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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하이라이트에 얽힌 잼있는야기..(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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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형 [solo0001] 쪽지 캡슐

2000-12-30 ㅣ No.7873

 

디지탈 조선일보에서 퍼왔슴다  ㅡ.ㅡ

 

 

◆’TV 하일라이트’에 얽힌 이야기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한현우입니다.

오늘은 ’TV하일라이트’에 얽힌 이야기를 해드릴까 합니다.

 

’TV하일라이트’란 각 신문마다 TV 편성표 옆에 그날 볼만한 프로그램을 요약해 싣는 기사입니다. 왜 그런 글 있잖습니까. "영희는 전날 당한 일에 대한 화풀이로 철수를 찾아간다. 철수 방문을 발로 걷어찬 영희는 숙자와 함께 있는 철수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한다. 영희보다 더 놀란 철수는..." 그런 것 말입니다.

 

"그게 무슨 기사야" 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엄밀히 말해 기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열독률이 매우 높은 난임엔 틀림없습니다. ’허준’ 처럼 ’오늘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되나’가 큰 관심을 끄는 경우엔 TV하일라이트에서 빠뜨리면 신문사로 항의전화가 옵니다. "오늘 임호 죽어요, 안 죽어요?" 부터 "야, 허준 예고도 안 쓰는 게 신문이냐" 하는 욕설까지 실로 다양합니다.

 

아마 다들 아시겠지만, 모든 신문이 각자 다른 목소리를 내도 ’TV하일라이트’만큼은 거의 비슷합니다. 물론 어떤 프로그램을 미리 예고할 것인가는 방송담당 기자가 취사선택할 일이죠. 그러나 일단 선택한 프로그램이 같다면, 문투까지 거의 비슷하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이는 방송사 작가들이 써 보내는 보도자료를 베끼기 때문입니다. "베낀다구?" 하고 화내지 마시길. 안 베끼면 모든 프로그램을 일일이 다 사전에 본 다음 TV 하일라이트를 써야한다는 결론인데, 그러려면 아마 신문사 편집국 내에 ’하일라이트부(部)’를 만들어야 할 겁니다.

 

케이블 채널까지 수많은 방송사들은 ’TV하일라이트’용 자료를 보내옵니다. MBC와 EBS는 매주 ’MBC 통신’ ’EBS 주간보도자료’란 책자를 보냅니다. SBS는 B4용지 크기 8~10쪽 짜리 ’주간 SBS’라는 걸 보내죠. KBS는 인터넷상에서 TV하일라이트를 제공합니다. KBS 홈페이지 ’사이버 홍보실’에 들어가 보시면 당장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방송사들은 이런 자료와 함께 프로그램 사진도 함께 보냅니다.

 

그러나 방송담당 기자들은 이 자료를 베끼면서도 베끼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그대로 베끼기엔 너무 조악하거든요. 그러니 나름대로 문장을 다듬고 빼고 손질해야 합니다. 이번 주에 배달된 ’MBC 통신’의 한 문단을 그대로 소개해보죠. 일일연속극 ’당신때문에’ 7월 13일자 내용입니다.

 

"순영은 짧아진 정우의 머리를 보고 깜짝 놀라는데 영준이를 믿는다며 마음 흔들리지 말라며 정우를 달랜다. 그때 영준이 저녁 먹으러 왔다며 들리고 정우가 절교선언을 했다며 혼내주라고 순영에게 애교스럽게 이른다. 순간 냅다 정우를 한대 때리는 순영."

 

이렇게 엄청나고 성의 없는 만연체 문장을 신문에 그대로 싣는다는 건 ’아무리 TV 하일라이트지만’ 심한 일이죠. 이 하이라이트용 자료를 보면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다는 표시가 팍팍 납니다. 해당분 드라마를 틀어놓고 첫 1∼2분간 장면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 그치죠. 그런가 하면 첫 방송을 앞두고 있는 프로그램 자료는 이보다 훨씬 성의있습니다. 인지상정이겠지요.

 

TV하일라이트는 제가 97년에 문화부 있을 때만 해도 문화부 기자면 누구나 한번씩 ’담당’하는 난이었습니다. 부서 막내기자가 이 일을 맡았었지요. 그도 그럴 것이 방송사에서 보낸 자료를 다듬어 타이핑하는 수준에다가, 그에 맞는 사진을 찾아 편집자에게 전달하는 비교적 단순작업이니까요. 그래서 문화부 기자면 누구나 TV 하일라이트를 쳐본(TV 하일라이트는 ’쓴다’고 안하고 ’친다’고 합니다) 경험이 있습니다. 저희 문화부 김태익 부장은 TV 하일라이트를 2년간 쳤다고 하네요.

 

그런데 올 3월 제가 문화부에 되돌아와 보니, 부서 막내가 맡던 TV하일라이트를 방송팀에서 알아서 하게끔 바뀌었더군요. 방송팀이라 봐야 2명이고, 제가 후배이다 보니 제가 TV 하일라이트를 맡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는 조선일보 TV 하일라이트는 제가 ’치는’ 겁니다.

 

이 TV 하일라이트를 맡고 있으면 남들보다 훨씬 시간이 빨리 갑니다. 왜냐하면, 이틀 후 기사를 미리 쓰게 되는 꼴이거든요. 보통 TV 하일라이트는 이틀 전 저녁에 씁니다.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저는 목요일에 제작하는 신문, 즉 금요일자 TV 하일라이트를 오늘 저녁에 씁니다. 이걸 해놓지 않고 퇴근하면 그 다음날 아침에 이 일 처리하기가 정말 귀찮거든요. 그러다 보니 일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에 수요일자 TV하일라이트를 쓰게 되는 셈입니다.

 

TV 하일라이트를 ’담당’하고 있으면 정말 황당한 꼴을 당하기도 합니다.

 

신문에 나와있는 TV 편성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표 밑에 ’이 프로그램은 방송국 사정에 의해 변경될 수 있습니다’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이건 괜한 소리가 아닙니다. 방송국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편의에 맞게 프로그램 시간이나 내용을 조정합니다. 전날 저녁에 다음날 TV 프로그램을 소개해야 하는 TV하일라이트 담당기자로서는, 내일 방송국들이 어떤 프로그램 변경을 할 지 도저히 알 수 없지요. 그런데 희한하게 항의전화는 전부 신문사로 옵니다.

 

지난번 남북 정상회담 때였습니다. ’허준’이 워낙 인기니까, MBC에서는 정상회담 특별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도 허준은 편성에서 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평양서 날아오는 화면이 너무너무 생생해서 허준을 급히 빼게 됐습니다. "허준이 아무리 인기지만, 이런 날 평양 화면을 실컷 내보내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이었겠지요. 그날 저는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있었습니다. 밤 10시부터 문화부 TV 하일라이트 담당, 곧 저에게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오늘 허준 왜 안 해요?"

"그게 정상회담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허준 한다고 신문에 나왔어요?"

"그게 어제까지는 그렇다고 했었거든요."

"신문이 이래도 돼?"

"아니 왜 반말이세요?"

"야, 지금 반말 안 하게 됐어? 허준 왜 안 해? 너네 왜 허준 한다고 해놓고 사기쳐?"

"누가 사기를 쳐요? 허준을 조선일보에서 합니까? MBC에서 하지?"

"너네가 한다고 신문에 실었잖아."

"그 조선일보 언제 배달 받았어요?"

"오늘 아침에."

"반말하지 마시고, 그럼 허준은 조선일보에서 해요, MBC에서 해요?"

"MBC."

"MBC에서 허준 안 하기로 결정한 건 오늘 저녁이에요. 아시겠어요?"

"그런데."

"오늘 저녁에 안 하기로 결정한 걸 어떻게 오늘 아침 신문에 싣냐?"

"야, 이 XX야, 하여튼 조선일보 끊을거야!"

 

그 ’반말 독자’는 씩씩거리면서 전화를 끊더군요. 그 이유라면 굳이 조선일보를 끊고 다른 신문을 본다 한들 별 나아질 것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신문사에 걸려오는 온갖 전화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하여튼 그런 지경입니다.

 

저도 주말에 방바닥을 뒹굴다가 신문을 펼쳐들고 TV 하일라이트를 봅니다. 제가 써놓고 제가 "볼만한 것 없나" 하며 뒤지는 꼴이지요. 어쩔 땐 "이 프로그램 도대체 무슨 내용이야" 하는 소리가 제 입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그만큼 제 기명기사에 비해 소홀한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루에도 케이블 TV 포함해 수백건 TV 프로그램이 있지요. 저희 신문에는 딱 6개 프로그램에 대한 예고만 나갑니다. 하릴없이 방바닥에서 온갖 형태의 포복훈련을 하시는 분들을 생각하면 TV 하일라이트에 더욱 애정을 쏟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의 주말 신세도 그렇구요. 앞으로 조선일보 TV 하일라이트 보실 때, "이거 한현우가 ’친’ 거구나" 해주신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이겠습니다. 더운 여름, TV 가려보시면서 슬기롭게 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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