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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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규환 [qhwan111] 쪽지 캡슐

2014-07-28 ㅣ No.503




2014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제1독서 예레 13,1-11

1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서 아마포 띠를 사, 허리에 두르고 물에 담그지 마라.” 2 그래서 주님의 분부대로 나는 띠를 사서 허리에 둘렀다. 3 그러자 주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나에게 내렸다. 4 “네가 사서 허리에 두른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프라테스 강으로 가거라. 그리고 거기 바위 틈새에 띠를 숨겨 두어라.” 5 주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대로, 나는 유프라테스 강으로 가서 띠를 숨겼다.

6 여러 날이 지난 뒤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유프라테스 강으로 가서, 내가 너더러 거기 숨겨 두라고 명령한 띠를 가져오너라.” 7 그래서 유프라테스 강으로 가 흙을 헤치고, 숨겨 둔 곳에서 띠를 꺼냈다. 그런데 그 띠가 썩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었다. 8 그때 주님의 말씀이 다시 나에게 내렸다.

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도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그처럼 썩혀 버리겠다. 10 이 사악한 백성이 내 말을 듣기를 마다하고, 제 고집스러운 마음에 따라 다른 신들을 좇아 다니며 그것들을 섬기고 예배하였으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띠처럼 되고 말 것이다. 11 이 띠가 사람의 허리에 붙어 있듯이 내가 온 이스라엘 집안과 온 유다 집안을 나에게 붙어 있게 한 것은 ─ 주님의 말씀이다. ─ 그들이 내 백성이 되어 명성과 칭송과 영광을 얻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


복음 마태 13,31-35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31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요즘 자신의 여행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관심 있게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로 제가 다녀온 여행지를 이야기하고 있기에, 제가 보았던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책을 재미있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책을 보면서 놀라운 것은 제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지나갔던 곳인데, 이곳에서 작가는 많은 것들을 느꼈고 책의 지면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내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시간에 있다고 해도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렇게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고, 나와 다르면 무조건 반대할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이러한 모습이 옳은 것일까요?

그러한 획일화가 때로는 편리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쫓아만 가면 되니까요. 그러나 획일화를 통해서는 참 기쁨과 평화를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요. 당신 뜻을 무조건 또 억압적으로 따르게 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그 길이 올바른 길이라 할지라도 자유 없이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때로는 죄로 물들어도, 그리고 주님께서 가장 아파하는 모습일지라도 스스로 변화되고 스스로 당신 앞으로 나오기를 바라면서 계속해서 기회를 주십니다.

이렇게 전지전능하시고 완벽함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다양성을 철저히 인정하는데, 정작 부족함과 나약함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단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까요? 바로 그 사람 안에 있는 또 다른 모습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당신의 다스림을 어떤 씨앗보다 작으며 매우 매운 맛을 지닌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압박과 압력을 받으면 본래 가지고 있던 잠재력이 극대화됩니다. 그 모습을 예수님의 제자들에서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누구보다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안에 들어 있던 위대한 능력에 힘입어 복음의 씨앗이 자라 세상 모든 곳으로 퍼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도 주님의 위대한 능력의 힘입어 복음이 씨앗이 자라 커다란 일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이웃을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단죄해서는 안 될 것이며, 쉽게 판단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활동하는 주님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계단의 처음과 끝을 다 보려고 하지 마라. 그냥 발을 내딛어라(루터 킹 목사).



두려움을 없애시는 분... 주님... .

‘힐링’, ‘테라피’, ‘치유’ 등등의 단어들이 넘쳐나는 시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서점을 가도 이러한 단어를 포함시키고 있는 책들을 쉽게 만날 수 있고, 또한 방송에서도 이러한 주제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이 ‘아픔’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주제의 방송과 책들이 넘쳐나는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제 주위에서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의 아픔들이 사회의 커다란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예전에는 없었을까? 예전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자연스럽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의 아픔을 커다란 두려움으로 받아들입니다. 전전긍긍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불행만을 떠올리는 것이지요.

행복하지 못한 두려움, 불행이 계속될 것 같다는 두려움, 미래가 보이지 않는 두려움, 사람들이 나를 외면할 것이라는 두려움. 그 모든 두려움들이 결국 우리가 간직해야 할 희망과 기쁨을 빼앗아 버렸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요즘을 살고 있는 이 때 더욱 더 주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두려움을 없애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커다란 힘을 얻는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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