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꼭필독] 믿음의 일/노동(work), 사랑의 노고, 그리고 희망의 인내 - 1테살로니카 1,3 [심장] 969_토미즘학습 773_love 912_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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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8 ㅣ No.1579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질문 1: 성경 본문 전체에 걸쳐, 향주삼덕(the three theological virtues)들, 즉 믿음(faith, 신덕), 사랑(charity, 애덕), 희망(hope, 망덕)에 대한 첫 번째 구체적인 언급은 어디에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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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 찬미 예수님!

 

 

 

 

 

질문 1에 대한 답변: 저술된 연대순에 있어, 1코린토 13,13아니라, 이 서간보다 약 5년 정도 앞선, 다음과 같은, 1테살로니카 1,3  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4911&gomonth=2011-10-16

(발췌 시작)

우리는 끊임없이 3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work of faith, 즉, 신덕/신앙의 일(노동, 勞動)]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이상, 발췌 끝)

 

1. 들어가면서

이번 글에서는, 1테살로니카서 1,3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1-1. 우선적으로, 1979년에 개정된 현재의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1테살로니카 1,3가해 연중 제29주일 제2독서(1테살로니카 1,1-5ㄴ)홀수해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제1독서(1테살로니카 1,1-5.8ㄴ-10)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다음의 자료에 의하면, 1테살로니카 1,3은 그 이전의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즉, 16세기 중반의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확정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주님 공현 대축일 이후 제6번째 주일의 제1독서(1테살로니카 1,2-10)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http://catholic-resources.org/Lectionary/Roman_Missal.htm

 

1-2. 그런데, 전혀 예상 밖으로 그리하여 상당히 놀랍게도, 1테살로니카 1,3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본문 중에서 인용되고 있지 은, 다음의 주소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110610121307&page=1061

 

1-3. 그리고, 예를 들어, 향주삼덕(the three theological virtues)들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핵심 문헌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본문 중에서도 1테살로니카 1,3이 인용되고 있지 은, 여기를 클릭하면, 인터넷 구글 검색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i) 왜 이러한 예상 밖의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ii) 이러한 예상 밖의 일의 발생의 또한 예상 밖의 긍정적(?) 결과에는 어떤 것이 포함될 수도 있는지에 대하여,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2.

2-1. 4세기 말경에 성 에로니모(St. Jerome, 347-420년)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어 마련되었다고 알려진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1테살로니카 1,3

출처: http://www.newadvent.org/bible/1th001.htm

(발췌 시작)
3 memores operis fidei vestræ, et laboris, et caritatis, et sustinentiæ spei Domini nostri Jesu Christi, ante Deum et Patrem nostrum:
(이상, 발췌 끝)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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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의 저서[제목: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저자: Deutsche Biblegesellschaft Stuttgart, 1981(독일어본), 1987(영어본)](참고 자료 2) 및 참고 자료 1에 의하면, 이 부분은 현재까지 확인된 역사적 사실들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참고 자료 1: http://en.wikipedia.org/wiki/Vulgate [Authorship]

참고 자료 2: http://books.google.co.kr/books?id=2pYDsAhUOxAC&pg=PA190&lpg=PA190&dq=
%22changes%22+%22vulgate%22+%22nova+vulgata%22&source=bl&ots=bgUwbbJwxt&sig=
AoU7rdpobx5avHEiFn-QZPvaEQ8&hl=ko&sa=X&ei=QKdFVKWPNaXZmgXUt4Ao&ved=
0CB0Q6AEwAjgK#v=onepage&q=%22changes%22%20%22vulgate%22%20%22nova%20
vulgata%22&f=false
 [pp. 191-192]

(자료 2로부터 발췌 시작)

     The Vulgate is generally regarded as the work of Jerome. But this is not true for the New Testament, where he merely revised the text of the Old Latin Gospels (completing it in 383). His major contribution was in the Old Testament, which he translated afresh from the Hebrew, with the exception of the Psalter (which he revised following the Greek Hexapla of Origen) and the books of Wisdom, Sirach, and Maccabees, which he did not work on. It is not known with any certainty when the rest of the New Testament was revised, or by whom. The Vulgate text of the New Testament beyond the Gospels is not found until the early fifth century in the writings of Pelagius and his followers. (이하 발췌 생략). 

 

     대중 라틴말 성경(the Vulgate)은 예로니모(Jerome, 347-420년)의 일로서 일반적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기서 그가 고 라틴어 복음서들(the Old Latin Gospels)의 본문을 단순히 개정하였던 (이것을 383년에 완료함), 신약(the New Testament)의 경우에 참이 아닙니다. 그의 주된 기여는 그가, [오리제네스(Origen)의 그리스어본 Hexapla를 뒤따라서 그가 개정하였던(revised)] 시편(the Psalter) 및, 그가 작업하지 않았던, 지혜서, 집회서, 그리고 마카베오서들의 제외와 함께, 히브리어 성경으로부터 새로이(afresh) 번역하였던 구약(the Old Testament)에 있었습니다. 신약의 나머지 부분들이 언제, 혹은 누구에 의하여, 개정되었는지(revised),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복음서들 너머에 있는 신약의 대중 라틴말 성경의 본문은, 펠라지오(Pelagius)와 그의 추종자들의 저술들에서, 5세기 초기에 이르기까지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게시자 주 2-1: 바로 위에 발췌된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1테살로니카 1,3이 아래의 제2-9항에 있는 새 대중 라틴말 성경(Nova Vulgata)1테살로니카 1,3과 상당히 다른 것으로 보아, 바로 위에 발췌된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1테살로니카 1,3에 있던 번역 오류가 바로잡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2-2. 16세기 말경에 출판된 DRB(Douay-Rheims Bible) 1테살로니카 1,3

출처: http://haydock1859.tripod.com/id217.html

(발췌 시작)

3 Being mindful of the work of your faith, and labour, and charity, and of the enduring of the hope of our Lord Jesus Christ, before God and our Father: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2:

(1) 위의 영어 번역문은 제2-1항에 발췌된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의 대응하는 본문의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이며, 따라서 번역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

 

(2) 그리고 다음은, 1859년 판 "Haydock's Catholic Bible Commentary 1859 on DRB" 에 주어진 영어본 1테살로니카 1,3에 대한 주석 전문인데, 비록 이 영어본 본문 중에 번역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석자 Estius(1542-1613년)(#)는 이미 그리스어 본문 1테살로니카 1,3에 충실한 주석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출처: http://haydock1859.tripod.com/id217.html

(발췌 시작)

Ver. 3. The apostle praises the Thessalonians for the progress they had made in the theological virtues [of faith, hope, and charity], and enumerates the profit they had derived from each. Their faith had produced works; their charity rendered their labour light and easy, and their patience was the fruit of their future hopes, in confidence of which they bore what they had to suffer from their unconverted countrymen. (Estius)

 

제3절. 이 사도는 테살로니카인들을, [믿음(faith, 신덕), 희망(hope, 망덕), 그리고 사랑(charity, 애덕)으로 이루어진] 향주덕(the theological virtues)에 있어 그들이 이미 행한 진보에 대하여, 칭찬하고, 그리고 그들이 이 덕들 각각으로부터 이미 도출한 유익함을 열거합니다(enumerates). 그들의 믿음(faith, 신덕)은 일/노동(勞動)(works)들을 이미 산출하였고(had produced), 그리고 그들의 사랑(charity, 애덕)은 그들의 수고를 이미 가볍게 그리고 쉽게 해 주었으며, 그리고 그들의 인내(patience)는, 그들이 자신들의 개종하지 않은 동포(countrymen)들로부터 고통을 겪어야 하였던 바를 그들이 참아냄에 대한 확신 안에서, 그들의 미래의 희망(hopes)들의 열매였습니다. (Estius)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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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 소개된 네덜란드(Dutch)의 가톨릭 성경 해석자이고 성인전 작가이며 Douay 대학교의 총장(chancellor)을 역임한 Wm. Estius(1542-1613년)를 말한다는 생각이다:

 

출처 1: http://books.google.co.kr/books?id=RHsWNdcgmp0C&pg=PA284&lpg=PA284&dq=%
22Commentarii+in+omnes+divi+Pauli+et+catholicas+epistolas%22&source=bl&ots=
bTXsjcTYj3&sig=-YhP6omobLqVZxiQljWkJaUg2Rg&hl=ko&sa=X&ei=
z9k_VLHMMee6mAW8j4HwBA&ved=0CBMQ6AEwAA#v=onepage&q=
%22Commentarii%20in%20omnes%20divi%20Pauli%20et%20catholicas%20epistolas%22&f=false

출처 2: http://haydock1859.tripod.com/id533.html 
          [Haydock's Catholic Bible Commentary 1859 on DRB 제공의 주석자 정보]

출처 3: http://www.answers.com/topic/estius

(출처 3 발췌 시작)
Estius

 

(1542–1613), Dutch Catholic exegete and martyrologist, born in Gorcum (Gorinchem) and educated at Utrecht and (from 1561) Louvain, where one of his teachers was Michel de Bay. He became professor of theology at Douai in 1582 and chancellor in 1595. His most influential work was Historia martyrum Gorcomiensium (1603), an account of the ‘Gorcum martyrs’, a group of nineteen priests who were executed in Briel by Calvinists on 9 July 1572; eleven of the martyrs were Franciscan friars at the Gorcum convent. Estius' account was an important document in the beatification (1675) and canonization (1867) of the martyrs. His principal exegetical work was the posthumously published Commentarii in omnes divi Pauli et catholicas epistolas (1614–16), which remained in print for three centuries.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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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게시자 주 끝)

 

2-3. 1611년에 초판 발행된 1611 KJV(ing James Version) 1테살로니카 1,3

출처: 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version=KJV&search=1%20Thessalonians%201

(발췌 시작)

3 Remembering without ceasing your work of faith, and labor of love, and patience of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in the sight of God and our Father;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3: 위의 영어 번역문을, 바로 아래의 제2-4항에 안내된 그리스어 1테살로니카 1,3과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면, 결국에, 위의 제2-1항에서 지적한 번역 오류를 바로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위의 게시자 주 2-2제(2)항에서 말씀드린 네덜란드(Dutch)의 가톨릭 성경 해석자이고 성인전 작가이며 Douay/Douai 대학교의 총장(chancellor)을 역임한 Wm. Estius(1542-1613년)의 주석을 참고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처음부터 번역자 주석들이 포함된 Douay-Rheims Bible 영어본 성경Douay/Douai 대학교에서 발간되었는데, 특히1582년에 이 성경의 신약 성경이 많은 넓은 범위에 걸친 번역자 주석들과 함께 Rheims 에서 출판되었으며,(#) 그리고 1611 King James Version 이 마련될 때에 이 영어본 성경을 많이 참조하였다고 알려져 있음에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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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http://en.wikipedia.org/wiki/Douay%E2%80%93Rheims_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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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게시자 주 2-3 끝)

 

2-4.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그리스어 1테살로니카 1,3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위의 제2-1항의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의 1테살로니카 1,3과 동일하지 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위의 제2-1항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의 1테살로니카 1,3번역 오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biblehub.com/lexicon/1_thessalonians/1-3.htm

 

2-5. 1960년대에 마련된 GNB(Good News Bible) 1테살로니카 1,3

출처: 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1+Thessalonians+1&version=GNT

(발췌 시작)

For we remember before our God and Father how you put your faith into practice, how your love made you work so hard, and how  your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in firm.

(이상, 발췌 끝)

 

2-6. 1960년대에 초판 발행된 RSV(Revised Standard Version) 1테살로니카 1,3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21_mon.htm

(발췌 시작)

[3] remembering before our God and Father your work of faith and labor of love and steadfastness of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이상, 발췌 끝)

 

2-7. 1970년에 초판 발행된 NAB(New American Bible) 1테살로니카 1,3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10P.HTM

(발췌 시작)

calling to mind your work of faith and labor of love and endurance in hope of our Lord Jesus Christ, before our God and Father

(이상, 발췌 끝)

 

2-8. 1973년에 초판 발행된 NIV(New International Version) 1테살로니카 1,3

출처: 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1+Thessalonians+1&version=NIV

(발췌 시작)
We remember before our God and Father your work produced by faith, your labor prompted by love,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이상, 발췌 끝)

 

2-9. 다음의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새 대중 라틴말 성경1테살로니카 1,3을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대중 라틴말 성경의 대응 본문과 비교/검토하면, 교회의 라틴 교부들(*) 중의 한 명인 성 예로니모(St. Jerome, 347-420년)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어 마련되었다고 알려진 대중 라틴말 성경(**)1테살로니카 1,3에 있던 번역 오류(여기에는, 적어도 기원후 13세기 이전에 발생하였을 수도 있는 필경사들의 필사 오류도 포함됨)가 바로잡혔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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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의 글의 부록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21.htm

 

(**) 게시자 주: 이것은 100% 참인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데, 위의 제2-1항(*) 게시자 주를 꼭 읽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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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에 초판 발행된 새 대중 라틴말 성경(Nova Vulgata), 1테살로니카 1,3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bible/nova_vulgata/documents/
nova-vulgata_nt_epist-i-thessalonicenses_lt.html
 

(발췌 시작)

3 memores operis fidei vestrae et laboris caritatis et sustinentiae spei Domini nostri Iesu Christi ante Deum et Patrem nostrum;
(이상, 발췌 끝)

 

2-10. 여러 지역 언어본 성경들의 1테살로니가 1,3

출처: http://biblehub.com/multi/1_thessalonians/1-3.htm

 

2-11. 대한성서공회 제공의 국내의 개신교측의 여러 우리말본 성경들의 1테살로니카 1,3

출처: http://www.bskorea.or.kr/infobank/korSearch/korbibReadpage.aspx?version=
GAE&readInfo=%uC0B4%uC804%201%3A3&cVersion=SAE^SAENEW^&fontString=
12px&fontSize=1#focus

   

3.

3-1. 다음은 교회의 그리스 교부들(*) 중의 한 명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hn Chrysostom, 347-407년)1테살로니카 1,3에 대한 강론의 영어본에서 발췌한 것인데, 특히, 위의 제2-1항 에 발췌된, 성 예로니모(St. Jerome, 347-420년)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었다고 알려진 대중 라틴말 성경(**)1테살로니카 1,3에 대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어 성경의 1테살로니카 1,3에 대하여 해석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라틴어로 저술한 라틴 교부들 중의 한 분이 아니라, 그리스어로 저술한 그리스 교부들 중의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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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의 글의 부록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21.htm

 

(**) 게시자 주: 이것은 100% 참인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데, 위의 제2-1항(*) 게시자 주를 꼭 읽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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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3-1: 여태까지 국내에 전혀 전달된 바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아래의 발췌문이, 초자연덕(supernatural virtues)들인, 믿음(faith, 신덕), 희망(hope, 망덕), 사랑(love, charity, 애덕)으로 불리는, 은총(grace)이라는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 덕택으로 세 개의 향주덕(the three theological virtues)들의 능동적 활동(active activities)들으로서 심장(heart) 바깥으로 표출되는외면적 산출물[external products, 일/노동(勞動)]인, [믿음(신덕)에 기인하는] 일/노동(勞動)(work of faith),  [아가페(애덕)에 기인하는] 노고(labor of charity), 그리고 [희망(망덕)에 기인하는] 인내(patience of hope)에 대하여, 사도행전 17,1-10 및 1테살로니카 1,3 본문에 근거한, 대단히 좋은 예(examples)들과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는 필자의 고유한 판단에 따라,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우리말로 번역을 하였으며, 그리고 독자들을 위하여 일부 표현들을 굵게하고 또 색칠을 하였습니다.

 

출처 0: https://archive.org/download/HomiliesOnGalatiansEphesiansPhilippiansColossians
Thessalonians/13_chrysostom_john_saint_d407_homilies_on_galatians_etc.pdf
 [1887년 출판된 번역문, pdf, p. 669; p. 7에 주어진 설명에 의하면, 그리스어 본문이 영어로 처음 번역된 시점은 1529년이라고 함]

출처 1: http://sacred-texts.com/chr/ecf/113/1130072.htm [번역문의 원 출처]

출처 2: http://www.clerus.org/bibliaclerusonline/en/dhe.htm#c
출처 3: http://www.newadvent.org/fathers/230401.htm

(발췌 시작)

101 ... “Remembering without ceasing,” he says, “your work of faith and labor of love and patience of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before our God and Father.” What is remembering without ceasing? Either remembering before God and the Father, or remembering your labor of love that is before God and the Father, or simply, “Remembering you without ceasing.” Then again, that you may not think that this “remembering you without ceasing” is said simply, he has added, “before our God and Father.” And because no one amongst men was praising their actions, no one giving them any reward, he says this, “You labor before God.” What is “the work of faith”? That nothing has turned aside your steadfastness. For this is the work of faith. If thou believest, suffer all things; if thou dost not suffer, thou dost not believe. For are not the things promised such, that he who believes would choose to suffer even ten thousand deaths? The kingdom of heaven is set before him, and immortality, and eternal life. He therefore who believes will suffer all things. Faith then is shown through his works. Justly might one have said, not merely did you believe, but through your works you manifested it, through your steadfastness, through your zeal.

 

101 ... 그는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일/노동(勞動)(work of faith)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쪽으로 희망의 인내를 끊임없이 기억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기억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기억하는 것, 혹은 하느님 아버지 앞에 있는 그들의 사랑의 노고를 기억 하는 것, 혹은 단순히(simply), "끊임없이 그들을 기억하는 것", 이들 셋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then again), 바로 이 "끊임없이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단순히(simply) 말해졌다고 그들이 생각하지 않도록 하고자, 그는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를 이미 추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 한 명도 자신들의 행동들을 찬양하지 않고, 어느 한명도 그들에게 어떤 보상을 제공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 여러분들의 수고." "믿음의 일/노동(勞動)(the work of faith)"은 무엇을 말합니까? 어떠한 것도 그들의 [신념의] 확고함을 가라앉히지 못하였음을 말합니다. 이는 다음의 것이 믿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믿는다면(believest), 모든 것들을 견디며(suffer), 그리하여 그대가 견디지 못한다면, 그대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믿는 자가 심지어 일만 개의 죽음들을 겪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는(would) 바로 그러한 일들은, 약속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까?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가, 그리하여 불멸(immortality)이, 그리하여 영원한 삶이, 그대 앞에 준비되어 있습니다(is set). 그러므로 믿는 자는 모든 일들을 장차(will) 견딜 것입니다(suffer).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믿음(faith, 신덕)은 당사자의 일/노동(勞動)(works)들을 통하여 외면으로 보여지게 됩니다(is shown). 단지(merely) 그대가 믿는 것이 아니라(not merely did you believe), 그대의 일/노동(勞動)(works)들을 통하여, 그대의 [신념(belief)의] 확고함을 통하여, 그대의 열의(zeal)를 통하여, 그대가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음/명시(明示)하였음(manifested)은, [하느님 앞에서] 당연하게/정당하게/적법하게(justly) 말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Justly might one have said).

And your labor “of love.” Why? what labor is it to love? Merely to love is no labor at all. But to love genuinely is great labor. For tell me, when a thousand things are stirred up that would draw us from love, and we hold out against them all, is it not labor? For what did not these men suffer, that they might not revolt from their love? Did not they that warred against the Preaching go to Paul’s host, and not having found him, drag Jason before the rulers of the city? (Ac 17,5-6) Tell me, is this a slight labor, when the seed had not yet taken root, to endure so great a storm, so many trials? And they demanded security of him. And having given security, he says, Jason sent away Paul. Is this a small thing, tell me? Did not Jason expose himself to danger for him? and this he calls a labor of love, because they were thus bound to him.

 

그리고 그들의 "사랑의" 노고(labor "of love")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사랑하는 것이 무슨 노고입니까? 단순히 사랑하는 것은 노고가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으로(genuinely) 사랑하는 것은 커다란 노고입니다. 이는, 사랑(love)으로부터 우리를 당겨서 떼어낼 수도 있는(would) 일천 개의 일들이 선동(煽動)되어(are stirred up), 그러나 우리가 그들 모두에 반하여 굴복하지 않을 때에, 그것이 노고가 아니라고 제게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까? 이는 다음의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였던 바가 그들이 자신들의 사랑으로부터 반역하지 않음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까? [이 사도의] 거룩한 설교(the Preaching)에 반하여 싸웠던 자들이 바오로(Paul)의 후원자(host)에게 갔으나, 그러나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고, [이 사도의 후원자인] 야손(Jason)을 그 도시의 통치자들의 앞에 끌고갔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사도행전 17,5-6 참조).(*) 씨앗이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을 때에, 대단히 커다란 한 개의 폭풍을, 대단히 많은 시험들을 인내하는 것(to endure), 바로 이것이 한 개의 하찮은 노고라고 저에게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들은 그에 대한 보석금(security)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보석금을 제공함으로써, 그는 [즉,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카는] 야손이 바오로를 떠나보냈다고 말합니다(사도행전 17,9-10 참조). 이것이 한 개의 작은 일이라고 저에게 말하는 것입니까? 야손이 그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켰던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바로 이것을 그는 [즉, 이 사도는 1테살로니카 1,3에서] 사랑의 노고(a labor of love)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그에게 결합되어졌기(were bound to)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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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사도행전 17,1-10은 사도 바오로가 테살로니카에서 선교할 때에 발생하였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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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And observe: first he mentions their good actions, then his own, that he may not seem to boast, nor yet to love them by anticipation. “And patience,” he says. For that persecution was not confined to one time, but was continual, and they warred not only with Paul, the teacher, but with his disciples also. For if they were thus affected towards those who wrought miracles, those venerable men; what think you were their feelings towards those who dwelt among them, their fellow-citizens, who had all of a sudden revolted from them? Wherefore this also he testifies of them, saying, “For ye became imitators of the Churches of God which are in Judaea.”

 

102 그리고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그는 처음에 그들의 선행(good actions)들을(1테살로니카 1,4-10 참조), 그러고 나서, 그는 기대에 의하여(by anticipation) 자랑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는, 또한 그들을 아직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신 고유의 것들에 대하여 언급합니다(1테살로니카 2,6 참조). "그리고 인내(and patience)"를 그는 말합니다. 이는 그러한 박해가 한 시기에 한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계속하였으며, 그리고 그들이 선생인 바오로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싸웠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들이 기적을 행하였던 자들, 공경할 만한 사람들을 향하여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면,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바는, 그들로부터 갑자기 폭동을 일으켰던, 그들의 동료-시민들인, 그들 가운데에서 거주하였던 자들을 향하는 그들의 느낌들이었기 때문입니까? 그래서(wherefore) 그는 또한 그들에 대하여, "이는 여러분들이 유다(Judea) 지역에 있는 하느님 교회들을 본받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테살로니카 2,14 참조)라고 말함으로써, 이것을 증언합니다.


“And of hope,” he says, “in our Lord Jesus Christ, before our God and Father.” For all these things proceed from faith and hope, so that what happened to them showed not their fortitude only, but that they believed with full assurance in the rewards laid up for them. For on this account God permitted that persecutions should arise immediately, that no one might say, that the Preaching was established lightly or by flattery, and that their fervor might be shown, and that it was not human persuasion, but the power of God, that persuaded the souls of the believers, so that they were prepared even for ten thousand deaths, which would not have been the case, if the Preaching had not immediately been deeply fixed and remained unshaken).

 

그는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쪽으로 희망의" 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러한 일들 모두가 믿음(faith, 신덕)과 희망(hope, 망덕)으로부터 나아갔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그들에게 발생하였던 바가, 단지 그들의 굳셈(fortitude, 용덕)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완전하게 준비된(laid up) 보상들을 충만한 확신(assurance)과 함께 그들이 믿었음(believe in)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하느님께서 박해들이 마땅히 즉시 일어나야 함을 허락하셨기(permitted) 때문입니다: [이 사도의] 거룩한 설교((the Preaching)가 경솔하게 혹은 아첨에 의하여 확립되었던 것이라고 아무도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1테살로니카 2,3; 2,5 참조), 그리하여 그들의 열정(fervor)이 보여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만약에 [이 사도의] 거룩한 설교(the Preaching)가 즉시 [심장(heart)에] 깊히 새겨지고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채로 남아있게 되지 않았더라면 그 경우가 아니었을 것인, 그들이 심지어 일만 명의 죽음들에 준비하도록 하기 위하여, 믿는 이들의 영혼들을 납득시켰던(persuaded) 것은 인간의 박해(human persecution)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the power of God)이었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2. 다음은,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1테살로니카 1,1-10에 대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의 해석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dhspriory.org/thomas/SS1Thes.htm#11

(발췌 시작)

Then he prays for them saying: constantly mentioning you in our prayers; as if saying: Whenever I pray I am mindful of you: “Without ceasing I mention you always in my prayers” (Rom. 1: 9).

 

Then when he says, remembering... your work of faith, Paul mentions the blessings for which he offers thanks, that is, faith, hope, and charity: “So faith, hope, love abide, these three” (1 Cor. 13:13). First, he mentions faith because it is an essential condition for obtaining the things to be hoped for, a means of revelation not based on appearances: “For whoever would draw near to God must believe that he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seek him” (Heb. 11:6). This, however, is not sufficient unless the person practices good works and makes an effort; so Paul says, your work of faith and labor. “Faith apart from works is dead” (Jas. 2:26). The person who gives up while laboring for Christ is worth nothing: “They believe for a while and in time of temptation fall away” (Lk. 8:13). Paul uses the words, work and labor, implying that he is mindful of their active and struggling faith.

 

그러고 나서 그가 "우리는 끊임없이 3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일/노동(勞動)(work of faith) ... 를 기억합니다." 라고 말할 때에, 그가 그것에 대한 감사를 제안하는 다음과 같은 축복들, 즉 믿음(faith, 신덕), 희망(hope, 망덕), 그리고 사랑(charity, 애덕)에 대하여 바오로(Paul)는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1코린토 13,13). 첫 번째로, 그는 믿음(faith, 신덕)에 대하여 언급하는데 왜냐하면 이 덕은, 다음과 같이, 희망하게 될 사물들을 획득하기 위한 한 개의 본질적 조건(an essential condition), 즉, 겉모습들에 근거하지 않는 계시의 한 수단(a means of revelation)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히브리 11,6). 그러나 이것은, 만약에 당사자가 선한 일/노동(勞動)(good works, 선행)실천하는 것(practices) 그리고 노력을 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충분하지 않으며(not sufficient), 그래서 바오로는 "여러분들의 믿음의 일/노동(勞動)과 노고(your work of faith and labor, operis fidei vestrae et laboris)"(*) 라고 말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 2,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노력하는 동안에 포기하는 자는 다음과 같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루카 8,13). 바오로는 "일/노동(勞動)(work)""노고(labor)" 라는 단어들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그가 그들의 능동적/활동적이고(active) 그리고 분투하는 믿음(faith, 신덕)에 대하여 잊지 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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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영어 번역 표현은, 만약에 이 번역이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이라면, 13세기에 살았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가 위와 같은 주석을 달았던 라틴어 성경은, 성 예로니모(St. Jerome, 347-420년)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었다고 알려진, 그리고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 1테살로니카 1,3이었을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 게시자 주: 이것은 100% 참인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데, 위의 제2-1항(*) 게시자 주를 꼭 읽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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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also gives thanks for the love in which they abounded. Later (4:9), he says: but concerning love of the brethren you have no need to have any one write to you.

 

Then he gives thanks for their hope, which enables them to endure sufferings patiently: “Rejoice in your hope, be patient in tribulation” (Rom. 12:12). In addition, Paul gives thanks for the steadfastness of their hope: “You have heard of the steadfastness of Job” (Jas. 5:11). Finally, Paul gives thanks for hope in our Lord, that is, the hope we have in Christ, or the hope Christ gave to us: “We have been born anew to a living hope through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from the dead” (I Pet. 1:3). This hope is, before our God, not before the eyes of men; “Beware of practicing your piety before men in order to be seen by them” (Matt. 6:1). “We have this as a sure and steadfast anchor of the soul” (Heb. 6:19). For hope in the old dispensation did not lead to God.
(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들의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3-2:

(1) 다음은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Commentaries on the Bible"에 대한 설명에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hn Chrysostom)에 대한 언급에서 발췌한 것인데, 특히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저술들에 대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높은 감탄(high admiration)에 대한 언급 때문에 발췌하였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cathen/04157a.htm
(발췌 시작)
St. John Chrysostom, priest of Antioch, became Patriarch of Constantinople in 398. As an interpreter of Holy Scripture he stands in the very first rank of the Fathers. He left homilies on most of the books of the Old and the New Testament. There is nothing in the whole of antiquity to equal his writings on St. Matthew's Gospel and St. Paul's Epistles. When St. Thomas Aquinas was asked by one of his brethren whether he would not like to be the owner of Paris, so that he could dispose of it to the King of France and with the proceeds promote the good works of his order, he answered that he would prefer to be the possessor of Chrysostom's "Super Matthæum". This reply may be taken as the true expression of the high admiration in which the writings of St. Chrysostom have ever been held in the Church. St. Isidore of Pelusium said of him that if the Apostle St. Paul could have used Attic speech he would have explained his own Epistles in the identical words of St. John Chrysostom.

 

안티오키아(Antioch)의 사제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hn Chrysostom)는 398년에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총대주교가 되었습니다. 성경 본문의 해석자(interpreter)로서 그는 교부들 중에서 바로 그 첫 번째 등급에 서 있습니다. 그는 구약 성경 및 신약 성경의 책들 대부분에 대한 강론들을 남겼습니다. 고대(antiquity) 전체에 있어 성 마태오의 복음서와 성 바오로의 서간들에 대한 그의 저술들을 필적하는(equal) 저술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자신의 [수도회] 형제들 중의 한 명에 의하여, 그가 파리(Paris) 시를 프랑스의 왕에게 처분하여 그리하여 그 수익을 가지고 자신이 속한 수도회(order)의 선행들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그가 파리 시의 소유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지 라는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에, 그는 자신이 [그보다는] 크리소스토모의 "마태오 복음서 강론(Super Matthæum)"의 소유자가 되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답변하였습니다. 바로 이 답변은, 그 안에서 성 크리소스토모의 저술들이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높은 감탄에 대한 참된 표현으로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may). Perlusium 의 성 이시도르(St. Isidore, 450년 경에 죽음)는, 만약에 사도 성 바오로가 아테네식의 말하기(Attic speech)를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그는 자신의 고유한 서간들을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동일한 말들로 설명하였을 것이다 라고, 그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1테살로니카 1,3에 대한 해석 중에서, 위의 제3-1항에 그 영어본이 발췌된, 애초에 그리스어로 저술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hn Chrysostom, 347-407년)의 강론 중의 해설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음에 주목하며, 그 이유가, 언뜻 생각하기에, 혹시라도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리스 교부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1테살로니카 1,3에 대한 해설을 접할 수가 없다보니 전혀 읽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presumption)은, 바로 아래의 제(3)항의 용어 색인에 의하면, 사실이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3) 신학 대전에 대한 다음의 용어색인 정보에 의하면, "Thess" (즉, 테살로니카 1서, 2서)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신학 대전에서, 직접 인용 혹은 다른 이의 저술들을 통한 간접 인용을 포함하여, 총 57번 언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대단히 의아하게도 그리고 예상밖으로, 비록 1테살로니카 제2장은 총 5번, 1테살로니카 제3장은 총 1번, 1테살로니카 제4장은 총 13번, 그리고 1테살로니카 제5장은 총 10번 언급되고 있음은 확인되나, 그러나 첫 장인 1테살로니카 제1장은 신학 대전에서 전혀 언급되고 있지 을 또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intratext.com/IXT/ENG0023/2/5N.HTM 

 

그리고 또한 신학 대전에 대한 다음의 용어색인 정보에 의하면, "work of faith" 라는 표현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신학 대전, IIa, IIae, q3, a1 에서 단 한번 언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http://www.intratext.com/IXT/ENG0023/8J_2.HTM

 

(4) 따라서, 위의 발췌문에서처럼,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가, 심지어 향주삼덕(the three theological virtues)의 성경 근거로 널리 알려진 1코린토 13,13까지 직접 발췌 인용하는, 그리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1테살로니카 1,3에 대한 주석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어, 1테살로니카 1,3에 대한 자신 고유의 주석을 이렇게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자신의 중대한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본문에서 향주삼덕(the three theological virtues)에 대하여 심도깊게 다룰 때에, 1테살로니카 1,3을 전혀 언급하거나 혹은 인용하지 않았던 직접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상, 게시자 주 3-2 끝)

 

3-3. 

지금까지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work of faith [믿음의 일/노동(勞動)]" 이라는 표현의 실제적 의미에 관한 것이므로, 이번 항에서는 여기에 촛점을 맞추어 "work[일/노동(勞動)]" 이라는 단어의 사용 예들에 대하여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또한 다음의 글[제목: 믿다(believe)와 쪽으로 믿다(believe in)의 차이점]게시자 주 5-2-2에서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던 번역 오류에 이어지는 글이기도 합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8.htm <----- 필독 권고

 

     다음의 주소에 있는, 그리스어 신약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동일한 한 개의 그리스어 단어 "ergon" [그 어근은 이다]는,

 

출처: http://biblehub.com/greek/2041.htm

 

예를 들어, NAB(New American Bible) 영어 성경, 교황청 성직자용 홈페이지 제공의 프랑스어본 성경 등에서는 동일한 단어 "work(s)[일/노동(勞動)(들)]" 로 번역되고 있는 반면에, 그러나 "새 번역 성경" 의 대응하는 본문에서는 동일한 우리말 차용(借用) 번역 용어로 번역되고 있지 않은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절들에 한하여 이번 항에서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3-3-1. 요한 복음서 6,29의 경우

[교황청 성직자용 홈페이지 제공의 프랑스어본 성경 요한 복음서 6,29]

출처: http://www.clerus.org/bibliaclerusonline/en/ezn.htm#kr

(발췌 시작)

Jésus leur répondit: "Voici l'oeuvre que Dieu demande, c'est que vous croyiez en celui qu'il a envoyé."

(이상, 발췌 끝)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NAB 요한 복음서 6,29]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XE.HTM

(발췌 시작)

Jesus answered and said to them, "This is the work of God, that you believe in the one he sent."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고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그분께서 보내신 이 쪽으로 믿는 것(believe in)(*)이 바로 하느님의 일/노동(勞動)[the work of God, opus Dei(오푸스 데이), 즉,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일/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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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believe Jesus Christ)"와 "예수 그리스도 쪽으로 믿다(believe in Jesus Christ)" 의 커다란 차이점에 대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8.htm <----- 필독 권고

 

(**) 번역자 주: 전례적으로, 하느님의 일/노동(勞動)(the work of God, opus Dei(오푸스 데이), 즉,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일/노동)은 성무일도(Divine Office)/시간전례(Liturgy of the Hours)를 나타내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이름(Benedictine name)이기도 하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i) Dictionary of the Liturgy (New York, 1989) (원저자: Jovian Peter Lang)을 우리말로 번역한, "전례 사전"(주비언 피터 랑 지음, 박요한 영식신부 옮김, 출판사: 가톨릭출판사)에 주어진 "오푸스 데이"에 대한 설명, 그리고 (ii)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opus Dei"에 대한 설명을 읽도록 하라: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7977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o/o09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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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3-3-1: 바로 위의 졸번역문이 다음의 "새 번역 성경" 의 기존의 우리말 번역문과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를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라. 주어(主語)와 술어(述語)가 뒤바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6,29]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5216&gomonth=2012-08-05

(발췌 시작)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이상, 발췌 끝)

 

3-3-2. 야고보서 2,17의 경우

[교황청 성직자용 홈페이지 제공의 프랑스어본 성경 야고보서 2,17]

출처: http://www.clerus.org/bibliaclerusonline/en/exl.htm#b5

(발췌 시작)

 Il en est de même de la foi: si elle n'a pas les oeuvres, elle est morte en elle-même.

(이상, 발췌 끝)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NAB 야고보서 2,17]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11W.HTM

(발췌 시작)

So also faith of itself, if it does not have works, is dead.

(이상, 발췌 끝)

 

[새 번역 성경 야고보서 2,17]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5808&gomonth=2014-02-21

(발췌 시작)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이상, 발췌 끝)

 

3-3-3. 야고보서 2,24의 경우

[교황청 성직자용 홈페이지 제공의 프랑스어본 성경 야고보서 2,24]

출처: http://www.clerus.org/bibliaclerusonline/en/exl.htm#b5

(발췌 시작)

 Vous voyez que l'homme est justifié par les oeuvres, et non par la foi seulement.

(이상, 발췌 끝)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NAB 야고보서 2,24]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11W.HTM

(발췌 시작)

See how a person is justified by works and not by faith alone.

(이상, 발췌 끝)

 

[새 번역 성경 야고보서 2,24]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5808&gomonth=2014-02-21

(발췌 시작)

여러분도 보다시피,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이상, 발췌 끝)

 

3-3-4. 1테살로니카 1,3의 경우

[교황청 성직자용 홈페이지 제공의 프랑스어본 성경 1테살로니카 1,3]

출처: http://www.clerus.org/bibliaclerusonline/en/bk1.htm#bi

(발췌 시작)

en rappelant sans cesse devant notre Dieu et Père, les oeuvres de votre foi, les sacrifices de votre charité et la constance de votre espérance en Jésus-Christ,

(이상, 발췌 끝)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NAB 1테살로니카 1,3]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10P.HTM

(발췌 시작)

calling to mind your work of faith and labor of love and endurance in hope of our Lord Jesus Christ, before our God and Father,

(이상, 발췌 끝)

 

[새 번역 성경 1테살로니카 1,3]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4911&gomonth=2011-10-16

(발췌 시작)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이상, 발췌 끝)

 

3-3-5. 로마서 3,28의 경우

[교황청 성직자용 홈페이지 제공의 프랑스어본 성경 로마서 3,28]

출처: http://www.clerus.org/bibliaclerusonline/en/gsy.htm#d1

(발췌 시작)

Car nous tenons pour certain que l'homme est justifié par la foi, à l'exclusion des oeuvres de la Loi.

(이상, 발췌 끝)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NAB 로마서 3,28]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YR.HTM

(발췌 시작)

For we consider that a person is justified by faith apart from works of the law.  

 

이는 한 인격이, [모세] 율법의 일/노동(勞動)들로부터 떨어져(apart from), 믿음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새 번역 성경 로마서 3,28]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3609&gomonth=2008-06-01

(발췌 시작)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3-3:

위의 제3-3항에서 보았듯이, 동일한 단어 "work(s)"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단어 "ergon" [그 어근은이다] 를, "새 번역 성경" 의 대응하는 본문들 세 곳에서 "일", "실천", "행위" 이렇게 세 개의 차용 번역 용어들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러한 일관성이 대단히 결여된,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은 정말 잘못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위의 제3-3항에 발췌된 절들은 ,바로 이 "work(s)[그리스어 어근 )" 라는 단어의 의미/정의(definition)를 그 연결 고리로 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예를 들어, 아래의 제5-3항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따라서 이렇게 세 개의 차용 번역 용어를 사용한 우리말 번역은 번역 미숙/오류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지적한 바와 관련하여, 이들 세 개의 차용 번역 용어들이 "새 번역 성경"의 신약 본문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다음의 주소들을 클릭하여, 직접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1) http://info.catholic.or.kr/bible/view.asp?ctindex=new2&prindex=0&Keyword=일 

"일" 이라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는 "새 번역 성경"의 신약 본문에서 총500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문제는, 이 차용(借用) 번역 용어 모두가 그리스어 단어 "ergon()" 에 대응하는 동일한 의미 "work[노동(勞動)]"아님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 번역 성경"의 마태오 복음서 1,19에서 "마리아의 "로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이 된 표현은, 기존의 이 절 전체를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을 한 문장으로 교체하거나 혹은, 예를 들어, "마리아의 사정" 호은 "마리아의 형편" 등으로 의역 번역을 함으로써, 우리말 성경 본문에서 "일" 이라는 우리말 단어의 겸용(兼用)을 될 수 있는 한 자제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지금 지적한 우리말 성경 본문에서 "일" 이라는 우리말 단어의 겸용(兼用)의 문제가 "공동번역성서"의 신약 본문에서 더 많았음은, 다음에서 또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info.catholic.or.kr/bible/view.asp?ctindex=new&prindex=0&Keyword=일 

 

(2) http://info.catholic.or.kr/bible/view.asp?ctindex=new2&prindex=0&Keyword=실천 

"실천"이라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인 명사(noun)는 "새 번역 성경"의 신약 본문에서 총 47번 사용되었으며, 그리고 "새 번역 성경"의 야고보서만 14번 사용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공동번역성서"야고보서에서, "실천" 대신에, "행동" 이라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가 사용되었음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info.catholic.or.kr/bible/view.asp?ctindex=new&prindex=0&Keyword=행동 

 

(3) http://info.catholic.or.kr/bible/view.asp?ctindex=new2&prindex=0&Keyword=행위 

"행위"라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는 "새 번역 성경"의 신약 본문에서 총 21번 사용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행위"라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는 "공동번역성서"의 신약 본문에서 총 14번 사용되었음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info.catholic.or.kr/bible/view.asp?ctindex=new&prindex=0&Keyword=행위

 

(4) 그리고 차용(借用) 번역 용어들로서의 "행위(act)", "일/노동(勞動)(work)", 그리고 "실천(practice)"의 차이점에 대하여서는 장차, 이 글의 게시자 주 3-3에 이어지는, 별도의 글에서 더 자세하게 댜루도록 하겠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1월 27일]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을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81.htm <----- 필독 권고

[이상, 내용 추가 끝]

(이상, 게시자 주 3-3 끝)

 

4.

4-1.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1테살로니카 1,3으로부터 우리는, 초자연덕(supernatural virtues)들인, 믿음(faith, 신덕), 희망(hope, 망덕), 사랑(love, charity, 애덕)으로 이루어진 향주삼덕(the three theological virtues)들에 대하여 1테살로니카 1,3이 언급하고 있음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으나, 그러나, 새 대중 라틴말 성경(Nova Vulgata)이 공인된 1979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1600년 동안 교정되지 못하고 유지되어 온 위의 라틴어 번역문에 있는 번역 오류의 문제 때문에,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은총(grace)이라는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 덕택으로 세 개의 향주덕(the three theological virtues)들의 능동적 활동(active activities)들로서 심장(heart) 바깥으로 표출되는, 외면적 산출물[external products, 일/노동(勞動)] 무엇인지를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의 1테살로니카 1,3 본문으로부터 독자들이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중대한 문제가 있어 왔다는 생각입니다.

 

4-2. 특히 16세기 초반1521년에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에 의하여 파문을 당하자, 그 당시까지 가톨릭 보편 교회가 신앙의 유산(the deposit of faith)[여기에는, 당연히, 초기 교회 시절부터 사용되었던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경전들이 모두 포함됨]에 근거하여 가르쳐온 교리(doctrines)들 [여기에는 당연히 그리스도교 교의(dogmas)들도 포함됨]에 하자가 있다면서, 피조물인 그가 만들어 낸 의화 교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그리스어로 기록된 로마서를 1522년에 지역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특히 로마서 3,28을 독일어로 번역을 하면서, "믿음으로" 라고 직역 번역(leteral translation)을 하는 대신에, 작의적/작위적으로/의도적으로, "믿음으로(faith alone)" 라고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을 하였던, 파문을 당하기 전까지 가톨릭 교회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사 신부였고 그리고 신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도 또한 번역 오류가 있는 위의 라틴어본 1테살로니카 1,3에 의존하였을 것임을 생각하면, 20세기 이후에 들어와 돌이켜 볼 때에, 16세기 초반에 특히 위의 라틴어본 번역문에 있는 번역 오류의 존재를 몰랐을 것으로 생각되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 당사자에게 있어, 실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4-3. 예를 들어, 다음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가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1545년 판 독일어본 1테살로니카 1,3 전문을 발췌한 것인데, 위의 제2항의 여러 항들에서 번역 오류바로 잡아진 1테살로니카 1,3과, 얼마나, 어떻게, 차이가 나게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독일어로 번역되었는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면서 고찰하시기 바랍니다.

 

일찌기 개신교파들 중의 하나인 영국 성공회측에서 마련하였던 1611년판 King James Version을 비롯하여, 1960년대 이후에 들어오면, RSV(Revised Standard Version), NIV(New International Version) 등의 개신교측의 권위있는 영어본 성경들에서도 받아들인, "work of faith[믿음의 일/노동(勞動)]", "labor of love(사랑의 노고)", 그리고 "patience of hope(희망의 인내)" 라는 번역 표현들과 등가로 번역되지 않았음을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1+Thessalonicher+1&version=LUTH1545

(발췌 시작)

[1545년 루터 성경(Luther Bible) 1테살로니카 1,3 전문]
und denken an euer Werk im Glauben und an eure Arbeit in der Liebe und an eure Geduld in der Hoffnung, welche ist unser HERR Jesus Christus, vor Gott und unserm Vater.

 

(영어 졸번역)

and think of your work in the faith and of your work in the love and of your patience in the hope, which is our Lord Jesus Christ, before God and our Father.

 

(우리말 졸번역)

그리고 그 믿음(the faith) 안에서 여러분들의 일을 그리고 그 사랑(the love) 안에서 여러분들의 일을 그리고, 하느님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인, 그 희망(the hope) 안에서 여러분들의 인내를 생각하십시오(think of, denken an).

(이상, 발췌 및 영어, 우리말 번역 끝)

 

그리고 바로 위의 발췌문과 그 번역문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특히,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위의 제2항의 여러 항들 및 제3항에서의 해석들을 함깨 고찰하였을 때에, 그리스어 1테살로니카 1,3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에 의하여 독일어로 번역이 될 당시에, 영어 단어 "of ( ... 의, 즉, ... 에 기인하는)" 에 등가인 독일어 단어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심지어, 이들이 향주삼덕들이 아님을 관철시키기 위하여서인 듯, 정관사 "der (the)" 까지 사용하면서, "in der ( ... 안에 있는)" 을 추가하는, 의도적인,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의 지나친,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행하여졌다는 생각입니다.

 

4-4. 혹시하여 추가로 제시해 드립니다만, 바로 위의 제4-3항의 지적을 읽고서 그 내용에 동의하고 싶지 않은 분들께서는, 예를 들어,

 

(4-4-i) 번역 대본인 다음의 1테살로니카 1,3과 2테살로니카 1,11그리스어 본문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여, 우선적으로, 동일한 "믿음의 일/노동(勞動)(work of faith)" 표현이 이들 두 절들에서 사용되었음을 확인하십시오:

http://biblehub.com/lexicon/1_thessalonians/1-3.htm

http://biblehub.com/lexicon/2_thessalonians/1-11.htm

 

(4-4-ii) 이제, 위의 제4-3항에 발췌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에 의하여 독일어로 번역이 된 1테살로니가 1,3과, 다음에 발췌된, 또한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독일어로 번역이 된 2테살로니카 1,11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십시오: 

 

출처: 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2+Thessalonicher+1&version=LUTH1545

(발췌 시작)

Und derhalben beten wir auch allezeit für euch, daß unser Gott euch würdig mache zur Berufung und erfülle alles Wohlgefallen der Güte und das Werk des Glaubens in der Kraft,

(이상, 발췌 끝)

 

(4-4-iii) 따라서, 바로 위의 제(4-4-i)항제(4-4-ii)항에서의 정밀한 비교/검토로부터 우리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동일한 그리스어 표현을, 자신이 번역한 독일어본 신약 성경의 1테살로니카 1,3에서는 "Werk im Glauben" 로 번역하였고 그러나 자신이 또한 번역한 독일어본 신약 성경의 2테살로니카 1,11에서는 "Werk des Glaubens" 로 번역하였기에, 동일하지 않은 두 개의 다른 표현들로 번역하였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는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의 이러한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은 명백한 번역 오류로서, 대단히 잘못된 번역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시자 주 4-4: 지금까지 위의 제2항에서 살펴 본 바로부터 우리는 지역 언어들로 번역시에, 다행스럽게도 적어도 1960년대부터는, 위의 제4항에 발췌된 루터 성경(Luther Bible)의 1테살로니가 1,3과 등가로 번역하지 않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였습니다. 이는 마르틴 루터에 의한 1테살로니카 1,3의 독일어로의 번역이 번역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5. (이 글의 결론)

5-1. 지금까지 우리는 1테살로니카 1,3에 대하여 자세하게 고찰하였으며, 특히 위의 제3항에서 1테살로니카 1,3이, 향주삼덕(the three theological virtues)들의 성경 근거일뿐만이 아니라, 또한 은총(grace)이라는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 덕택으로 이들 세 개의 향주덕(the three theological virtues)들의, 사도행전 17,1-10에 그 예(examples)들이 기록되어 있는, 능동적 활동(active activities)들로서 심장(heart) 바깥으로 표출되는, 외면적 산출물[external products, 일/노동(勞動)]들인, "믿음의 일/노동(勞動)(work of faith)", "사랑의 노고(labor of love)", 그리고 "희망의 인내(patience of hope)"를 가짐의 성경 근거임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였습니다. 

 

5-2. 그리고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에 의하여 1522년 경에 그리스어 번역 대본으로부터 독일어로 번역이 된 루터 성경(Luther Bible)의 1테살로니카 1,3이 명백한 번역 오류임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습니다.

 

질문 2: 만약에 대중 라틴말 성경의 1테살로니카 1,3에 위의 제2-1항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번역 오류가 없었더라면 어떠한 일들이 발생하였을까요?

 

질문 2에 대한 답변: 우선적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교황청 소속의 성직자들을 위하여 제공되고 있는 홈페이지 제공의 1테살로니카 1,1-4을 인용하고 있는 여러 문헌들을 접할 수 있는데, 1979년에 출판된 새 대중 라틴말 성경의 1테살로니카 1,3에서 이 번역 오류가 바로 잡히기 전까지, 1테살로니카 1,3을 인용하는 라틴 교회측의 문헌 자체가 거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http://www.clerus.org/bibliaclerusonline/en/9abscoa.htm

 

그런데, 대단히 불행하게도, 다음의 언급에 의하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이 실제적으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에게 실질적으로(practically) 알려지지 않았고 합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cathen/08573a.htm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Justification(의롭게 됨)" 에 대한 설명]

(발췌 시작)

Of late, Fathers Denifle and Weiss have shown that Martin Luther was acquainted almost exclusively with the theology of these Nominalists, which he naturally and justly found repugnant, and that the "Summa" of St. Thomas and the works of other great theologians were practically unknown to him.

 

최근에, 교부들 Denifle 와 Weiss 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가, 모순된다는(repugnant) 것을 그가 자연적으로 그리고 올바르게 발견하였던, 이들 유명론자(唯名論者, Nominalists)들의 신학과 거의 배타적으로 친숙하였음을 그리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및 다른 위대한 신학자들의 저술들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에게 실지로(practically) 알려지지 않았음을 이미 보였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그러므로, 만약에 1테살로니카 1,3에 처음부터 이 번역 오류가 없었거나 혹은 1979년보다 더 이른 시기에 바로잡혔더라면,

 

(i) 예를 들어, 만약에 13세기 이전의 시가에 이 번역 오류가 바로잡혔더라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가 자신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에서 향주삼덕(the three theological virtues)들에 대하여 설명할 때에, 1테살로니카 1,3세 개의 향주덕(the three theological virtues)들의 능동적 활동(active activities)들으로서 심장(heart) 바깥으로 표출되는외면적 산출물[external products, 일/노동(勞動)]의 성경의 근거이기 떄문에, 1테살로니카 1,3을 분명히 인용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ii) 예를 들어, 만약에 16세기 이전의 시기에 이 번역 오류가 바로잡혔더라면, 1테살로니카 1,3은, 위의 제3항에서 이미 고찰하였듯이, 세 개의 향주덕(the three theological virtues)들의 능동적 활동(active activities)들으로서 심장(heart) 바깥으로 표출되는외면적 산출물[external products, 일/노동(勞動)]의 성경의 근거이기 떄문에, 감히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가 16세기 초반에,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야고보 2,24) 를 무시하면서까지, 그리스어로 기록된 로마서를 1522년에 지역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특히 로마서 3,28을 독일어로 번역을 하면서, "믿음으로" 라고 직역 번역(leteral translation)을 하는 대신에, 작의적/작위적으로/의도적으로, "믿음으로(faith alone)" 라고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을 결코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질문 3: 만약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가 오늘의 날짜로 되살아나 그리스어 번역 대본 성경으로부터 1테살로니카 1,3을 독일어로 다시 번역한다면, 위의 제4항에 발췌된 바와 같은 자신의 이전의 번역문과 여전히 동일하게 번역할 수 있을까요???

 

질문 3에 대한 답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위의 제2항에 제시된 여러 지역 언어본들과 위의 제3항에 전달해 드린 바들, 그리고 위의 제4항에 주어진 지적을 그가 읽어보기만 한다면, 결코 그러지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르게, 특히 1990년대 이후에 갑자기 인류 문화사에 도래한 시,공간을 초월하는 인터넷 환에서는, 자신 고유의 어떠한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리고 무례하게, 다른 이들의 무지(ignorance)를 작위적으로/자의적으로/임의적으로 함부로 활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질문 4: 16세기 초반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는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으로부터 자신이 파문을 당하자,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통적 교리(doctrines)[여기에는 그리스도교 교의(dogmas)들이 포함됨]들에 하자가 있다면서, 피조물인 그가 만든 세 개의 교리들, "믿음만으로(faith alone)", "은총만으로(grace along)", 그리고 "성경만으로(Scripture alone)"을 제시하였는데, 만약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가 오늘의 날짜로 되살아난다면, 여전히 "믿음만으로(faith alone)"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질문 4에 대한 답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만약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가 오늘의 날짜로 되살아나, 위의 질문 3에 대한 답변에서 말씀드린 이유 때문에, 1테살로니카 1,3을 위의 제4항에 발췌된 바와 동일하게 독일어로 번역할 수 없다면, 또한 위의 질문 2에 대한 답변에서 말씀드린 이유 때문에, "믿음만으로(faith alone)"를 계속하여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1테살로니카 1,3이 그러한 주장에 반하는, 특히 성경 본문에 확실하게 기록된, 소위 말하는, 한 개의 반례(a counter-example)이기 떄문입니다.

 

5-3.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일/노동(勞動)(work)으로 의롭게 됩니다." (야고보 2,24)

 

와, 일/노동(勞動)(work)이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개념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관련된 1테살로니카 1,3에 대한 정밀한 고찰로부터 우리는 다음을 알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의] 믿음/신앙/신덕의 일/노동(勞動)(work of faith)"(1테살로니카 1,3)

은총(grace)의 덕택으로

"하느님의 일/노동(勞動)(work of God, opus Dei, 오푸스 데이)"(요한 복음서 6,29)

감사드리면서 기꺼이 화답하게(respond) 되는

"[윤리적] 선행(善行)/선업(善業)(good works)들"(#)을 말한(요한 복음서 6,27-28).

 

-----
(#) 게시자 주: 

(1) "[윤리적] 선행(good works)들"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제목: 윤리적 악은 죄이다]제3-4항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84.htm <----- 필독 권고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0월 24일]

(2) 이들 "[윤리적] 선행(善行)/선업(善業)(good works)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선행이 가톨릭 그리스도교 전례(Liturgy)라는 언급은, 다음의 글의 제3-2항에 발췌된, Dictionary of the Liturgy (New York, 1989) (원저자: Jovian Peter Lang)을 우리말로 번역한, "전례 사전"(주비언 피터 랑 지음, 박요한 영식신부 옮김, 출판사: 가톨릭출판사)에 주어진 "노동(work)"에 대한 설명의 마지막 부분에 주어져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81.htm

[이상, 내용 추가 끝]

-----

 

게시자 주 5-3: 바쁘지 않으신 분들께서, 다음에 있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가해 연중 제29주일 제2독서(1테살로니카 1,5ㄴ)을 포함하는, 홀수 해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제1독서(1테살로니카 1,5.8ㄴ-10)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추가로 읽을 것을 권고드리면서, 이번 글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21_mon.htm

 

----------
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32시간 (자료 조사 및 분석 포함)

 

====================

 

  

출처: http://skysunshine.kr/tech72/data/board/exhibition/its_temp_tnt_dir/03.htm

 

"형이상학적/존재론적(metaphysical/ontological) 진리"를 대면할 때에
우리는 즉시 "참이다(眞, true)" 혹은 "좋다(善, good)" 라고 말하지 않고,

"아름답다(美, beautiful)" 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에,

 

오로지 이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過程)에서(mediately),

"좋다(善, good)" 라고 말한다.

 

-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2013년 12월 24일 -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2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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