게 가지 못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정경이네 음반점을 찾아갔었다.

"야. 오늘은 정말 멋있어보이네."

"그래?"

"어디 갔었어?"

"응. 집에서 선보라고 해서?"

"...그래? 그럼 선보러 가는 길이야?"

"아니. 보고 왔어."

"벌써? 어때? 맘에 들어?"

"예쁘고 착해보이더라."

"그럼 됐네. 잘하면 국수 얻어먹겠다."

"허. 내가 여기 오는게 싫어?"

"아니. 왜?"

"야. 내가 장가가고 나면 여기 올수 있을거 같냐?"

"그래서?"

"혼자 있는게 싫다며."

"그래. 싫어."

"누구 나 말고 여기 오는 사람 있어?"

"없는데..."

"그럼뭐야?"

"그래. 너 결혼하지말고 매일 여기나 찾아오곤 했음 좋겠다."

만화방에 있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선본 여자 맘에 들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저. 엄마. 전 맘에 둔 여자가 이미 있어요."

 

백수아가씨:밤에 이제는 완연히 녀석을 줄 작정으로 목돌이를 짜고 있다. 괜히 웃음이 나온다. 옷을 말릴려면 제대로 말리지. 늘어난 목이 안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뜨개질을 하고 있는데 아빠가 노크를 하셨다.

"안자니?"

"예. 아빠. 들어오세요."

"어 뜨개질 하는구나? 요즘 젊은 애들 뜨개질하는거 참 보기힘든데.."

"왠일이세요? 엄마는 주무세요?"

"응. 혹시 초코파이 어디놓아둔지 아니?"

"예? 그거 냉동실안에 있을거에요."

"그래? 고맙다. 참 그거 누구 줄려고 짜는거니? 혹시 나냐?"

"호호. 죄송해요. 담에 꼭 아빠것두 짜드릴께요."

"그래. 좀 섭섭하다. 잘자라."

아침에 일어나니 겨울까치의 울음소릴 들었다. 누구 반가운 사람이 올려나?

 

자취생: 아침부터 서둘렀다. 날이 밝을때 서울에 도착하기 위해서다. 먹을게 푸짐하게 든 박스가 탐스럽지만 또한 부담스럽다. 겨울옷 몇가지를 넣은 옷가방을 포함해 짐이 모두 세개다. 에구 저걸 어떻게 다 들고가나? 여기야 아버지가 태워주면 되지만, 서울서는 좀 힘들겠다.

서울에 도착했다. 시간이 두시 반쯤 되었다. 빨리가면 혜지씨를 골목에서도 만날 수 있겠다. 택시를 잡는데 짐 때문에 태워주질 않는다. 목숨을 걸고 모범택시를 잡았다. 모범택시는 태어나 처음 타봤다. 아저씨가 내려 짐까지 실어준다. 좋네. 뒷자석에 앉았다. 꼭 사장이 된기분이다. 차비를 계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모범택시를 탔건만 혹시나 하고 만화방 근처에서 내렸다. 후회했다. 그녀도 볼 수 없었고 짐도 많이 무거웠다. 박스는 어깨에 메고, 내려 갈때 들었던 가방은 다른어깨에 걸었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 옷가방을 들었다. 거의 우리집쪽 골목으로 꺽이는 부분까지 왔다. 맞은편에는 그녀가 사는 집으로 가는 골목이 있다. 한번 느껴볼까? 짐을 내리면 다시들고 가기가 힘들다는걸 알지만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 집쪽의 골목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하하! 그녀가 바로 앞에 서서 날 빤히 쳐다보고 있는게 아닌가? 내 기분이 지금 뭘 훔쳐보다 들킨 기분이다. 그녀의 한손에는 뜨개질도구가 든 종이가방이 들려있었다. 계속 만화방에서 뜨개질을 했었나보다.

 

만화방총각: 엄마가 오늘 아침에도 전화가 왔다. 내 마음에 둔 여자가 누군지도 물으신다. 뭐하는 애냐? 나이는 몇살이냐? 나한테 소개를 시켜야 되지 않냐? 많은걸 물으셨다. 하지만  난 자신있게 정경이를 소개시킬수가 없다.

 

백수아가씨: 만화방갈시간이 다가 왔다. 오전내내 뜨개질만 한것 같다. 목돌이의 대상이 결정되고 나니까 한결 빠르게 진행이 된다. 이제 만화방을 가야겠다. 우리골목 끝자락에서 내 첫사랑이라 생각이 드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한쪽어깨에 든 박스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볼수가 없었고, 겨울 외투가 낯선 것이었지만 그 모습은 예전에도 본 모습이었습니다. 참 무거워 보이는데 잘도 들고 갑니다. 내가 여기서서 그사람을 보고 있다는 걸 모르는듯 그저 묵묵히 걸아가고 있습니다.

박스야 떨어져라. 아니면 미끄러져 넘어지던가? 그냥 내가 고함이나 질러볼까? 이제 그도 설레임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런 내맘이 전해졌을까? 그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박스를 내려놓는다. 힘들었나보다. 어깨에 걸친 가방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맺힌 내 모습이 추억되어 아름답다.

"에..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했다.

"에..예."

"지금 올라오시나보죠?"

"예.."

"짐이 참 많네요?"

"예."

"뭐에요?"

"그냥 옷하고 먹을거..."

"무거워요?"

"조금.."

"제가 좀 들어드릴까요."

"...."

"안무거워요?"

"아니 무겁긴한데... 만화방에 가는길 아닌가?"

"조금 늦어도 되겠죠.  들어드려요?"

"에. 예"

"그 가방 이리주세요."

"이건 좀 무거워요. 옷가방이나.."

"아니 그 가방주세요. 별로 안무겁네요."

참 많이도 후회했다. 그나저나 이 무거운걸 어떻게 세개씩이나 들고왔냐? 가방을 힘겹게 들고 녀석을 따라 갔다. 우리집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녀석의 자취방이 있었다. 녀석이 자기 방문을 열쇠로 열더니.

"이제 이리주세요."

"아니 안까지 들어드릴께요."

"예?"

생각해보니 남자혼자 사는 방까지 들어갈려고 했다.

"그럼 여기 놔 둘께요. 가보겠읍니다."

그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닫히지 않은 방문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넓지도 좁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지저분하지도 않는 그러나 포근해보이는 그의 방안에서 녀석이 방금 막 들고 들어간 박스를 힘차게 찢었다. 그리고 뭔가를 꺼내어 가지고 나왔다.

"이거 드세요."

"이게 뭔데요?"

"떡이에요."

"예?"

"그때 보니까. 떡 좋아하시데요 뭐."

 



43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