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지정환신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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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진 [monicacho033] 쪽지 캡슐

2002-04-17 ㅣ No.3269

내가 그를 만나러 새벽길을 떠난 것은 5.18 광주 항쟁사건이 발생한지 한달이 채 안되는 때였다. 호남고속도로로 들어서자 중간 중간에 세워진 임시 경비 초소에서는 버스를 세우고 헌병들이 버스에 올라 타  여행객들을 일일이 검문을 하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나는 그때 5.16민족상을 탄 한 수상자를 만나러 전북 임실이라는 곳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벨기에인 신부였다.

 

" 내 성은 지랄할 지자요, 이름은 바를정, 불꽃환입니다. "

 

 검소한 시골 사제의 생활을 한 눈에 알게 하는 볼품없는 한 작은 집에서,  벽안의 신부는 방문객에게 서슴없이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지정환신부.

 

 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않은 60년대초에 우리나라에 와서  사목하던 그는  가난한 전북 임실 지역의 실정을 외면할 길 없어 이 마을에 국내 최초의  치즈 공장을 세워, 농민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일으킨 ’새마을 운동가’였던 것이다.

  초행길의 내 눈에 비친  임실 지역은 들도 별로 없고,  척박한  시골, 바로 그곳이었다.  임실에 부임한 지신부는 교회만을 지키고 있지 않고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농민들을 일깨웠다.  쓸모 없는 바위산으로 둘러쌓인  지역 실정을 두루 살핀 뒤 종자돈을 내어 농민들에게  젖 염소를 사서 나눠주고 키우게 했다. 그리고 고국인 벨기에에 들어가 스스로 치즈 제조 기술을 배워 왔다.  

야산에 젖 염소를 놓아  키우게 하고 농민들에게서  매일 아침 신선한 우유를  납품 받았다. 처음엔 그가  "신선한 우유만 납품하도록" 가르쳐도 농민들은 잘 따라 주지 않았다. 우유는 신선해야 잘  엉기고  치즈 숙성이  된다. 그러나  염소가 병이 들어  항생제를 투약했을 때  우유에는 항생제 성분이 그대로 잔류하게 되고 그런 우유로는 치즈를 만들 수 없다.

그는 농민들에게  개인의 작은 욕심보다는 자기를 희생하고 협동하는  삶을 가르쳤다.  80년  당시만 해도  ’피자’는  그리  흔치않은 음식이었다.또  그 피자를 만드는데 쓰는  치즈는 미군 피엑스에서나 나오는 것을 사서 쓰는  때였다. 그는  기술이 서툴러  우유를 쏟아 버리는 일을 수없이 되풀이한 후   마침내  피자를 만드는  모짜렐라 치즈등 각종 치즈를  만드는데 성공했고 이익금을 농민들에게 분배할 수 있었다.

농민들에게 함께 하는 일의 아름다움을  체험시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 임실치즈의 성공 이후 국내기업들도 비로소   용기를 얻어  치즈 생산에 뛰어 들게 된다.

  ’임실치즈’가 본 궤도에 오르자,  농민조합원들 스스로 운영하게 넘겨 주었다. 자신의 손으로 일궈온 치즈 공장에서 과감히  손을 떼었다.

 

당시  지정환신부는 내게 그  얼마전 광주에서 발생한 엄청난 일들을 담은 기사가 실린 외국 시사 잡지를 보여주었다. 그 잡지들에는  국내 언론에서는 볼 수 없는 사진들이 실려 있었다.  국내에 반입되는 외국잡지들도 검열이란 미명하에 면도칼로 도려져 볼 수 없던 때였다. 그는 인간의 생명을 무참히 앗아가는  현실에 분노하고 가슴 아파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한 사제로서 단순히 교회안에 머무는 제사장의 모습만이 아닌, 삶 전부를 던져  가난한 이들, 정의를 찾기위해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행동하는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난주의 신문들에서  지정환신부가 올해의 호암상 사회봉사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음을 읽었다.

  그는 임실치즈를 농민들에게 넘겨준 뒤, 다발성신경경화증이란 병으로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몸을 이끌고   버림받는 이들,  가난한 중증의 장애인들을 부축해서 장애인 복지시설  ’무지개 가족’ 을 일구어냈다. 수많은 장애인들을 교육시켜서 일자리를 주고 가정을 꾸며 주었다.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을 거스리는 일에 과감히 도전하며 이 땅에서 평생을 산 이방인 노사제의 모습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신앙적인 가치관을 갖고  과감히 도전하고 또 봉사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임무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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