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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해인 수녀님(시인)의 12월의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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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09-12-04 ㅣ No.12275 함께 깨죽을 드시던 김수환 추기경님, 화가 김점선, 장영희 교수, 옛 친구 윤영순… 모두 다 저세상으로 떠난 슬픔 속에 추모시 쓰느라 바빴던 한 해였습니다12월이 되니 벌써 크리스마스카드들이 날아옵니다.
해마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면 늘 초조했는데 올해는 오히려 느긋하게 웃을 수 있는 나를 봅니다.
이별의 슬픔과 몸의 아픔을 견디어 내며 '아직'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감동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어느 날 김수환 추기경님의 병실에서 그분과 함께 깨죽을 먹은 후 내가 기도를 부탁했을 때, 하도 말을 길게 하시어 "힘드신데 좀 짧게 하시죠" 하니 "상대가 문인이라 나름대로 신경 좀 써서 하느라 그랬지!" 웃으며 대답하셨던 그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우린 꼭 한 반 해야 한다고 말했던 화가 김점선, 고운 카드와 스티커를 즐겨 선물했던 장영희 교수, 문병 와서 덕담을 해주던 옛 친구 윤영순….
모두 다 저세상으로 떠난 슬픔 속에 추모시 쓰느라 바빴던 한 해였습니다.
1980년대 내가 돌보던 앳된 지원자들이 이번에 서원 25주년을 지내는 모습을 눈물 어린 감동 속에 지켜보면서 이만큼 오래 살았으니 이젠 떠나도 크게 아쉬울 것 없다는 생각을 잠깐 해보기도 했습니다. 만날 적마다 "좀 어떠세요?" 하고 나의 건강상태를 묻는 이들에겐 단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워 주춤할 때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실은 괜찮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이 암환자의 특성이기에 말입니다.
새벽에 문득 입에서 쓴맛을 느끼며 한 모금의 달콤한 주스를 그리워하고, 어느 순간엔 곁에 있는 종이 한 장 집기 싫은 무력증에 빠지고,
의사나 환자의 한마디에 필요 이상으로 민감해지고,
예측불허인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의기소침해지면서
'암환자의 고통은 설명 불가능한 것'이라는 말을 실감하곤 합니다.
항암과 방사선치료의 터널을 지나고 나면 몸의 아픔 못지않은 마음의 아픔이 우울증으로 연결되는 일도 많은 듯합니다.
'명랑 투병'한다고 자부했으나 실은 나 역시 자신의 아픔 속에 갇혀 지내느라 마음의 여유가 그리 많진 않았습니다. '잘 참아내야 한다'는 의무감과 체면 때문에 통증의 정도가 7이면 5라고 슬쩍 내려서 대답한 일도 많습니다.
병이 주는 쓸쓸함에 맛 들이던 어느 날 나는 문득 깨달았지요.
오늘 이 시간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이며 '어제 죽어간 어떤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내일'임을 새롭게 기억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지상의 여정을 다 마치는 그날까지 이왕이면 행복한 순례자가 되고 싶다고 작정하고 나니 아픈 중에도 금방 삶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음엔 담백하고 잔잔한 기쁨과 환희가 물안개처럼 피어올라 전보다 더 웃고 다니는 내게 동료들은 무에 그리 좋으냐고 되묻곤 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답으로 들려주던 평범하지만 새로운 행복의 작은 비결이랄까요. 어쨌든 요즘 들어 특별히 노력하는 것 중 몇 가지를 적어봅니다. - 조선일보 & Chosun.com - 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