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언니, 이러실 줄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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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호 [cary] 쪽지 캡슐

2001-03-05 ㅣ No.2609

어젯밤 늦게 아이들이 무감각하게 켜 놓은 컴퓨터를 끄려다가 이왕이면 하고 게시판을 열어본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제목에 웬 제 이름이... 깜짝 놀라 열어 보니 세상에...

모니카 언니, 무슨 억하심정으로 절 이렇게 궁지에 몰아 넣으셨는지요.

머리카락 한 올도 안 보이게 꼭꼭 숨고 싶은 심정입니다.

당장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답을 올리고 싶었지만 잠을 놓치게 될 것 같아 자리에 누웠습니다. 하지만 놀란 가슴이 콩닥거려 잠이 와야 말이지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나를 대학 2학년 겨울로 데려갔습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마자 난 짐을 꾸려 서클 선후배들과 함께 답사여행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그곳 토박이 남학생 둘을 가이드 삼아 계룡산 동학사를 거쳐 갑사까지 답사를 하기로 하고 동학사 부근의 식당에서 짐을 풀었습니다. 눈 덮인 계룡산에 비마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 다음날 일정이 걱정이련만 철없던 우리는 곡차를 옆에 끼고 밤새 시를 낭송하고 노래를 불렀지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다음날 다행히 비는 멎었지만 안개가 자욱해 산행하기에 썩 좋은 날은 못 되었지요. 그러거나 말거나 우린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을 올랐고, 그때도 씩씩했던 전 누군가가 생각 없이 가져온 옆가방을 안내를 맡은 한 남학생과 끈 하나씩을 나누어 쥐고 갑사로 향했습니다. 갑사의 남매탑에 사리가 얼마나 들었건 말건 전날부터 분위기에 취한데다 안개 속 대화도 그럴싸해 가방끈을 사이에 두고 그 남학생과 전 그만 정이 들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열댓명도 넘는 일행 속에서 그런 감정을 내 보일 개재가 아니어서 그냥 마음이 그랬다는 거지요.

이튿날은 사람 없는 공원에서 남학생들의 요청으로  빙 둘러서서 양주별산대의 기본 춤사위를 너울너울 펼쳤지요. 춤을 못 추는 사람은 추임새를 넣고요. 그때만 해도 서울 일부에서나 탈춤이 막 보급되기 시작할 때여서 지방 남학생들은 자유로운 우리의 춤사위에 그야말로 뿅 갔지요.

저녁 기차를 떠나보내는 그 남학생의 눈엔 막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킬 무렵 그 남학생으로부터 펜으로 공들여 쓴 긴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그날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한 일이라곤 편지글을 읽고 또 읽어 외다시피 한 일 뿐이건만 아무리 잠을 청해도 들뜬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몸을 바닥에 뉘고 있어도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느낌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그 후 서로에게 간 편지가 답이 될 때를 못 기다리고  편지, 편지...

 

이제 곧 그 무렵의 제 나이가 될 딸을 둔 제가 이런 객쩍은 얘길 꺼낸 건 저를 과분하게 좋게 봐 주시고 아끼는 분들께 고맙다는 말 대신 실없는 얘기라도 들려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영화 '겨울여자'가 대박을 터뜨렸던 그해 겨울은 음악감상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주문이라도 한 듯  '히브리 포로들의 합창'(베르디의 나부코 중에서)이 흘러,  겨울은 사랑이 시작되는 계절이라는 생각을 각인시켜 주었습니다.

 

업무가 폭주하는 3월은 가뜩이나 일이 서툰 나를 겁먹게 하지만 언니 말씀대로 참 사람을 가르치는 인사가 되려고 애써 보렵니다. 아이들 눈에 제가 정말 자신들을 좋아하는 것으로 비친다면 그건 제가 많은 사람들로 받은 사랑이 넘쳐나서일 겁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맡을 일이 버거워 결정을 유보하고 있을 때 사랑이면 다 된다고 거듭 확신을 준 내 오랜 친구 바오로,

겨우내 누비고 다닌 도봉산 골짜기 눈밭에서 소주를 따라주시며 내 삶의 길동무가 되어 주신 안드레아 형부,

가까이 있는 사람 중에도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모니카 언니,

생애 첫 메일을 나를 격려하기 위해 보낸 데레사, 그리고 그렇게 하라고 사정없이 몰아댄 사베리오,

내 숨겨놓은 첫사랑 같은 안나....  모두 내겐 넘치게 고마운 분들입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나날이 드세져 감당하기 힘들다는 십대 아이들을 마음으로 품게 해 주는 원동력은 역시 갖가지 충격적인 방법으로 나를 단련시킨 천방지축 우리 딸아이입니다.

 

쌍문골 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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