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것들은 빗속에 서 있고
시 : 남정
후박나무잎을 타고 내리는 비
굵은 빗방울이 지우개인양
허공을 지운다.
꽃과 그늘을 지우고
처마 끝에 닿아있는 먼 길을 지운다.
비가 오면 나는 나를 지우고 싶어진다.
내 이마를 지우고
빨간 립스틱을지우고
생각을 지우고 지우고...
그러나 지워진 것들은 언제나 빗속에 서 있다.
지상에 내려선 비는 잔디를 지우고
길을 지우고
떨어지는 제 몸을 받아 지운다.
지우기 위해 비는 내리고
지워지기 위해 생각은
내 안에서 웃자란다.
어느 날 빗속에 서 있 으면
지워진 네가 추억처럼 되살아나고
나는 나를 지우고 싶어 비에 젖는다.
지워진 것들은 언제나
빗속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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