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김정일이 말했다.쉬리같은영화를 만들지 말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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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환 [civilday] 쪽지 캡슐

2000-06-30 ㅣ No.1343

김정일이 말했다, ’쉬리 같은 영화는 만들지 말라’고

 

 by guevara

 

박지원 장관의 전언에 따른 4대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춘향뎐>, <미워도 다시 한번>, <2박 3일>, <하숙생> 등의 영화를 언급하며 한국 영화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 언급이 지대한 관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춘향전’이 아니라 ’춘향뎐’이 맞다는 언급이나 <2박 3일>의 줄거리까지 상세히 이야기했다는 에피소드는 위의 영화들에 대한 김정일의 관심이 어느 정도는 구체적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문제는 그의 또 다른 언급이다. 그는 ’<쉬리> 같은 영화는 만들지 말라’고 했다. 남한 4천만 국민의 9할 9푼 9리를 열광하게 만든 전무후무의 대작, 한국 영화의 자존심이자 충무로의 승리인 <쉬리>에 대해 그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물론 거칠 것 없는 그의 언변에 묻어있는 한 토막 에피소드일 뿐인 이 언급에 밑줄을 긋고 주석을 다는 것은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축자영감설적으로 해석하는 주사파 똘마니들의 그것만큼이나 어리석은 행동이겠지만, 실연의 고통이라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몇 개월 동안 <웹진영화> 필진의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guevara에 대한 크루들의 분노가 정점에 다다른 관계로 이쯤에서 aeon 혼자 독수공방 거미줄을 걷어내고 곰팡이를 닦아내며 동전 굴리기를 하고 있는 <디버그> 섹션에 글을 하나 올리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 같다는 판단으로, 음, 또 다시 마침표가 안 나오는 이상한 문장이 되고 있지만, 아무튼 억지 비슷하게 건더기를 하나 잡아 이렇게 철지난 <쉬리>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는 중이다.

 

김정일의 불만은 무엇 때문인가. 삼척동자도 아는 것처럼 북한은 ’아무튼’ 공산주의 국가이며 <쉬리>는 반공 영화다. 북한의 공산주의가 이상하듯 남한의 반공주의 역시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이며 <쉬리>는 이 이상한 반공주의의 결정체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알고 보면 저도 감상적인 구석이 있는 여성이에요’라는 반동적인 여성관이 덧붙여진 것 말고는 이 영화에 나타난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이승만에서 시작해서 박정희 때에 정점에 이른 후 전두환과 노태우를 거쳐 거의 김영삼 때까지 이어진, 그 잔학하고 교조적이기 이를 데 없는 ’빨갱이’의 전형과 다를 것이 전혀 없다. 김정일은 ’만들지 말라’는 언급에 ’사실과 다르다’는 일종의 근거 비슷한 것을 덧붙였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김정일은 ’북한이 못 사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데 그것을 굳이 떠들어대야 하느냐’고 한 적이 있고, 이것은 투정일지언정 사실 왜곡은 아니다. 그가 ’사실과 다르다’고 한 것은 이 전형적인 빨갱이 안팎의 극좌 기회주의자들에 대한 왜곡 때문인 것 같다.

 

남한의 극우 기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북한에도 극좌 기회주의자들은 분명히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김정일의 ’대남 포용 정책’을 반대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그러한 반대가 쿠데타에 가까운 테러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자면, 화해 무드를 조성하는 북한의 최고 실력자와 그러한 화해 무드에 불안을 느끼는 테러분자들의 사상성이, 더 나아가 조직노선이, 내적 역량과 외적 영향력이 과연 일치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아는가, 북한에서 ’통일’은 거의 종교의 차원이라는 것을.

 

반공 영화 <쉬리>는 테러분자들의 불만이 무엇인지, 그들의 불안과 그 불안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행동이 무엇 때문인지를 결코 설명하지 않으며 그저 ’화해하는 최고위급들’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만을 나타낸다. 그 축구경기장에서 김일성(혹은 김정일)이 연방제를 포기한다는 선언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도입하겠다고 했다면 모를까, 1국가·1정부·1체제로 가자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태극기’라는 국기를 택하고 국군 통수권을 미국에게 양도했다면 모를까,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된다고 그 극좌 기회주의자들이 반정에 가까운 테러를 자행한다는 말인가. 고작해야 나온다는 것이 최민식의 절규, ’너희가 그렇게 흥청망청하는 동안 북조선의 인민들은 굶어죽고 있다’는 언급인데, 이 돌고래보다도 머리 나쁜 놈들아, 어느 미친 공산주의자가 그 따위로 본질을 피해가며 민망한 구걸을 하겠는가. 이것은 철저하게 남한 자본주의자들의 사고에 의한 본질의 전도다. ’잘 사는 우리가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따위의 건방진 감상을 엄한 공산주의자의 입을 빌어 내뱉은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 논리면 그들은 ’너희가 도와주지 않아서 테러를 한다’는 이야기가 되고, 그렇다면 화해 무드 속에 묻어있을 원조나 지원, 투자 등은 또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남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적개심 역시 극단적인 테러의 원인은 될 수 없다. 그러한 적개심은 그 테러분자들뿐 아니라 북한의 온건파들에게도 있을 것이며 심지어 DJ DOC에게도 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나 ’조국통일 만세’라는 애국심만으로는 ’아무 것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쉬리>에 나타난 극좌 기회주의자들의 사상성은, 그리고 그들의 조직노선은, 더 나아가 그들의 존재 여부나 형태와 관련이 있을 내적 역량이나 외적 영향력은 따라서 ’사실과 다르’다.

 

고교시절 이후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생각을 단 10초도 해본 적이 없지만, 잔인하게 이야기해서 통일 여부와 상관이 없더라도 이 번 남북 정상(최고위급)회담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무엇보다 악순환과 소모전의 원흉인 남한 사회의 극우 보수세력이 설자리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내 통찰력에 의하면 이 극우 보수세력은 자멸하고 있는 중이며 이 번 회담은 그들에게 치명타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는 그 극우 보수세력들의 직·간접적인 공격, 그들의 힘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존재한다. <월간조선>의 몸부림이 그렇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메이저 일간지들의 ’냉철하다는’ 견제가 그렇다.

 

뻔한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하고,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남한의 극우 기회주의자들이 무장을 해서 체제를 전복한 후 정부를 참칭하며 ’자유대한 만세’를 외칠 가능성이 없듯이 북한 극좌 기회주의자들이 무장을 해서 김정일의 서울 방문 때 폭탄 테러를 할 가능성은 천 번도 없다. 더군다나 북한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권력 집중이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확실하게 이루어져 있는 나라이며 짐작일 뿐이지만 김정일에 대한 북한 정·관계 실력자들이나 주민들의 신뢰는 남한 국민들의 김대중에 대한 신뢰 이상이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남북의 두 정상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쉬리> 같은 영화는 이제 만들지 말자. <쉬리>를 본 일본의 어느 관객은 ’한반도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밤에 잠이 오지를 않는다. 차라리 <편지>나 <약속>의 최루탄이 낫다. 나는 정치적 무관심보다 이상한 애국심, 이상한 민족주의가 더 무섭다.

 

<쉬리> 같은 반공 영화 만들지 말라고 했다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나 <대한제국 일본 침략사> 따위의 애국 영화를 만드는 초엽기 만행을 저지를 돌고래만도 못한 놈들이 또 있을 지가 걱정된다. 현실적인 위험성 차원으로 볼 때는, 차라리 <쉬리>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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