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일반 게시판

설날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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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자 [pink45] 쪽지 캡슐

2004-01-20 ㅣ No.22

 

늙고 병든 아버지와 혼기 놏친 딸, 그렇게 부녀가 단조롭게 살아가는

집에서 아버지는 무료함을 달려려고 늘 딸에게 화투치기를 강요합니다.

현란하게 깔려있는 화투장을 내려다보며 아버지는 생기가 나서 말합니다.

 

(낙양은 꽃밭이로고. 밭이 암만 걸어도 뿌린 씨가 없으니 어쩐다?)

 

아버지가 곁눈질로 딸의 패를 흘깃거립니다.

화투짝이 하도 낡고 눈에 익어 뒷면만 봐도 무슨 패인지 훤히 아는 두 사람,

딸이 아버지의 패를 흘겨보며 화투짝을 팽개치듯 내 놓으면 기다렸다는 듯

얼른 그것을 가져가며 아버지는 희희낙낙 엉구렁을 떱니다.

 

(첫끗발이 개끗발이라더니....)

(첫술에 배부를까요?)

 

딸이 팔을 뻗어 아버지가 해간 약과 단, 그리고 끗수를 헤아리면 아버지는

질겁을 하며 손을 치웁니다.

 

(끝나기도 전에 남의 밥을 보는 법이 어디 있니? 나도 한 게 아무것도 없다.)

(파장인데 어때요. 난 손 털었어요.)

 

(그렇게 사정없이 몰아가면 전 뭘 먹으란 말이에요?)

(굳은자를 가져가는 거야.)

 

거푸 두 판을 이긴 딸에게 아버지는 심술난 얼굴로 이죽거립니다.

(개발에 땀날 때가 있구나.)

 

아버지는 화투 하나를 가지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온갖 게임을 다 알고 있습

니다. 재수패를 떼고 있는 아버지에게 딸이 묻습니다.

(뭐가 떨어졌어요?)

(님이 떨어지고 산보가 떨어졌다.)

 

여류작가 오정희의 소설 (저녁의 게임)에 나오는 대화들입니다.

신부님의 화투의 교육적 가치에 대한 글을 읽고 오래전에 읽었던 이 소설이

새삼 생각나서 다시 한번 들쳐보았습니다. 소설의 절반 이상이 부녀가 화투

치며 나누는 내용인데 그 문장과 정서가 독특하고 신비스럽게 느껴지는 소설

이죠. 여러가지 의미의 대화중에 화투에 관한 대화만 뽑았습니다.

(날개)의 작가 (이상)을 기리는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입니다. 심사위원이었

던 이어령선생께서도 마치 모자속에서 비둘기를 꺼내는 마술을 보는듯 신비

스럽다는 찬사를 보냈던 소설입니다. 그건 그렇고 (고스톱의 교육적 가치)는

전부터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읽어볼수록 심오한 철학이 담겨있고 그 이야기

를 만들어낸 사람은 너무도 머리가 좋은 사람이란 생각에 감탄하게 됩니다.

 

설날이면 대부분 가정들이 여자들은 일하고 남자들은 고스톱을 치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시댁은 아예 화투치기가 없습니다. 술도 못해 식혜와

과일을 먹으며 맹숭맹숭하게 얘기나 하는게 고작이죠. 시댁을 다녀온 후 친정

에 가면 여기선 여자들이 화투를 치고 남자들은 맥주나 과일을 들며 TV를 봅니

다. 동생댁 네명이 고수들입니다. 며느리 넷이 화투를 치는 옆에서 어머니는

개평을 뜯습니다. 나는 서툴고 흥미도 없어 끼지 않는데 어쩌다 한 번 끼면

경로당 화투하냐고 놀림만 받습니다. 그래서 큰동생이  단체로 할 수 있는

게임을 제안한게 돼지잡기와 월남뽕이지요.

일명 (돼지잡기)는 가족 모두가 둘러앉아 각자 천원짜리 한장을 판돈으로

내놓고 화투짝을 일어 돼지그림이 있는 빨간싸리 열끗짜리가 나오면 그 사람이

바닥에 있는 돈을 모두 가져가는 겁니다. 보통 우리 육남매 부부와 어머니까지

열세명이니 13000원을 가져가는거지요. 확률로 볼때 거의 비슷비슷하게 차례가

옵니다. 이것이 너무 단조롭고 시시하다고 새로 도입(?)한 것이 (월남뽕)입니다.

 

(월남뽕), 이 게임은 스릴도 있고 두뇌도 굴려야 합니다.

식구 모두가 둘러앉아 선으로부터 두장의 패를 받습니다. 그리고 다시 선으

로부터 한장의 패를 받았을때 그 패가 먼저 받은 패의 사이에 들어가는

숫자일때 이기는 것인데 그 전에 반드시 돈을 걸어야합니다. 적당한 액수를

물론 바닥에 깔린 돈 전체를 걸어도 되고 승산이 없다 생각하면 포기하면

됩니다. 송학과 비를 가졌을때 1과 12 이니 가장 승산이 높지만 꼭 그렇지

않은데 바로 묘미가 있습니다. 가장 좋다는 송학과 비를 가졌어도 재수가

없으려면 같은 패를 받아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건 돈은 판돈에

그대로 보태지게 됩니다. 성공했을 때엔 자기가 건 액수만큼 바닥에 깔린

돈에서 가져오는 거지요.천원씩 내놓고 시작해도 실패할때마다 돈이 보태져

몇만원으로 늘어나는데 화끈하게 그걸 다 걸고 해서 실패하면 땅을 치고

엉엉 우는 시늉을 하는 동생댁때문에 웃음바다가 되곤 합니다. 나는 늘

가늘게 먹고 가늘게 싸자는 주의여서 이삼천원 이상은 걸지 않습니다.

이 게임을 하다보면 실패할때마다 터지는 탄성과 탄식으로 웃음소리가

그치질 않고 가족간에 유대감이 깊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가족 모두가

함께 참여하여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열 명 이상이 할 때 더욱 재미있는 게임입니다.

 

단체전이 끝나면 남자들은 담소를 나누고 동생댁 네명은 본게임에 들어가고

어머니는 그 옆에 앉아 개평주기를 기다리고 나와 여동생은 텔레비젼을 봅니

다. 나도 어렸을때 겨울방학에 할머니댁에 가면 다섯살 위인 고모와 할머니와

셋이서 희미한 석유등잔불 밑에서 삶은밤을 놓고 밤따먹기 민화투를 다년간

친 경력이 있는데 성장해선 화투를 친 일이 없습니다. 흥미도 없구요.

그래도 어깨너머로 보아 고스톱이 어떤건지는 대충 알고 있지만 실전엔 경험

이 거의 없어 그야말로 경로당 수준입니다.

 어머니가 며느리들 옆에서 개평 뜯는게 안좋아보여 말리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늙은 당신이 젊은 며느리들과 함께 함으로써 소외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닐까?에 생각이 미치면서 참으로 어머니의 딸 둘은 불효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잡기)를 싫어하는 여동생과 나는 늙은

어머니와 놀아 드리지를 못했으니 그게 바로 불효지요. 자신이 싫은 것만

생각하고 늙은 어머니의 마음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이번 설날엔 여동생과 함께 삼모녀가 동생댁들 옆에 판을 벌리고 민화투라도

칠 생각입니다. 그리고 눈치 안채게 살살 돈도 잃어드리며, 늙으면 어린애

된다고 하던데 팔순의 어머니가 이겼다고 어린애처럼 희희낙낙하며 즐거워

하시는걸 꼭 보고싶네요.

효도가 뭐 별건가요?

두꺼운 돈봉투보다는 어머니를 즐겁게 웃게 하는것, 그래서 엔돌핀이 막 돌게

하는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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