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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와 여행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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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1동성당 [suyu1] 쪽지 캡슐

2008-07-09 ㅣ No.10118


 

저는 지난 1년 동안 안식년을 지내면서 해외 성지 순례를 두 차례 다녀왔습니다. 작년 2007년 여름에는 성지 이스라엘에 가서 우리 주님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왔습니다. 이번 6월에는 루르드와 파티마 성모 성지를 다녀왔습니다. 다행이 매번 좋은 가이드를 만나서 성지와 관련해서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알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에 성지 순례 가이드와 사제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 좋은 가이드는 자신이 안내하는 성지에 대해 풍부하고 정확한 지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성지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그래서 순례자들의 신앙이 깊어지도록 도움을 줍니다. 

마찬가지로 사제도 신자들에게 소개해야 할 하느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성령, 성모 마리아, 성인들에 대한 정확하고 풍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런 지식을 활용해서 신자들의 신앙이 깊어지고 자라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풍부하고 정확한 신앙 지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늘 공부해야 합니다. 신학교 때에 배운 것은 그야말로 기본일 뿐입니다. 꾸준한 공부를 통해서 학창 시절에 배운 것에 새로운 것을 더 보태고, 더 정리하고, 더 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사목 현장에서는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더라도, 틈틈이 공부하는 사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학교 때에는 공부할 시간이 주어졌지만, 사목현장에서는 스스로 공부할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현대는 평생 교육의 시대라고 합니다. 사제도 여기서 여외가 아닙니다. 신자들은 항상 공부하는 사제를 보면서 자신들도 공부하는 신앙인이 되고자 할 것입니다.

2. 성지 순례 중에는 식사가 매우 중요한 몫을 차지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유명한 성지라도 우선 잘 먹고 배가 불러야 좋은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외국에 나가면 음식과 물이 맞지 않아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유능한 가이드는 이런 사정을 고려해서 식사에 많은 신경을 씁니다. 현지 음식이라고 해도 가능한 우리 입맛에 맞게 요리하도록 부탁합니다. 한국 음식점이 있으면 거기도 들리고, 한국 음식점이 없으면 중국 음식점이라도 찾아갑니다. 물론 외국에 가서 한국 음식과 중국 음식만 먹을 수는 없지요. 조금 입맛에 맞지 않더라고 그 지방의 특색인 음식도 먹어보도록 권유하면서 그 지역의 문화도 맛보게 해야 합니다. 

사제 역시 신자들이 영적인 양식을 잘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한국인에게는 밥이 주식이듯이,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성체와 하느님의 말씀이 주식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와 하느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고 튼튼해집니다. 그런데 마치 딱딱한 음식과 같이 알아듣기 어려운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 내에서도 그런 사실을 인정합니다. 베드로 후서 3장 16절에 보면, 바오로 사도의 글에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사제는 신자들이 이런 말씀도 부드러운 음식처럼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잘 설명해야 합니다. 좋은 어머니는 항상 식구들이 맛있게 식사하도록 열과 성의를 다 합니다. 사제에게도 이런 어머니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모든 것을 신자들의 입맛에만 맞추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 중에는 먹기가 버거운 음식처럼 받아들이기가 벅차고 거북한 말씀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사제는 벅차고 거북한 말씀도 용기 있게 전해야 합니다. 단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달콤한 말이 아니라 좀 쓰더라도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는 진리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호기심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말에 더 솔깃해 하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에 이런 사명은 더욱 더 중요합니다. 사제는 신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보다는 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말씀,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2티모 4,3-5 참조)

3. 해외 성지 순례를 하다 보면 이동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때로는 버스를 타고 몇 시간씩 움직이게 되지요. 물론 그 시간에 잠도 자면서 피로를 풀기도 합니다. 하지만 잠도 한 두 시간 자고 나면 더 이상 오지 않습니다. 이동 시간이 길다보면 자칫 지루해지기 쉽지요. 좋은 가이드는 이 시간을 이용해서 다음 성지에 대한 설명을 하거나, 기도를 하도록 인도합니다. 또 기분을 전화시키기 위해서 가끔 재미있는 이야기도 풀어놓습니다. 자신의 체험담이나 농담을 적절히 섞어서 순례자들의 피곤해진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줍니다. 

사제 역시 좋은 가이드처럼 기회를 잘 잡아서 신자들에게 신앙 지식을 전하기도 하고, 때에 맞게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신앙 공부와 기도를 따분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서 가끔은 이야기보따리도 풀고 유머도 발휘하면 좋을 것입니다. 요즘 세상은 너무 재미와 흥미 위주로 흘러서 신앙마저도 자칫하면 재미와 흥미 본위로 나갈 위험이 분명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이런 위험을 분명히 경계해야 합니다. 교리교육과 미사 강론은 오락 프로그램이 아니기에 항상 재미있을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좀 더 잘 받아들이도록,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적절한 이야기와 유머도 필요합니다. 마치 음식의 양념처럼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제는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나 사람들의 관심사에도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자의 거장인 칼 바르트는 사목자들에게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으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습도 알아야 한다는 뜻의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경건한 사제가 되어야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꼭 막히고 답답한 사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4. 해외 성지 순례는 보통 20-30명이 함께 그룹을 이루어서 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속합니다. 모두 성지순례를 통해서 신앙을 새롭게 하겠다는 선한 지향을 갖고 오지만, 여행을 하다보면 각자의 성격과 개성이 들어나게 마련입니다. 어떤 이들은 가이드의 설명을 귀 담아 듣고 스스로 기도하면서 제대로 성지순례를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식사가 시원치 않다', '호텔 잠자리가 불편하다', '함께 방을 쓰는 사람이 싫으니 방을 바꿔 달라', '순례 프로그램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등등의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심지어는 '순례를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엄포를 놓는 사람도 가끔 있다고 합니다. 좋은 가이드는 이런 사람들에게 인내를 갖고 설득해서 순례를 계속 하도록 인도합니다. 때로는 이치에 맞지 않게 너무 불평을 늘어놓아 전체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압력'을 가해서라도 그 기세를 가라앉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좋은 가이드는 자신에게 맡겨진 순례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인도해서 모두가 성지순례를 무사히 마치도록 도와줍니다. 

사제 역시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다양한 신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지혜롭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신자답게 성실하게 사는 이들은 계속 그렇게 살아가도록 격려해주고,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끼거나 성당 다니는 것을 버거워 하는 이들에게는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유감스럽게 교회 내에도 사사건건 불평불만을 하면서 신자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는 이들, 심지어는 툭탁하면 '성당에 안 다닌다', '냉담하겠다'고 큰 소리 치는 이들도 가끔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상대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제는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신 예수님을 본받고 그분의 지혜를 빌려서 이런 이들을 현명한 방법으로 설득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분명하게 경고를 해서 이런 이들도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도록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5. 가이드는 순례자들이 순례를 마치고 만족하는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과 기쁨을 누립니다. 어떤 이들은 돌아가면서 가이드에게 진심으로 ‘수고했다.’,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가이드는 자신이 안내했던 이들의 밝은 모습, 고맙다는 말 한 마디에 순례 동안의 고생이나 우여곡절이 한 순간에 다 사라지고 마음이 뿌듯해질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제도 자신이 행한 말씀 선포와 성사 거행을 통해서 신자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과 보람을 누릴 것입니다. 또한 인생 여정을 다 마치고 신앙 안에서 편안하게 하느님의 품에 안기는 신자들을 보면서 가슴 뿌듯함을 느낄 것입니다. 사제가 예수님을 닮아 신자들에게 진정 봉사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 때, 신자들은 사제의 그런 노력을 잘 알아보고 기도로써, 격려와 응원으로써 응답할 것입니다.

2008년 여름에 서품 받으시는 신부님들이 신자들에게 훌륭한 영적 가이드가 되시도록, 그래서 진정으로 기쁨과 보람을 충만하게 느끼면서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 손희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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