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동성당 게시판

[자료]풍납동 본당10년사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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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근 [pnc339] 쪽지 캡슐

2001-08-10 ㅣ No.1258

안녕하세요!

 

지난날 우리의 신앙이 어떠한 변화를 거쳐 왔는지

다시금 그때의 추억과 정열과 사랑을 되돌아 보며

사귐, 섬김과 나눔을 통한 대희년을 거쳐온 현재의 신앙을

어떻게 승화 시킬 것인가를 잠시만이라도 묵상을 가져 보았으면 하는 뜻에서

작년 8월에 발간된 풍납동 본당 10년사 책자에 기록된 글을 순서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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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납동 본당 10년사   

 

 - 차 례 -

 

 1부 풍납동 교회사

   1장 풍납.성내동의 여명기

 1) 유래

 2) 신앙공동체의 형성   

                         -------- 1장 ------

   2장 초기 공소 시절

 1) 공소 설정 배경과 경위

 2) 공소추진위원회의 구성과 활동

 3) 초기 공소활동 및 성전건립의 꿈

                        -------- 2장 ------

   3장 풍납동 본당설립

 1) 초대 이재철 신부의 부임과 활동

 2) 초기의 사목조직과 복음생활

 3) 이웃과 함께하는 공동체

 4) 사목협의회의 구성과 신심단체의 활성화

 5) 성전건축 추진위원회

                       -------- 3장 ------

   4장 성전신축을 위한 노력

 1) 주상배 신부의 부임과 소공동체 활성화

 2) 부임 초기의 사목 조직과 활동

 3) 성전 착공을 위한 노력과 성전건립기금 모금

 ① 신립금 모금

 ② 바자회 모금

 ③ 주임신부의 모금강론

 ④ 폐품 수집

 4) 청소년사목과 여름캠프

 5) 난항을 겪은 초기 건립 공사

                       -------- 4장 ------

   5장 새성전 축성과 대희년의 준비

 1) 임시성전에서의 첫미사

 2) 신자배가운동

 3) 새성전의 축성 및 봉헌식

 

  2부  풍납동 성전 건축약사

   1장 당시의 상황과 성전건축의 취지

   2장 성전건축의 준비-성전건축의 횃불이 타오르다

 1) 성전부지 구입과정

 2) 성전부지의 조건

 3) 형질변경

 4) 성전 건축설계 지침 결정

 5) 설계의 공모

 6) 시공회사의 선정

 

   3장 성전의 착공

 1) 기공식

 2) 토목 공사와 주변민원 발생

 3) 골조 공사와 설계변경

 4) 부분입주와 공사일정

 5) 성전건축상의 세부문제

 6) 성탄미사

 7) 성전의 내부장식과 성물들

 

   4장 축성미사와 본당설정 10주년 기념

 

  3부  사진으로 보는 풍납동 본당 10년

 

  4부  우리 본당의 단체사

 

  5부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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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풍납동 교회사

 

제4장 성전신축을 위한 노력

 

1) 주상배 신부의 부임과 소공동체 활성화

본당승격 6주년을 맞이 하면서 이제 풍납동본당은 성장을 위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그것은 성전신축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2대 주임신부로 주상배(안드레아)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의 성전신축은 본격적으로 모습을 갖추었다.

1994년 9월 9일 새로 부임해 온 주상배(朱尙培) 신부는 1939년 12월 19일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여 1960년에 부제서품을 받았다.

1965년 12월 16일 사제로 서품된 후 10여년 동안에 걸쳐 군 사목을 담당하고 1977년 5월 31일 육군 소령에 편후하였다. 그리고 당산동, 논현동, 동작동 주임을 거쳐 풍납동 본당으로 부임하였다. 특히 논현동 성당 주임신부로 재직할 당시 성당을 신축 봉헌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풍납동 신앙공동체에게 주신부의 부임이 주는 의미는 남다른 것이었다.17) 주신부의 사목방향은 1995년과 1996년 본당사목지침에 잘 나타나 있으며, 부임초기의 사목지침은 그의 재임기간 내내 꾸준히 실천되었다.

그는 우선 지속적인 신앙쇄신과 본당공동체의 일치와 친교를 위해서 ’각 가정과 소공동체의 활성화’를 통한 ’소공동체활동의 정착’을 강조했다. 그리고 1995년은 새 성전의 착공을 목표로, 1996년에는 ?성전건립에 능동적 참여?를 전신자들에게 촉구하였다.

교우들의 강한 열망, 그리고 주임신부의 안정된 본당운영을 바탕으로 복음을 생활화하고 성전건립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위한 구체적인 활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주임신부는 먼저 성서읽기, 성서필사, 신앙강좌, 성령기도회, 반모임 및 피정과 같은 활동을 통해 신자들의 신앙심고취를 도왔으며, 아울러 성가대, 예비자모임, 복사단, 반장단 등을 비롯한 각 분과의 활동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주임신부는 본당 사목 외에도 M?E (Marriage Encounter--부부일치운동)활동에 관심을 갖고 교구내의 M.E. 지도신부로 활동하는 한편, 본당에서도 성가정의 중요성과 부부간의 신앙 및 가정화목을 특히 강조하였다.  

주임신부의 사목지침이 구체적인 활동을 통해 가시화되고 전례와 교리의 기틀이 닦이면서 한편으로는 미사 때마다 성전건립을 위한 기도와 봉헌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특히 성전신축기금 조성을 위한 보다 효과적인 방안들이 모색되었다.

무엇보다도 성내동 동신빌딩을 임시 성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 벌써 7년 째 계속되어 오던 터라 하루라도 빨리 성전과 사제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신자들의 바램은 새로운 모색의 원동력이 되었다.

1995년 10월 초에 성전건축을 위한 바자회가 열렸을 때 주임신부, 회장단 및 교우들의 기쁨에 넘치고 의욕에 찬 분위기는 일치단결해서 훌륭한 본당으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열망을 잘 반영해 준 것이라고 하겠다. 이제 힘겹지만 그러나 힘찬 출발은 마른 땅을 서서히 옥토로 다지는 발돋움처럼 의미있는 작업들로 더욱 속도가 생겨났다.

 

2) 부임 초기의 사목 조직과 활동

주임신부의 부임 초기에는 기존의 사목 위원이 모두 연임되었고 평신도 사목 활동의 공백이 없었다. 주임신부는 윤리, 도덕, 신학에 관한 문제 이외의 대부분의 현안들은 사목협의회에 힘을 실어주었으며, 사목협의회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다.

그럼으로써 성숙한 사목협의회로 성장하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아울러 주신부는 재임기간 내내 평신도들에 의한 교회를 지향하고 또 부단히 강조했다.

1994년 12월 18일에 풍납동본당에서는 사목회 활동에 대한 평가회가 있었다.

사목활동 평가회는 이재철 신부 재임당시부터 시행되었는데, 주신부의 부임 이후에는 정기적인 행사가 되었다. 평가회에는 구역장과 각 단체장들이 참석하여 당초에 계획한 업무의 수행과정에 대한 엄정한 평가를 했으며, 이후의 활동에서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한 중요한 자리가 되어 주었다.

평가회에서 모든 사안의 결정은 다수결로 결정하게 되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사목협의회에서 오랜 토의를 하여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사제가 신중히 검토한 후 결정하였다. 그리고 중대한 문제의 경우에는 사목협의회에서 결정하도록 하여 풍납동 신앙공동체가 평신도들의 공동체로 거듭나도록 의견조정하는 전통이 이미 만들어져 왔었다. 평가회는 교우들의 일치와 교회의 활성화가 진정한 평신도의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중대한 기초임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부임 첫해의 사목임원과 단체장은 다음과 같다.

 

제7대 사목협의회

총회장    :전홍재(미카엘)

부회장    :정정웅(베드로), 박정길(에바리스또), 조칠성(베드로)

총  무    :권종일(야고보)

분과위원장:기획분과 김수관(요한),  재정분과 한종수(베드로), 전례분과 남승례(아가다),

            선교분과 박성목(요한), 교육분과 김종배(세자요한),

            청소년분과 서영국(이냐시오), 사회복지분과 최재곤(베드로),

            시설관리분과 김종진(데오도로), 홍보분과 주봉용(안셀모),

            노인분과 강천형(안토니오), 남성구역분과 김명천(방지거),

            여성분과 이숙희(젬마), 2000년대복음화위원장 전익환(미카엘)

 

3) 성전 착공을 위한 노력과 성전건립기금 모금

1995년은 뜻깊은 해였다. 11월 12일에 최창무 주교를 모시고 성전 부지에서 기공식을 가졌으며, 드디어 본당 신축의 첫 삽을 뜨게 되었다.

신자들은 한결같이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고, 상당히 들떠 있었다. 웅덩이와 늪으로 뒤덮혀 발딛을 곳이 없고 온갖 쓰레기로 쇠파리가 들끓던 성전부지를 여러 해 동안 치우고 돌을 고르고 하면서 땀을 흘리던 여름날의 기억들, 그리고 제대로된 성전을 어서 이루도록 해달라고 목자와 신자들이 간절하게 올리던 기도의 염원들…. 온갖 기억들을 한번에 떠올리며 많은 신자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1988년의 공소시절부터 성전이 완공된 현시점까지 새 성전 건립기금 모금을 위한 수도자와 신자들의 활동과 노력은 그 기간도 매우 길었을 뿐더러 여러 가지 형태로 다양하게 시행되었으므로 그들이 기울인 노고와 고통은 더욱 남다르다고 할 것이다.

신자들의 활동으로는 3차에 걸친 신립금 모금, 바자회, 2차 헌금, 폐품수집, 각종 생활용품 판매 등이 있고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신자들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구내의 여러 본당을 순회하며 모금강론을 펼치고 각종 행사 때 본인을 위한 물적 헌금을 건립기금으로 아낌없이 봉헌하는 등 전 신자와 성직자, 수도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주님께 아름다운 성전을 봉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① 신립금 모금:우선 신립금 모금에 대해 말해보자. 새 성전건립을 위한 신립은 천호동본당의 공소시절인 1988년부터 시작되어 3차에 걸쳐 시행되었다.

초로의 한 교우는 자녀들이 주는 용돈을 틈틈이 모아 신립금을 선뜻 내놓으면서 자기보다는 주님의 집이 우선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고, 어떤 맞벌이 부부는 매월 파출부를 고용하다가 신립금을 내기 위해 힘든 가운데서도 자기들이 틈틈이 직접 가사일을 하면서 그 돈을 신립하였다.

주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이 사는 집을 줄여 신립한 교우도 있었고, 평생 간직했던 금부치나 보석 등 패물류를 팔아 신립한 교우는 부지기수였다.

한 신자는 회고하건데, 3차 신립시 직장을 그만두게 되어 형편 상 도저히 신립할 수 없었으나 오랜 성체조배와 기도 끝에 성서귀절의 ’있는 자의 헌금보다는 가진 것 모두를 내어놓은 과부의 헌금을 주님께서는 더욱 기뻐하신다’는 내용을 떠올리며, 2차 신립 때보다 더 많은 신립을 하였다. 그 교우는 IMF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다행히 사업이 순조로워 신립도 약속대로 지킬 수 있었고, 가정도 직장에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꾸려나갈 수 있게 되어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세속에서의 모든 재물이 자기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잠시 맡겨두신 것임을 깊이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이와 같이 눈물겨운 일화를 남기면서 이루어진 3차례의 신립금 현황은 다음과 같다.

 

② 바자회모금:성전착공을 위한 노력들 중에 바자회 모금을 빼놓을 수가 없다.

성전 건립을 위해 본당에서는 매년 9월과 10월에 각종 바자회를 열어 그 수익금을 건립기금으로 납부하였다. 주로 음식바자회가 주종이었으므로 구역별로 음식을 준비하여 판매를 하였고, 자모회에서는 커피와 음료수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판매하였다.

바자회가 열릴 때에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풍납동과 성내동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동네 잔치의 성격을 띠었다.

특히 1995년에는 기공식에 앞서, 부족한 건축 자금을 구하기 위하여 3월 초부터 대바자회를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바자회 준비위원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바자회의 운영방식과 내용을 꼼꼼히 토의했고 어려움이 있을때마다 기도로써 하느님께 청했다. 그런데 바자회를 개최하기까지는 개최여부와 시기에 대하여 우여곡절이 있었다. 아직 기공식도 하지 않았으며, 2차 신립이 이제 막 끝날 무렵인데다 이어서 바로 3차 신립을 해야 하는 실정이었으므로 시기상조가 아닐까하는 조심스런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곧 기공식을 가질 예정이므로 대바자회를 열어 성전건립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신자들의 찬성론이 뜨겁게 대립되는 국면이 전개되었다. 결국 6월 6일 주임신부와 전 사목위원이 열띤 토론을 거친 의견수렴 후에 바자회 개최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약 6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철저히 상황을 분석한 뒤에야 대 바자회를 개최하여 성황리에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신자들이 단합하도록 주님이 배려하셨음을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바자회는 봉사자들의 많은 노력과 주임 신부의 깊은 관심으로 9월 23일과 24일 이틀에 걸쳐 영파여고 운동장을 빌려 교구 내의 180여개 본당의 협조를 받아 성황리에 완료되었다.

바자회 명칭은 ’성전 건립을 위한 한마음 바자회’였다. 바자회는 구역별 음식판매, 기증품 코너 운영, 각종 생활용품 판매, 타본당에 티켓판매 그리고 신자들의 장기자랑으로 구성되었다. 기증품 코너는 신자들로부터 생활용품, 귀중품 등을 기증받아 운영하였는데 싼값에 판매를 하여 호응이 좋았으며 어떤 코너는 개점한 지 불과 2시간 만에 매진되는 열화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타본당에 티켓판매는 봉사자들이 2명 1개조로 하여 총186개 본당을 2회 이상 방문하여 판매하였는데 주상배 주임신부는 봉사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하남시의 ?고골?에서 발대식을 가졌으며, 각 본당의 신부에게 손수 편지를 쓰고 고급포도주 두 병씩을 선물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따뜻하게 성의껏 도와주는 본당이 많았다. 적은 지면에서나마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1995년 바자회와 얽힌 일화도 많다.주) 바자회는 준비부터 행사 당일까지 준비가 워낙 철저해선지 진행이 일사천리로 잘 이루어져 타 본당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프로그램을 복사하여 자기들의 행사에 인용하기도 하였고 바자회의 경품 대상인 ’엑셀’승용차는 당시 성가대에서 봉사하고 있던 윤주대(스테파노) 교우가 10만 대 1의 경쟁을 뚫고 당첨이 되기도 하였다. 바자회때 신자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성전기금을 모금하는데 애를 쓰던 일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떤 교우는 앞니가 부러져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도 바자회에 참석하여 음료수를 판매하는가 하면, 어떤 교우는 다리에 깁스를 하고도 바자회에 나와서 커피를 팔아 매상을 올려 보겠다는 열정이 모두 보기 좋았다. 각 본당으로 티켓 판매를 나갔을 때 어떤 본당에서는 신부님이 쓰신 책을 주면서 책을 팔아 그 수익금을 쓰라고 하는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어떤 본당에서는 돈이 없으면 성전을 짓지 말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집이 없는 설움을 겪어 본 우리는, 그리고 주위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던 우리는 항상 감사해야 한다. 특히 다른 많은 본당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것을 꼭 기억하고 마찬가지로 다른 본당들을 도와야 하리라.

그동안 바자회를 통해 얻은 수익금 현황은 다음과 같다.

 

③ 주임신부의 모금강론:한편, 주임신부는 부임이래 성전건립 공사를 위해 전신으로 노력하는 중에서도 부족한 공사금액을 메우기 위한 신자들의 짐을 덜어주고자 주님께 봉헌하는 정신으로 서초 본당 외 6개 본당을 순회하며 모금강론을 하였다.

95년 8월부터 여러 본당을 순회하며 성전건립기금모금을 위한 특별 강론을 하였는데 주로 M.E. 부부와 레지오 단원들이 봉사에 참여하였다. 주임신부는 심장병 수술을 받아 건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좋은 성전을 지어드리고자 모금강론의 강행군을 나섰으므로 신자들은 이에 더욱 고무될 수밖에 없었다.

주신부는 심장병 수술당시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성전 건립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잠이 들었다가 그대로 깨어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하엿으며, 주임신부의 성전건립을 향한 열정에 스스로 고개 숙여 자신을 되짚어 보는 신자가 많았다.

당시 주임신부가 모금한 신립금은 3억 9천 만원에 달하였는바 전체 공사 금액의 7.1%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모금강론으로 모금된 신립금과 헌금은 다음과 같다.

 

④ 폐품 수집:초대 본당주임 이재철 신부는 전 신자가 한 달에 1번씩 페품수집을 하여 그 수익금을 성전건축에 사용하자고 사목협의회에 제의하였다.

단순한 폐품수집에 그치는 것이 아닌, 전신자가 모여 성전부지의 땅고르기, 지목 변경 전 농작물경작(당시 지목이 밭이었으므로 공사가 시작되기까지는 농작물이 심겨져 있어야 함), 폐품수집 후 회식을 통한 소공동체 활성화, 성전건립 분위기조성 등 일석오조의 목적을 위한 제안이었다.

그리하여 1991년 4월 7일에 제1차 폐품수집이 시작되어 매월 1회씩 새성전 부지로 전신자가

각종 폐품을 가지고 오면 재활용업체에서 트럭을 동원하여 수거해 갔는데 이때 장정들은 폐품을 운반, 계근, 상하차하였고 자매들은 들은 간단한 주류와 안주를 준비하여 폐품수집이 끝나고 단합대회를 가짐으로써 일석오조 중에서도 특히 소공동체의 활성화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

폐품수집은 최초에는 이와 같이 전 신자가 모였으나 구역이 세분화되고 점차 신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각 구역별로 폐품수집을 하여 그 수익금을 본당에 납부하도록 했는데 이때도 폐품수집 후의 구역단합 행사는 계속되어 일치단결된 소공동체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구역 간의 선의의 경쟁이 유발되어 새 성전에 벽돌 한 장이라도 내 손으로 쌓아야겠다는 신자들의 뜻이 응집하여 새벽마다 고수부지에 나가 빈 병과 깡통을 줍다가 알루미늄캔이 튀어 실명을 할 뻔했던 교우도 있었다.

리어카를 끌고 수퍼와 병원 등을 돌며 빈 병과 종이를 수거하다 보니 일명 넝마주이로 오인받아 불순한 대접을 받아 씁쓰레한 기분이 들기도 했었지만 새 성전을 위해서는 그것마저 겸손으로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는 교우도 있었다.

어떤 형제는 폐품수집을 하다 다리를 다쳐 병원을 여러 날 다니기도 하였고, 어떤 형제는 올림픽공원에서 빈 박스를 모으다가 청소부로 오인되어 청소부들 모임에 빨리 안간다고 야단을 맞았다며 쓴웃음을 짓기도 하였다. 병원의 폐품을 수집하다가 주사바늘에 찔려 병균에 감염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던 교우도 있었으나 성전건립을 위한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편 폐품수집은 98년 들어 재활용품값 하락으로 수고에 비해 수익금이 너무 적었고 그나마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일정량의 재활용품 제출을 의무화하고 일반 부녀회에서도 폐품 수집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폐품 배출량이 점점 줄어들자 구역단위의 폐품수집은 중단하게 되었다. 폐품수집으로 모아들인 건립기금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신자들이 폐품 수집을 하고 바자회, 물품 판매, 2차 헌금을 하고 주임신부의 타본당 모금강론을 통해 풍납동본당의 성전신축은 한층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금을 하면서 풍납동 신앙공동체는 더욱 중요한 사실을 서로 간에 깨우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 신자들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한마음으로 준비하고 노력하는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이며, 그것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성전기공식이 끝나고 11월 25일에는 한마음 성가대에서 주임 신부의 서품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성가 발표회를 가졌다.

 

4) 청소년사목과 여름캠프

한편, 청소년 사목을 담당하였던 초대 보좌 신부인 이철희 요한금구 신부가 이임하고 수색본당의 김일영 베드로 신부가 95년 12월 1일자로 부임하였다. 김일영 신부는 일반 대학을 졸업하고 기업체에서 사회생활을 하다가 성소를 받아 36세의 늦은 나이에 서품을 받았다. 특히 청소년 사목에 열심이어서 사제관 거실과 방의 모든 벽은 청소년 사목에 관련된 각종 도표와 현황들로 도배되어 신부님의 열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당시에는 성당 관할 구역이 무척 넓어 어린 아이들이 주일 학교를 다니기에는 힘이 들었고 결석을 하는 어린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김일영 신부는 버스 두 대를 렌트하여 풍납동 방면과 성내동 방면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등?하교를 순조롭게 하였는데 처음에는 주일학교 교사들이 탑승하였고 이후에는 자모회에서 봉사를 하였다.

이 또한 김일영 신부의 어린이를 위한 깊은 관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1996년 교구의 사목지침은 젊은이들의 복음화인데, 본당의 경우 새 보좌신부의 부임과 더불어 최근까지도 일관되게 청년 성서그룹이 활성화되고 청소년과 청년들의 소공동체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더욱이 최근까지도 일관되게 본당에서 소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한 세부활동 가운데 특히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부분은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어려서 신앙을 접하면 성인이 되어도 맑은 영혼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본당에서는 청소년을 위해 보다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하려고 애쓰고 있다.

역대 보좌신부들의 청소년 사목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특히 감동적이며, 자모회, 초등부, 중.고등부 교사들의 노력 또한 각별했다. 여름신앙학교, 여름캠프, 성탄제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은 준비와 기도로 행사를 치뤘으며 밤을 새며 준비하던 많은 분들의 정성어린 손길을 기억한다.

여름캠프를 준비할 때는 특히 걱정이 많았는데, 초창기에는 캠프장에서 직접 취사를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장마가 끝났는데도 갑자기 폭우가 몰아치거나 하면 정말이지 그처럼 당황스러울 때가 없었다. 매 끼니마다 음식을 준비하는 문제보다는 물건들을 정리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는 일을 걱정하며 비가 그치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수녀님, 아이들 그리고 신자들 모두가 함께 기도했음을 떠올리게 된다.

1996년 여름캠프에 무더운 여름 땡볕인데도 뜨거운 불을  옆에 두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돈까스를 튀겨내던 일은 두고 두고 얘기되며, 자매들이 모두 음식준비를 하느라 바쁘니까 보좌 신부가 간난아기를 돌보아야 했던 일화도 있다.

그 후부터는 경제적으로는 다소 부담이 되더라도 수고를 줄이고 보다 위생적으로 음식을 준비해주는 캠프장을 택하게 되었다. 1999년에는 가족이 전부 함께 참가하는 여름캠프가 계획되었다. 아이들은 선생님, 친구들과 함께 자신들의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을 했고, 부모들은 오랜 만에 아이들로부터 벗어나 오붓하게 동해안 바닷바람을 쐬거나 등산을 가는 등 가족 전체가 만족하는 그러한 캠프로서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전적인 가족캠프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1996년 2월에는 한 마리아 원장수녀와 권데레사 줄리 수녀가 이임하고 김희환 안나노엘 수녀가 새로이 원장수녀로 부임했다. 유머가 풍부하고 체구에서 보여지듯 박력있는 한 마리아 수녀와 체구도 작고 자애로운 어머니같은 김 안나노엘 수녀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그동안 본당에서 수고하고 봉사한 수녀들은 다음과 같다.

박 젬마, 박 안나, 박 마리아, 안 마리나, 김 요안나루시, 이 루시아, 한 마리나, 권 데레사줄리, 김 안나노엘, 임 젬마, 고 아델라이네 등 본당 수녀들은 초등부 주일학교, 예비자 교리교육, 본당의 사목에서 많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작은 지면을 통해서나마 우리 신자들의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5) 난항을 겪은 초기 건립 공사

기공식을 마치고 공사에 들어가자 예상했던대로 주변 민원이 쇄도하면서 민원인들이 공사장을 가로막는 실력 행사등으로 공사는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본당에서는 법적으로 대응하였고 96년 7월부터는 민원인들의 공사장 접근을 막고 개별적으로 설득작업을 벌여 공사를 재개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사중단, 더 좋은 성전을 짓기 위한 설계초안 검토, 부족한 신축 자금 등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본당 공동체는 주님께 의지하기로 하고 97년 5월부터 ’성전신축을 위한 묵주기도 100만단 바치기’를 시작하였다.

 

기도 후 성전입구에 마련된 기도함에 넣어 집계하곤 하였는데, 성전이 완공된 시점인 99년 8월경에는 160만단을 넘게 되었다.

 

      성전건립을 위한 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우리 풍납동 공동체에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찬미와 감사를 드리나이다.

 

아버지께서 머물러 계시며,

당신 안에서 삶의 보람과 희망을 갖는,

모든 이들이 함께 모여 찬미드리고,

또 우리 후손들에게도 아버지를 심어줄 수 있는

새 성전을 건립하고자 하나이다.

이제 아버지께 의탁하여 간구하오니, 이 성스러운 일에

뜻을 같이 하여 정성어린 봉헌을 하는 이들을

굽어 살피시어 축복하여 주시고,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기꺼이 들어 허락하여 주소서.

또한 이 일을 통하여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능력을 드러내시어 영광을 누리시고

우리 모두가 당신 사랑 안에서 참된 하나를 이루며,  

아직도 아버지를 모르는 이웃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한편, 일시 중단된 성전신축공사가 재개되어 풍납동 전신자들이 자신들의 성전을 짓기 위해 힘을 결집하는 상황에서, 풍납동 본당 설립이래 2명의 사제가 서품을 받았다.

풍납동본당은 은혜를 받은 성당으로 이계천(요한) 신부와 김태호(안토니오) 신부가 서품을 받았으며, 예비신학생의 숫자도 많은 편이다. 그리고 예비수녀는 아니지만 여학생들을 위한 모임도 있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계천 신부는 97년 7월에 개포동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품당시 본당 청소년들의 열화와 같은 환영은 개포동일대를 완전히 뒤덮었다.

이재철 신부를 아버지 신부로 모셨던 이계천 신부는 7월12일 본당에서 사제 서품 후 첫 미사를 집전하고 신당동본당의 보좌로 부임하였다.

 

1997년 10월에서 11월 사이에는 더 좋은 성전을 짓기 위한 설계변경안을 놓고 찬반양론이 격렬히 대두되어 신자들 간에 분위기가 냉랭해짐에 따라 수차례 조정작업을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일치된 합의점을 도출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일부 반대의견도 있었으나 다수의 의견이 노출 콘크리트 변경과 사제관 위치 재선정으로 인한 공간확보를 선호하였으므로 설계변경과 함께 공사는 다시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997년 11월 28일에는 그동안 청소년은 물론 성인신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던 김일영신부가 이임하고 이충열(디도) 보좌신부가 새로이 부임하였다.

이충열 신부는 음악에 남다른 조예가 있어 청년들의 악기연주를 직접 지도하였다. 게다가 청소년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을 전달하려고 특강형식의 새로운 주일학교운영을 시도했는데, 이러한 운영방식은 9지구는 물론 교구에서도 처음 시도되는 것이었으므로 성공여부의 귀추가 주목되었다.

 

1998년 1월 16일에는 본당에서 두 번째로 사제가 배출되었는데 김태호 안토니오 신부가 수원 교구좌 성당인 정자동에서 서품을 받았다. 김태호신부는 1월 18일에 본당에서 첫미사를 집전하고 풍납동신자들과 아쉬운 작별을 나누며 수원교구 수원시 정자동 보좌신부로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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