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골 자유 게시판

짝사랑이야기[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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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성 [greenbee] 쪽지 캡슐

2000-06-26 ㅣ No.973

부제. 18년간의 짝사랑이야기.

 

 

동엽이는 철민이가 야구 대회에 나가 있는 동안 소리없이 군대를 가 버렸다. 군

대 가기 전 동엽이는 철민에게 편지 한 통만을 남겼다.

 

한량대는 올해 야구 멤버들이 상당히 좋았다. 국가 대표 선수도 네명이나 있었

다. 하지만 대통령기에서 준결승에도 못 올랐다. 8강전에서 새내기 찬오가 콩국

대에게 난타를 당했다.

"아직 경험이 없는 새내기인데 잘못 올렸어."

철민이는 난타 당하는 찬오를 보면서 바로 감독 옆에서 중얼 거렸다.

"뭐 임마?"

안 그래도 열받아 있는 감독이 철민이의 말을 듣고 바로 반응을 보였다.

"맞잖아요. 기량은 있을 지 몰라도 경험이 부족한 신입생을 8강전 선발로 올렸다

는 게. 부담이 많이 됐을 거에요."

"이제 야구 선수 된지 6개월 밖에 안된 네가 그런 말 하면 안되지. 너 몸 풀어

임마."

"예?"

"밖에 나가서 몸 풀어."

"절 내 보내실려구요?"

"너 지금 감독한테 말대꾸 하냐?"

"아닙니다."

 

관중은 적었으나 철민이는 난생 처음 야구장에서 공을 던져 보았다. 비록 덕아

웃 근처에서 투구 연습 한 것이었지만 철민이는 뿌듯했다. 철민이는 이미 패색

이 짙은 경기였지만 선수로 뛰지는 못했다. 철민이는 출전 명단에 포함되어 있

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감독도 그걸 알고 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른다. 시

합장의 분위기를 느끼라고 그랬는지, 자기 옆에서 쫑알되는 철민이를 멀리 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감독의 의중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철민이는 좋은 경험을 했

다. 관중들이 보는 경기장, 한구석이나 따나 공을 던져 본 철민이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야구 선수라는 걸 느꼈다.

 

철민이는 대통령기 대회 자기 팀이 탈락한 다음 동엽이의 편지를 받을 수 있었

다. 철민이는 아차,하는 생각을 했다. 군대 가는 친구를 챙겨 주지 못한 아쉬움

이 있었다. 안 그래도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친구였는지라 그 아쉬움은

컸다. 편지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그냥 자기 군대 간다, 잘 있어라. 갔다 와서

보자. 이런 내용이었다. 마지막 내용만 철민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

다.

"지윤이에게 잘 해라. 내 느끼기로 지윤이가 널 생각하는 만큼 넌 지윤이를 생각

하지 않고 있다. 군대 갔다 와서도 그러면 내가 지윤이를 가로 채겠다. 네 마음

속에는 지윤이 외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가까이 있어서 못 느끼고 있는

것이다 너는. 너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사람은 지윤이다. 그리고 야구 선수로

서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해라. 나 간다. "

'이 새끼가 뭘 믿고 이런 말 하지? 우리 나이가 아직 이런 말 할 하기에는 어린

데... 근데 이 자식이 내가 현주를 좋아하고 있는 걸 눈치 챈 것 같다. 쪽 팔린

다.'

철민이는 동엽이 곁으로 간 지윤이에 대해 상상을 해 보았다. 아무 이유 없이 싫

었다. 철민이는 하루 날을 잡아 지윤이네로 갔다.

 

"너 또 왜 왔어."

"이게 진짜. 오빠라고 못해?"

"나 보러 왔을리는 없을테고, 언니는 시험기간이라 아마 늦게 올거야."

"살만 하냐? 지윤이가 잘해 주니?"

"잘해 주지. 오빠하고 바꿨음 좋겠다."

"바꾸다니?"

"오빠는 누구 줘버리고 지윤이 언니가 내 친언니였으면 좋겠다 이 말이지."

"이게! 내가 널 못 살게 군 적 있냐?"

"없어."

"근데 왜 그런 생각하는거야."

"그냥. 지윤이 언니가 잘해 주니까."

"그렇게 잘해 주냐?

"응, 아마 오빠 때문인 것 같아."

"나 때문에?"

"언니가 오빠 많이 좋아 해. 지윤이 언니한테 잘해라."

"알았어 임마. 참 여기 지윤이 친구가 간혹 오지?"

"응, 현주 언니가 자주 찾아 와."

"그래, 너 현주랑도 친하게 지내라."

"그러지 뭐."

"너무 놀지 말고 공부도 좀 해."

"알았어. 오빠도 열심히 해. 근데 오빠는 왜 자꾸 시끄멓게 변하는 거야? 꼭 운

동 선수 같아 보여."

"응?"

철민이는 뜨끔했다. 철민이 자신이 봐도 자기 팔이랑 목덜미가 많이 검어 졌다

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어딜 돌아 다니는 거야?"

"친구들이랑 운동을 자주 해서 그래. 보기 싫냐?"

"당연히."

철민이는 지윤이네에서 혜지와 지윤이 올 때까지 얘기도 하고 라면도 끓여 먹고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늘 언니 보고 갈거야?"

"그럴려고 왔잖아."

"늦게 올텐데, 그냥 자고 가라."

"가봐야 돼."

"내일 수업 있어?"

"응, 아침 일찍 있어."

"그럼 할 수 없지. 잘 가라."

"지금 안 갈거야 임마."

지윤이는 거의 밤 11시가 다 되어 돌아 왔다. 철민이는 그때까지 합숙소로 돌아

가지 않았다.

"어? 철민이 와 있었네."

지윤이는 집에 들어서자 마자 철민이를 보고는 반가움을 표시했다. 철민이가 근

래에 들어 오랜만에 지윤이를 만났기 때문에 반가움이 컸을 것이다.

"너는 왜 이리 늦게 다니는 거야."

"나 내일 시험 봐. 학교 도서관에 있다 왔어."

"벌써 시험 기간이야? 그럼 얘는 뭐야?"

철민이는 자기 동생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새내기잖아. 야이 바보야. 나는 저 번주에 시험 끝났어. 그러고 보니까 오

빠도 시험 보지 않아?"

"응?"

"그래, 철민이 너네 학교 이번주가 시험 기간이잖아."

철민이는 말을 잘못 꺼냈다는 것을 느꼈다. 그냥 얼버 무려 버렸다.

"나야 뭐 기본 실력이 있잖아. 지윤이 넌 시험 언제까지 보냐?"

"나? 이번주면 끝나. 철민이 너 시험 기간이라 수업이 없어서 여기 자러 왔구

나? 잘했어."

철민이는 지윤이가 돌아 오는 것을 보고 바로 합숙소로 들어 갈 생각이었으나 그

냥 자게 생겼다. 감독이 이번 대회 결과에 불만이 있어서 내일부터 당장 다음 대

회 훈련을 한다고 했었다. 철민이는 조금 걱정이 됐다.

"오빠, 내일 아침에 수업 있다고 했잖아."

"응?"

"아니야, 내가 알기로 얘네 학교 시험기간엔 수업을 받지 않아."

"오빠 수상하다."

"뭐...뭐가?"

"오빠 시험 개판으로 보고 위로 받을려고 온 거 아냐?"

철민이는 헛 웃음이 났다. 자기가 운동 하는 걸 동생이 눈치나 채지 않았나,하

는 걱정이었는데 동생은 전혀 다른 말을 했기 때문이다. 철민이는 살며시 지윤이

를 봤다. 지윤이가 조금 수줍게 남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철민이는 바로 말을

돌렸다.

"동엽이가 입대 했다. 편지가 왔는데 이미 입대한 날짜가 지났더라."

"그래? 좀 미안하네. 다음에 면회 한 번 같이 가자."

"그러지. 야?"

"왜?"

"동엽이가 좋냐? 내가 좋냐?"

"응? 갑자기 그걸 왜 물어 봐."

"내가 좋지?"

"뜬검 없다 너. 내가 동엽이랑 뭐 자주 보기라도 했니?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그 새끼가 왜 그런 말을 썼지 그럼."

"무슨 말이야?"

"아니야. 근데 왜 답을 안하냐?"

"오빠가 그렇게 묻는 건, 오빠에게 지윤이 언니가 좋아? 현주 언니가 좋아,라고

묻는 것과 같은거야. 비교 되는 사람하고 물어야지."

지윤이 대신으로 혜지가 답을 해 주었다. 혜지는 동엽이도 알고 있었고, 현주도

알고 있었다. 혜지는 자기 오빠에게 현주는 지윤이가 동엽이를 생각하는 수준으

로 알고 있나 보다. 자기 딴에는 뭔가 안다고 내 뱉은 소리였으나 철민의 마음

은 그게 아니었다.

"현주가 갑자기 왜 나와?"

"그러니까. 왜 오빠를 동엽이 오빠하고 괜히 비교를 하냔 말이야?"

"그래 혜지 말대로 왜 너랑 동엽이를 비교 해. 동엽이가 나 좋다고 그러니?"

"그건 알바 아니고. 혜지 너 현주하고 동엽이하고는 다른 거다. 나 내일 아침 일

찍 갈테니까 그렇게 알아라."

남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엉뚱한 말이었으나 철민은 골똘히 생각해야만 했

다. 그 답은 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철민이의 뇌리에 엉뚱한 생각으로 남아 있

게 된다.

 

철민이는 날씨가 더워 지면서 서서히 투구 폼을 교정 받으면서 정식으로 투구 연

습을 시작했다. 포수를 앉혀 놓은 채 철민은 공을 던졌다.

"어깨에 힘 빼."

투수 코치인 윤석호씨는 철민에게 남달리 애정을 갖고 있었다. 철민에게 야구를

시작하게 한 사람은 감독이었으나 철민에게 매달리는 사람은 감독이 아니라 투수

코치인 윤석호씨였다.

"올해 까지 투구 폼을 완성시키고, 직구를 마스터 해야 내년 부터는 다른 구질

의 공을 배울 거 아냐. 그래 가지고 언제 시합 한 번 나가 볼래?"

 

철민이는 정식으로 투구 연습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론 연습. 이론 연습

에서는 철민이가 다른 선수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룰과 규칙도 배웠다. 작전에

대해서도 그는 나름데로 생각하며 들었다. 이론 만큼은 철민이가 남들 보다 빨

리 배웠다. 한 달 남짓 연습을 해서 철민이의 투구 폼은 어느 정도 일정하게 잡

혀 갔다. 아직 공이 자기 맘대로 컨트롤 되지는 않았으나 속도 만큼은 들쑥 날

쑥 하지 않았다. 공을 오래 던지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스무개 정도

는 거뜬하게 자기 속도의 공을 던질 정도로 실력이 늘어 났다.

"오늘 네가 던진 공이 153까지 나왔다는 거 아냐?"

연습이 끝나고 철민은 투수코치로 부터 칭찬을 받았다.

"빠른 건가요?"

"공 빠르기로만 따지면 메이저리그 급이지."

"그럼 시합 내 보내 줘요."

"멀었어 임마. 이제 조금씩 수비 연습도 하고, 공을 오래 던질 수 있는 것도 연

습하자."

"그럼 컨트롤 잡는 거 하고 변화구는 언제 배워요."

"같이 하는 거지 임마."

 

유월 초순 경에 모 방송국에서 주체하는 대회의 한 경기에서 철민이는 처음으로

선수 명단에 자기 이름이 기입 되었다. 철민이는 그 사실에 매우 흥분하고 대단

히 자부심을 가졌다. 철민이는 이제 제법 공을 던졌다. 공은 단순히 직구였지만

아주 빨랐고, 그런데로 포수가 잡을 수 있는 범위 안으로만 던져 지고 있었다.

철민이가 또 선수 명단에 기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반 학생들로만 구성 된 최

약체 세울대 팀과 경기를 치루었기 때문이다.

 

한량대가 17대 0으로 앞서던 5회초였다. 철민은 자신에게 열등감을 주던 세울대

가 형편없이 깨지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기분이 좋았다.

'야구에서 만큼은 저 대학은 명문이 아니라 똥통이다.'

"철민아 너 한번 나가 볼래?"

경기의 승패가 거의 결정이 나고, 한량대는 이번 회만 지나면 콜드 게임승을 거

둘 것이다.

투 아웃을 남겨 두고 철민이는 몸도 풀지 않은 상태로 투수판을 밟아 보는 영광

을 가지게 되었다. 철민은 비록 사람이 거의 없는 썰렁한 관중석이었지만 찬찬

히 둘러 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야구장 공기의 내음새를 맡았다. 자기를

환호하는 함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자!"

철민이는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아무도 철민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뭐해. 빨리 연습구나 던져."

철민이는 연습구를 던졌다. 미트에 공이 힘차게 꼿혔다. 곧 타자가 들어서고 경

기가 속행 되었다. 철민이가 실전에서 처음으로 타자를 맞는 순간이었따. 아주

점수차가 많이 나 있는 상태였지만 철민은 잠시 당황을 했다. 타석에 들어 서 있

는 타자가 아주 불안해 보였다. 철민은 포수의 사인과 상관없이 타자의 바깥쪽으

로 힘껏 던졌다. 공은 어이없이 뒤로 빠졌다. 타자가 멀뚱히 자기를 쳐다 본다.

'니가 그런 눈으로 쳐다 봐도 나는 정식 선수야. 너는 동아리 멤버구...'

철민은 두번째 공은 아주 조심스럽게 던졌다. 어깨에 힘을 빼고 천천히 던졌다.

"스투라익."

처음으로 듣는 심판의 그 소리가 철민에게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두번

째 공도 천천히 살며시 던졌다.

"깡!"

공은 아주 멀리 날아 갔다. 다행히 자기편 수비수가 잡아 주었지만 그 타자는 철

민이 공을 아주 잘 받아 친 것이었다. 철민이는 다소 기분이 나빴다.

"잘했어. 처음엔 그렇게 하는 거야."

덕아웃에서 투수 코치가 철민이를 격려해 주었다. 하지만 그의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 타자다. 철민이는 쉼호흡을 하고 포수를 바라 보았다. 철민이는 이

미 주고 받는 사인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었다. 철민은 직구 밖에는 던질 줄 아

는게 없었다. 포수는 코스만 요구했다. 바깥쪽 높은 볼.

'내가 시키는 데로 맘대로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하쇼?'

철민이는 다소 어깨에 힘이 들어 간 상태로 공을 던졌다. 공은 타자 쪽으로 빠르

게 날아 갔다. 타자가 놀라며 잘 피했지만 하마터면 맞을 뻔 했다.

'미안해.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어.'

두번째 공도 아주 빠르게 들어 갔다. 그것도 타자 몸쪽으로... 타자는 다시 뒤

로 짜빠졌다. 타자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살벌한 분위기였으나 철민은 전

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네. 공 두개가 연속으로 같은 코스로 들어 가다니... 내 공이 컨트롤 되

는 것처럼 보이겠다 하하.'

 

철민은 타자의 표정과 달리 밝은 모습이다. 세번 째 공. 드디어 타자가 철민이

가 던진 공을 피하지 못하고 맞았다. 그리고 바로 쓰러졌다. 허벅지에 맞았지만

철민이가 던진 공은 엄청 빨랐다. 타자는 땅바닥에서 구르지도 못하고 쓰러진

채 허벅지만 잡고 울상이었다. 철민이가 던진 공의 구속은 아무도 몰랐다. 그냥

빠르다고만 생각했다. 단지 윤석호 씨만이 혹시나 하는 요량으로 몰래 구속을 재

고 있었다.

"어랏! 저 새끼들이 왜 뛰어 나오는 거야."

크게 패하고 있었는데다가 자기 선수가 공에 맞자, 상대편 선수들이 우르러 뛰

어 나왔다. 나이 든 감독이 없는 팀인지라 누구 하나 말리지도 않았다. 바로 세

명이 철민에게로 뛰어 들었다. 자기 팀 선수들이 그들을 제지 하려고 몸싸움을

벌렸다. 포수 쪽에서는 이미 싸움이 일어 난 상태였다.

"야, 우리는 절대 싸우지마. 잘못하면 징계 먹어."

감독이 덕 아웃에서 소리쳤다.

멀뚱히 그런 모습들을 바라 보고 있던 철민이 면상에 자기 팀의 저지선을 뚫고

나온 한 놈이 주먹질을 했다. 철민은 그 녀석에게 맞고 땅바닥에 넘어지면서도

한 마디 했다.

"너 몇 학번이야 새꺄!"

철민이는 자신도 이제 겨우 이학년이었지만 후배가 생겼다는 기분을 아직 가지

고 있었던 모양이다. 철민이가 맞는 모습을 보고 주위에 있던 자기 야구부 선수

들도 주먹질을 해 됐다. 철민이는 땅바닥에 누워서 날라차기 하는 찬오도 보았

고, 글러브를 던지는 지언이 형도 보았다. 그리고 울상이 된 감독도 보았다.

 

싸움은 말려지고 세울대 여섯명, 한량대 세명이 퇴장을 당했다. 철민이는 퇴장

은 당하지 않았지만 투수판을 내려 와야 했다. 철민이가 덕아웃으로 걸어 들어

갈 때 관중석에서 누가 자기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

"철민아."

철민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 누군가를 보고 철민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야구 하는 것을 들켰다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반가운 얼굴이었다.

"엉? 현주 네가 여긴 왜...?"

"철민이 빨리 안들어오고 뭐해."

철민이가 덕아웃으로 들어 오지 않자 투수코치가 철민이를 불렀다.

"너 어떻게 된거야?"

"응. 하하."

"경기 마치고 나 좀 볼 수 있어? 저기 매표소 있는 데서 기달릴게."

"그래 하하."

철민이는 아주 어색하게 웃었다.

 

철민이는 감독에게 야단을 맞지 않았다. 아까의 사태 때 자신은 누구를 때리지

도 않았다. 그리고 철민이가 공을 그렇게 던진 것을 고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감독은 철민이의 한 짓에 대해 탓하지 않았다.

"아직은 멀었나 보다. 내 잘못이다. 아무리 약체 팀이고 다 이긴 경기라고 해도

아직 준비가 덜 된 너를 내 보낸 내 잘못이 크다. 투수 코치 한테나 가 봐라."

철민은 투수 코치에게로 느긋하지 못한 걸음을 걸었다. 아까 소요 사태를 일으

킨 주동자가 자기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철민이는 이미 야구 경기

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는 상태였다. 아까 본 현주 생각 뿐이었다.

"이 숫자 한번 읽어 봐라."

철민이는 느닷없이 스피드 건을 들이 대는 투수코치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투수 코치의 표정은 감독과는 달리 함박 웃음이다.

"160이요."

"느낌이 새롭지 않냐? 이게 아무리 좀 싸고 오래 된 속도계라 확실한 결과는 아

니지만 내 야구인생 이십 오년 만에 이 숫자는 처음 본다."

"이게 뭔대요?"

"제일 마지막에 니가 던진 공의 속도야. 찬오의 공이 155까지 나온 적은 있지.

넌 찬오 보다 더 빠른 공을 지니고 있어. 우리 학교는 전국 제일의 강속구 투수

를 두명이나 데리고 있는 거야. 하하."

"허어 어."

철민이는 투수 코치의 그 환희섞인 말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냥 코치따라 헛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경기는 곧 17:0 5회 콜드게임으로 끝이 났다. 경기가 끝나자 마자 감독은 상벌

위원회 쪽으로 급히 달려 갔다. 야구 부원들은 코치의 인솔하에 학교로 돌아 갈

것이다. 철민이는 투수코치에게 사정을 하고 중간에 팀을 이탈했다.

 

철민이는 매표소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현주에게로 달려갔다. 현주의 모

습은 어리둥절한 모습이 아니었다.

"아,안녕."

철민이는 원래 현주에게 좀 어색했으나, 그날은 더 어색해 했다.

"철민이 왔구나. 야구복이 참 잘 어울린다."

"응? 응."

"근데 어떻게 된거야?"

"나 야구 선수 하는거?"

"응."

"그냥 취미삼아."

"나도 야구에 대해서 제법 알아. 네가 취미삼아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쯤은 알

아."

"그냥 그렇게 됐어. 우리 야구부 감독님이 꼬드겼어."

"그러니? 전에 부터 너 야구 선수 하면 잘하겠단 생각을 했었어. 너 야구 선수

하면 성공할거야. 저기 나무 밑에 가서 좀 앉을래?"

철민이는 의아해 했다. 현주는 자기가 야구 선수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별로 놀

라움과 이상함을 표하지 않았다. 철민은 현주와 동대문 구장 옆 나무가 즐비한

곳의 그늘을 찾아 가 벤취에 앉았다.

"내가 야구 선수가 됐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니? 나 공부 포기 했어."

"좀 의외의 상황이긴 했어. 널 야구장에서 볼 줄은 생각 못했거든. 하지만 네가

야구복 입은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아."

"그러니? 너 내가 야구 선수라 멀리 하고 그러지는 않을 거지?"

"흠, 언제는 가까웠니? 오히려 앞으로 더 친해 질 수 있을거야."

"응? 더 친해 질 수 있을거라니?"

"나 야구장 자주 와."

"참 맞다. 너 프로 야구 경기도 아닌데 여긴 어쩐 일이야?"

"너 아까 던진 공에 맞은 사람이 우리 오빠야."

"응?"

"우리 오빠가 문제를 좀 일으켰지."

"문제를 일으키다니?"

"우리 오빠 거의 야구에 미쳐 가지고 공부는 뒷 전이야. 우리 오빠가 우리 학교

야구부 주장이다. 우리 오빠는 어릴 때 부터 야구 하는 걸 좋아 했었어. 엄마 때

문에 그러지 못했지만, 하여간 우리 오빠 부모님 몰래 야구 하면서 학과 성적이

아주 엉망이야. 오늘 내가 야구장에 있었던 것은 그런 우리 오빠 응원 나온 거였

어. 대충 너도 야구 몰래 하는 거 같다. 맞지? 지윤이 얘기 들어 봐도 네가 야

구 한단 소리는 없었거든."

"맞아."

"그래도 너는 우리 오빠 보다 낫다. 너는 그래도 정식으로 야구 선수잖아.재능

도 울 오빠보다는 훨씬 나은 거 같고."

"아니야, 너네 학교 야구부야 다 취미로 하는 사람들인데, 나중에 딴 일 찾으면

되잖아. 나는 완전히 야구 선수의 길로 들어 선거야. 네말대로 내가 야구하는

거 동엽이 빼고는 아무도 몰라. 집에도 알리지 않았어."

"정말이니?"

"응. 그러니까 너 내가 야구 한다는 사실 아무에게도 얘기 하지 마. 특히 지윤

이 한테는. 걔는 울 동생이랑 같이 살잖아. 나 공부 손 놓은지 일년이 넘었거

든, 집에서 이 사실 알게 되면 나 이제 야구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는 셈이 돼.

말하지 마."

"허허, 이제 두명이나 비밀를 지켜 줘야 되는거야? 알았어 비밀로 해 둘게. 대신

에 열심히 해. 이제 너네 학교 야구 할 때도 한 번씩 와 봐야 겠다."

"나 응원하러 온다는 말이냐? 나 아직 선수로 뛸려면 멀었어. 오늘은 최약체 팀

이고, 점수 차가 크게 벌어져 있어서 잠시 나와 던졌던 거야."

"그래, 울 오빠 참 큰일이다."

"너네 오빠는 나중에 학과 전공 살리면 돼. 계속 공부와 병행하는 거잖아."

"오늘은 네가 많이 부럽다. 울 오빠는 니가 말한 최약체 팀에서도 별로 뛰어 나

지 않은 선순데, 졸업하면 정식으로 야구 선수 할거래. 우리 오빠 거의 학과 공

부에 손을 놓았어."

"엉?"

"울 오빠 꿈이 프로 야구 선수래. 걱정이야. 처음에는 취미삼아 시작했다는데 이

제는 꿈으로 까지 발전했대."

"너네 오빠는 세울대 학생이잖아. 나 부럽다는 얘기는 하지 마라."

"흠, 지윤이 말이 맞구나."

"뭘?"

"다니는 학교 가지고 사람에게 잣대 겨누지마. 내가 단지 너보다 입학 점수 높

은 학교에 다닌다고 날 어렵게 느끼지 말란 말이야."

"내가 널 어렵게 느끼는 걸 눈치 챘구나."

"너 국민학교 때는 성적 가지고 사람 평가 하고 그러지 않았잖아. 우린 어릴 적

부터 알았는데 그런 별 도움 되지 않는 생각은 하지 마."

철민이는 어릴 적에도 그런 생각 했었는데 어쩌나.

"그,그래."

"넌 진짜 야구 선수 같다. 피부도 보기 좋게 탔고, 체격도 당당하고. 울 오빠랑

은 확실히 틀려. 너 정도만 돼도 울 오빠 야구하는거 격려할 수 있을텐데, 이제

는 말리고 싶어."

"나 칭찬해 주어서 고맙다. 오빠는 니가 잘 타일러 보고, 내 얘기는 진짜 아무에

게도 말하지 마."

"알았어. 너도 울 오빠 얘기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 그리고 우리집 연락처 알

지?"

"응, 왜?"

"너 경기 나가게 되면 연락하라구. 내가 응원 해 줄게. 그리고 지윤이와 연락해

서 자주 좀 보자."

"그래."

"나 갈게. 아무래도 울 오빠 오늘 앓아 눕겠다."

"너네 오빠에게는 미안하다고 좀 전해 주라. 내가 아직 초보라서 그래. 고의는

없었다고 말 해 줘."

"그럴게, 안녕."

 

철민은 아주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현주와 새로운 인연을 가지게 되었다.

철민은 기분이 좋다. 야구라는 매개체로 현주에게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이만 공유한 비밀도 생겼다.

 

철민이 덕택에 일어난 한량대와 세울대 야구부의 소요사태로 세울대는 다음 대

회 출전 자격까지 박탈 당했다. 하지만 세울대가 나설 수 있는 대회는 별로 많

지 않았다. 다음 대회에는 세울대의 출전이 처음 부터 불가능한 상태였다. 세울

대의 그 징계 조취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주전 세명이 세 경기 출전

정지를 먹은 한량대의 피해가 더 컸다. 주전 유격수인 유지언이가 출전 정지 당

했고, 덕아웃에 잘 앉아 있다가 괜히 달려 나가 날라차기 한 바람에 다음 경기

선발로 내정 되었던 찬오가 출전 정지 당했다. 주전 포수도 징계를 받았다. 한량

대는 다음 경기에서 지고, 그 다음 경기에서도 지는 바람에 예선 탈락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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