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성당 게시판

옥사덕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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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6 ㅣ No.12250

옥사덕 순교자들을 생각하며

 

                                                                                                                  이영호 벨라도


오늘은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주년의 의미, 특히 옥사덕 순교자들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일입니다. 9월 11일 - 12일, 왜관 본원에서 역사 심포지움이 있었습니다.  푸짐한 영적인 먹거리들을 한상 가득 차려 놓았습니다.

 

성베네딕도 수도원 잔치상의 먹거리는 종류도 여러가지 일 뿐만 아니라 그 맛 역시 다양하였 습니다.

먼저 용어 정리부터 하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으로서 교회사란 무엇인가?

백과사전식 정의를 하자면 교회사란 역사신학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역사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의 역사안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모습의 발견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하느님을 보았는가?


곽승룡 신부님 강의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중에는 일반 대중들에게 가셨고, 수난시기에는 제자들에게 오셨다. 부활후에는 믿는이들과 함께 살고 게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출하셨다가 귀가하셨다. 지금은 부모님 모시고 알콩달콩 살고 계시다. 행복은 가정안에 있다.


하느님은 지금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 그분이 어디론가 도망가지 못하게 꼭 붙들고 공부를 계속하자.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년의 역사중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특히 신자로써 특별히 기억될 만한 사건은 무엇인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전부 중요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주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선물이다. 아직도 진행 중이며 하나의 작품완성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역사 의식속에 머물러 깨여있는 것이 크리스찬의 몫이라고 여겨진다. 내가 바로 한국교회의 역사를 써 가고 있구나라고 자각하는것이 현대인의 크리스찬의 몫으로 여겨진다. 본당에  모이고 헤어지는 것, 그것은 각자의 본당 역사안에 기록되어가고 있으며 긍적적으로 진화될 수도 있지만, 도태되어 역사속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사는 바로 내 앞에서 지나가고 있다. 은사님의 말씀입니다. 그 분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것은 유럽의 어느 교육도시, 하숙집 주인 아저씨의 역사 증언이었다.

....................,

나의 군인 생활 중 잊지 못할 사건이 하나 있었지.

1차 세계대전 중 나는 연합군으로서 참전하였지.

연합군 소대 전투중 독일군 포로가 몇 명 잡혔지.

전투가 심해 포로들 이송이 쉽지 않았지.

포로들은 우리와 함께 하루  밤 묵게 되었지.

한밤중 내가 초병으로 근무할 때였지.

잠간 방심한 사이에 독일군 포로가 도망가는 것을 발견했지.

총을 겨누고 쏘려고 하였지만 그만두었지.

적군이었지만 등을 보고 총을 쏘는 것이 비겁하게 여겨젔기 때문이었지.

또한 젊은이의 목숨도 아깝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지.

심한 전쟁 중 젊은이들은 수없이 죽어갔기 때문이야.....,

그 와중에 포로 탈출은 흔한 일이었지.

아침에 업무 정리 중 발견된 일이지만,

도망병 독일 포로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어.

그 때 내가 총을 쏘았드라면 세계역사는 달라 젔을꺼야....,  이와같이

사는 바로 내 코앞을 지나가고 있는 거야...”

 

물론 이 이야기는 교육적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역사는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역사속에 우리는 늘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다.  우리는 역사속의 주인공으로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느님 나라를 지키고 보존하고 성장시켜야만 하는 선택받은 백성들이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탈랜트를 주시어 이일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나 이것도 너무 지나치면 문제가 있다. 좋은 예가 하나 있다. 교회의 대표적인 영성 중에 하나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왜관 성베네딕도회 수사님들의 공원묘지 견학을 간적이 있다. 묘지명은 아주 간단하였다. 이름과 생졸(生卒), 즉 누구며 언제 태여나 언제 죽었는지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었다. 묘지명, 그곳에는 분명 베네딕도회의 기본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들어보겠는가? 세상안의 존재하는 모든 것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사람은 왔던 것처럼 갈 뿐이다. 그대의 탈랜트마져 하느님에게서 왔기 때문에, 묘지명은 그대의 것만 표시할 뿐이다. 그래서 이름 석자, 그리고 생졸(生卒)만 기록 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성베네딕도회 기본 정신이다.


9월11일 - 12일, 왜관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도회의 100년간의 업적들입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건의 중대성이 아니라 사건속에 들어난 하느님의 모습이다. 교회사는 역사신학으로서 사건속에 하느님의 얼굴이 들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모습이 삭제된 교회사는 진정한 교회사가 아니다.


구약의 나타난 하느님의 모습은 멋진 아버지 모습이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늘 효자만은 아니었다. 나약하고 변덕스러고 때로는 배신까지 하는 뻔뻔한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사실 그대로 기록하고 있었다. 허지만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 놓는 일은 늘 잊지 않았다.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년의 역사 중 개별적인 사건들은 구약에서처럼 기억될 만한 착한 일들도 있지만, 때로는 인간적인 약점들이 들어날 수 있는 사건들도 있었다. 베네딕도 연합회에서의 일들, 파리외방전교회와 베네딕도회와의 선교지에서의 주도권 다툼. 동서양의 인종차별, 정치와 종교(식민지안에서의 한일 관계등)와의 갈등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매 사건속에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의도적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삭제한다면 진정한 교회사라고 할 수 없다. 뿐만아니라 이 자리에서 평가할 근거 역시 없다.


어리석은 십자가란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의 사건까지 이어져 순교라도 할 수 있는 굉장한 사건이지만, 비그리스도인에게는 조작된 하나의 사기 행각으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년의 역사 역시 매 사건마다 하느님의 모습이 보여진다면 훌륭한 작품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요소만 강조한다면 아주 형편없이 평가 절하될 것이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년사를 바라보는 크리스찬의 마음자세에 대하여 두서없이 말씀드렸다. 비록 서툰 표현이지만 발언자의 의도를 보시고 많은 이해 바란다. 이제부터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우리들의 과제들을 제언해 보겠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하여야 할 것이 있다. 오늘 이야기등은 벨라도 개인의 의견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따라서 교회의 기본 정신, 즉 교리에 어긋날 수도 있다. 뿐만아니라 성베네딕도회의 뜻과 상반될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추후 그런 점들이 발견되면 구체적으로 정정하겠다는 것을 약속 드린다. 물론 본인은 상당한 주의력을 기우렸다는 점을 밝혀둔다.

 

크리스찬들이 꼭 관심 가져야 할 부분은 이제 막 시작되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시성시복 운동의 적극 참여이다. 성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이형우 아빠스는 2007년 12월 10일 공동체 미사중 성오딜리아 총재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가 임석한 가운데 시성시복 추진 교령을 반포하였다. 예비 성인들, 즉 가경자들이 선정되었고 그분들의 가치가 세상에 들어나고 있다. 그분들과 한 가족을 형성한 우리가 만일 이일에 무관심 하고 있다면 말도 안된다. 그분들과의 소통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여겨집니다. 그분들과 우리는 어떻게 친교를 나눌 것인가?


십자가의 어리석음은 증거자에게서 다시한 번 들어나고 있다. 그리스도교 가치관은 십자가에서처럼 증거자들에 의해 높이 들어 올려 지고 있다. 십자가의 존재를 단순한 형틀로만 생각한 이들은 칠흑같은 절망이 다가온다. 허지만 부활을 믿는 이들에게 십자가의 존재는 분명 개선문임을 확신한다. 끔직한 십자가가 아니더러도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가 부활을 확신한다면 우리들의 현재의 삶은 훨씬 더 풍요롭다.


성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시복시성 운동은 한국교회에 중요한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기본정신은 <사랑>이다. 허지만 그 사랑은 <지금> 막 시작되고 있을 뿐 <아직>은 완성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늘 조급하게 결과를 재촉하지만, 좀 더 기다려야 한다. 끈질긴 기다림을 요구할찌도 모를 일이다. 그 <사랑>은 <부활>후에 완성될 것이다. 시성 시복 운동이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치우칠 경우 남북 갈등의 우려가 있다는 점을 미리 지적하고자 한다. 어리석은 십자가는 용서와 화해의 표지이지 증오와 대결의 깃발이 결코 아니다. 자, 지금부터는 그 역사의 현장에 더 가까이 가 보자.


.......1920년 원산교구를 설립한 덕원 성베네딕도 수도원과 1925년 한국에 진출한 성베네딕도 수녀원은 헌신적으로 북한지역에서 선교하였으나, 이제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완전히 폐쇄되고 말았다.


 “5월11일 ...나는 10시 정각에 잠자리에 들었다. 한 시간 정도 깨여있었는지 모르겠다. ....순간 성당의 종이 미친 듯이 울려댔다. ..........여섯 명의 사복 요원이 아래에 서 있었다. .............순간 나는 나의 동지들을 깨웠다.”


1949년 5월13일 아침 8시에 원산역을 떠난 열차는 저녁8시에 평양에 도착하여 ........, 평양인민교화소에 수감되었다. 사우어 주교와 루페르트 신부등...., 투옥된 외국인 신부, 수사, 수녀들은 총 67명이었다.  ....남자 감방은 8평방미터 크기에 18명씩....,


❑옥사덕 수용소(1차 수감)

1949년 8월5일, 신부 17명, 수사 22명, 수녀 20명 등 총 59명의 수도자들이 이송되어 8월6일 도착한 곳은 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의 험준한 계곡안의 금모래 언덕, 일명 옥사덕이었다.(청천강 상류지역)


❑강제노동 : 강제노동은 수도자들을 감시하는 경찰들의 의식주 해결을 위한 주택, 사무실, 도로 정비, 그리고 농장 운영이었다. 도구는 오로지 호미와 보습이었다. 옥수수, 기장, 콩, 보리, 감자....., 까마귀, 까치, 퀑, 노루, 맷돼지등의 출몰로 농사를 망치기도 했다. 그보다 더 지능적인 고문은 산비탈과 돌무덤에서 억지 농사 강요로 성베네딕도 수도자들을 괴롭혔다는 점이다. 겨울이 되면 강제 노역은 농장일에서 숯가마일로 바뀌었다.


❑의식주 :

옷은 덕원 신학생들의 옷 몇 가지, 아이들의 옷을 배급받은 어른들의 모습었다..

먹을거리는 옥수수, 기장 콩으로 만든 죽 뿐이었다.

잠자리는 기차 객차 같았다. 위로는 석가래가 보이고 널빤지 아래로는 싸리가 보였다.

❑신앙생활

수녀들 숙소 하나를 경당으로 사용하고 간단한 목재 제대와 한국식 낡은 관을 이용하여 감실을 꾸몄다. 주례 사제를 바꾸어 매일 미사 집전을 하게 되었다.


“날마다 거행되는 그 성스러운 미사는 우리의 수용소 생활에서 가장 큰 행복이었다. 미사는 우리에게 수용소 생활의 온갖 고통과 궁핍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은총을 우리에게 내려 주셔서 얼마나 행복했던가. 또한 공산당 경찰들이 그 점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던가.”


❑순교자들

1949년 6월27일, 옥사덕에 도착한 이래 수도자들은 강제노역을 감당 못하여 순교자가 나오기 시작한다. 7월3일 베드로 게르네르트(Gernert, Petrus) 수사에 이어 8월3일 정양리 마르코(Metzger, Markus 丁洋利)가 사망했다. 수도자들의 건강 상태가 악화되자 평양인민교화소에 감금되어 있던 여의사 디오메데스 수녀와 간호사 프리트헬마 수녀를 7월18일 데려 왔으나, 환자용 약이나 음식을 제공받지 못해 별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1949년 7월에서 1950년 8월까지 옥사덕에서는 총 여섯 명의 수도자들이 희생되었다.


❑한국전쟁 발발과 베네딕도회 수도자들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한국전쟁 발발 내용을 전혀 몰랐다. 우왕좌왕(右往左往) 하는 한국 전쟁 상황에 따라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만포에서 관문리로 갔다가 옥사덕에 재수감되는 고초를 겪게 되었다.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새로 부임한 교도소 소장은 전보다 더 지독한 악질이었기 때문이다. 옷은 푸른 죄수복으로 바뀌었고, 발은 맨발이었다. 겨울을 대비하여 헌겁신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신어야만 했다. 먹을 거리는 더 작아져 겨울동안 수확을 못한 밭에 눈과 함께 얼어 붙은 무나 배추를 파 먹거나, 가축에게 주는 밀기울을 끓여 먹는 일이 가끔씩 일어났다. 몰래 감자를 흠쳐 먹는 일도 있었다. 경찰들에 발각되어 호되게 욕을 얻어 먹곤 하였다. “도둑이며 강도, 그리고 멍멍이 새끼.....,” 이런 일은 1952년 9월19일 새 소장이 부임할 때까지 지속 되었다.


옥사덕 재수감 이후 신앙생활 역시 악질 소장, 별명 살쾡이의 재임기간 중 어려운 시간들을 맞게 된다. 제일 먼저 살쾡이는 미사 봉헌이 눈엣 가시처럼 여겼다. 수도자들은 포도주와 밀이 떨어져 절망스러웠으나, 산속의 머루와 배급 자루속에 밀의 발견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부활하고 있었다. 지능적인 악의 세력은 이 일을 좌시하지 않았다. 살쾡이와 수도자와의 전쟁이 선포된 것이다. 이 시기에 싯귀 한 소절을 소개하겠다. 옥수수 밭, 틈새의 밀은 지키던 수녀님의 절묘한 싯귀이다


“적막을 안고 뫼밭에 선

누런 밀이삭 불어오는

산들바람으로 가벼웁게 나부낀다.

사제의 거룩한 손이 그대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시켜 놓으리라

밀이삭이여

그대는 여름 햇볕에 마음껏 무르익어라


가날픈 넝쿨에 매달리어

흔들리는 포도송이

비바람 찾아오고

서산 너머 해님이 잠들 때까지

그리스도의 성혈이 되는

이 신비를 그대는 아는가

태양의 작열 속에서

그대는 단맛 가득히 무르익어라.


영혼아, 그대는 설워마라

님의 따듯한 손길이

풍파의 암흑 속으로 너를 데려왔으니

그 섭리의 뜻을 인식하여 쓰라린 고통속에서

영혼아 깨끗이 무르익어라.


옥수수 밭 속에 밀은 천신만고 끝에 수확을 하게 되었다. 그 양은 한 사발 정도, 그러나 살쾡이는 그것 마져 압수하고 말았다. 수도자들은 절박하게 되돌려 줄 것을 간청하였고 결국은 소원 성취하게 되었다. 극도로 절약하여 작은 성체를 만들고도 몇 고랑에 뿌릴 씨앗이 되었다.

성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북한의 죽음의 수용소를 거처 가는 동안 오늘 우리에게 던져주는 뚜렷한 멧세지가 있다. 그것은 미사와 시간전례의 중요성이다. 다시한번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날마다 거행되는 그 성스러운 미사는 우리의 수용소 생활에서 가장 큰 행복이었다. 미사는 우리에게 수용소 생활의 온갖 고통과 궁핍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은총을 우리에게 내려 주셔서 얼마나 행복했던가. 또한 공산당 경찰들이 그 점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던가.”


옥사덕 수용소 생활 중 살쾡이는 수도자들의 정신적인 기둥, 즉 미사와 시간전례을 파악하고 난 뒤부터는 그것을 파괴하고자 수없이 공격하였다. 언덕위 골고타의 십자가가 열일곱 개가 세워 질 때까지 이일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수도자들은 살쾡이를 물리치고 승리하고 만다. 미사와 시간전례를 지켜낸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에게 진정으로 존경을 표시하고 싶다. 그러나 17명의 순교자, 그것은 결코 작은 희생이 아니었다.


17명의 순교자의 모습은 백년전 우리나라에 있었던 4대 박해와 전혀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베네딕도회 순교자들에게는 칼과 창, 그리고 그 외 직접적인 순교도구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대신 간접적인 살인도구, 즉 무관심, 수수방관등 그리스도교적 사랑과 정반대되는 행위를 통하여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수도자들의 순교는 감기와 배탈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 이를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었다.


현대인의 크리스찬적 삶 안에서 실천적인 사랑을 외면하는 일, 그것은 살쾡이와 다를 바 없다. 모든 창문과 출입문을 폐쇄하고 하늘로 향하는 천정만 뚤어 놓으면 천당갈 수 있다는 생각은 편하고 안전한 크리스찬적 삶으로 보여 질수 있지만, 옥사덕 수도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살쾡이의 고집, 그리고 무관심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우물안에 개구리가 바로 그들일 것이다.


나의 책상위에 작은 꽃 하나가 나의 무관심으로 메말라 죽어 간다면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분명히 되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애완동물이 나의 수수방관으로 병이 들어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생명의 귀중함을 다시한번 깨닭아 보아야 한다.

 

나의 이웃이 병들거나 굶어갈 때 무관심하다면 살쾡이의 무식한 교도행정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현대인의 가치관, 그것은 모두 살쾡이가 뿌려 놓은 악성 바이러스가 분명하다. 손발을 깨끗이 씻고 집안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소독하여야 할 것이다. 베네딕도 수도자들은 17명의 순교자들의 피로 이러한 세상의 편견을 소독하려 하였다. 그들은 당신들의 거룩한 피로 정화된 그곳에 미사와 시간전례를 채워 넣었다. 다시는 악의 세력이 범람하지 못하도록 주님의 거룩함으로 가득 채워 놓은 것이다.


미사, 그것은 지극한 사랑의 표지였다. 단 한번의 제물로 하느님과 완전한 화해(和解)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 세력은 또 다른 증표들을 지금 당장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십자가 밑에서 믿는이들을 조롱하는 로마병사처럼 구원자 하느님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기다리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옥사덕에서 살쾡이 역시 로마병사처럼 하느님의 출현을 은근히 기다렸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은 사제의 손을 통하여 지금 당장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용맹한 혁명군 사령관이 아니라 잃어버린 양을 찾아 길을 떠나는 목자로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이런 희비(喜悲)의 엇갈림은 신앙의 신비(神秘) 안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 한 가운데 계셨던 예수님, 수난이 다가오자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 부활 후 이제는 믿는이들과 함께 동거동락(同居同樂)하고 계시다.


우리에게서 믿음이 약할 때, 성체안에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점점 작아 보인다. 살쾡이는 바로 이때 설친다. 잠자는 예수님을 모신 덕분이다. 실쾡이 바이러스에 오염된 우리는 스스로 폭군이 되어 천륜(天倫)을 버리고 사랑을 거스르는 만행을 서슴치 않는다. 나는 큰소리로 외쳐 본다. 스승이여 편한히 쉬소서... 똑똑하고 명석한 내가 세상을 운전해 보리다.


깜박이는 경고등, 신호등 모두를 무시한 나는 쾌속 질주한다. 교통사고는 순식간에 잃어난다. 많은이가 죽고 다친다. 나의 가족, 그리고 나의 도움이 꼭 필요한 이웃(고아원, 양노원등)에게 퍼져 나간다. 살쾡이 바이러스는 세상의 가치관을 무너트린다. 옥사덕의 순교자들은 현대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의 보존을 위해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무신론(無神論)은 삶의 가치를 바꾸어 놓는다. 때로는 로마병사처럼, 때로는 살쾡이처럼 창조자의 의지를 실험한다. 그러나 창조주 하느님은 이들이 요구하는 방식, 즉 혁명대장으로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양들의 목자로서 우리 가운데 조용히 와 계심을 고집하고 계시다. 옥사덕의 순교자들은 이런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현대인들에게 크리스찬적 삶의 정확한 방향을 제시하고 계시다. 특별히 성체성사와 시간전례가 강조된 점은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보여진다.


역사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위와 같이 우리의 삶안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발견을 말한다. 나는 분명히 대답합니다. 언덕위에 저 십자가, 그곳에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았노라고 말할 수 있다. 믿는이들과 함께 계시는 그 분은 지금 우리에게 외친다. 자, 일어나 함께 가자


크리스찬들의 관심사는 시성시복 운동에 이어 지식인들의 문서선교 참여입니다. 연길교구에서 가톨릭 소년 창간호를 중심으로 한 문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지금에 와서도 흐믓 하다. 尹克榮, 姜小泉, 金英一, 安壽吉, 박영종(木月), 金相德, ....., 吳基順, 吳基先, 林和吉, ...尹東柱. 이상...., 권오순.


여러분 중에는 현직 또는 전직 대학교수로서, 또는 대한민국 대표적인 지식인으로서, 또는 세계적인 학자로서 덕망이 높은 분들이 많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다. 적극적인 참여 의지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가능한일이다. 선배들의 실험정신을 따라 한번 해보시겠는가? 여러분의 과감한 결단을 강력히 기대하며 오늘 발표를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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