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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보좌주교職 은퇴 김옥균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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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 [novita] 쪽지 캡슐

2001-12-29 ㅣ No.2126

종교]천주교 서울대교구 보좌주교職 은퇴 김옥균 주교

 

“이 나무는 61년 노기남대주교님하고 심은 것인데 저렇게 높이 자랐어” “저 소나무 참 잘생겼지. 90년에 의정부에서 밤 9시에 옮겨온 것인데 저렇게 잘 자랐어”

 

28일 오전 11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감사미사와 이어 열리는 가톨릭회관 3층 강당에서의 아가페잔치를 끝으로 20여년간 정들었던 천주교 서울대교구청을 떠나는 김옥균주교(71). 그는 은퇴 전날 만감이 교차한 듯 교구청 곳곳을 둘러보며 감회에 젖었다. 그의 후임에는 강우일 주교가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47년간 사제생활을 하셨고 23년여를 서울대교구청에서 보내셨습니다. 감회와 소감이 남다르실텐데요.

 

 

“노기남대주교님과 4년, 김수환추기경님과 17년, 현 정진석대주교님과 2년여를 서울대교구에서 지냈고 총대리주교로만 17년을 보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역대 교구장님과 사제 수녀 신자들의 덕분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위한 헌신에 은퇴니 퇴임이니 하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만 한마디로 ‘시원섭섭’합니다.”

 

 

-주교님 사목중에 서울대교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많은 성장을 했습니다. 특히 보람이 있었던 일과 아쉬웠던 일은 무엇인가요.

 

 

“굵직굵직한 일이 많았지요. 특히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81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과 103위 한국 순교 성인 탄생’(84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89년), ‘김대건신부 순교 150주년’(96년)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룬 것이 보람입니다. 또 평화방송과 신문 TV등을 창립해 가톨릭매스컴의 기틀을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도움을 받은 것 만큼 남에게 되돌려주지 못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20세기 후반 명동성당으로 대표되는 서울대교구는 격동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나라와 교회의 갈등, 교회법과 세상법의 충돌 등 어려우셨던 순간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데모가 없는 날보다 데모가 있는 날이 더 많았지요. 솔직히 명동성당 언덕길에 나가보기 싫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안보면 괜찮은데 나가보면 도와줄 방법이 없거나 지나치다고 생각되는 점도 있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들이 미워져 하느님한테 죄를 짓게 되니까요. 가난한 이들보다는 그래도 형편이 낳고 한자라도 더 배운 사람들이 더 교회나 성직자에 대한 예의를 안지키는 경우가 적잖았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신 김수환추기경님을 도와 교회내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하시면서 서울대교구의 ‘안 살림’을 챙겨오셨고, 그로인해 ‘보수’를 대변한다는 얘기를 듣기도 하셨는데요….

 

 

“교회 내에도 다양한 의견들이 있는데 한 목소리만 밖으로 나가는 것은 온당치 않아 소신껏 저의 생각을 얘기하다보니 ‘보수주교’라는 소리를 듣고 사실과 다른 오해도 받곤 했지요. 하지만 사회에 진보와 보수가 있듯 교회 내에도 진보가 보수가 있고, 이 두축이 조화를 이뤄 성장해온 것이 천주교회지요.”

 

 

-‘웃어른’들을 모시면서 어려웠던 점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교구장님들을 모시면서 제가 ‘보좌주교’라는 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교구장님들과 생각이 달랐던 적은 있었지만 그로인해 얼굴을 붉혀본 적은 없었습니다. 김수환추기경님과는 함께 테니스도 하곤 했지요. 그래서 우리 교구 직원들이 저보고 ‘웃 분’들 모시는데는 최고였다고 놀리는 것 같아요.”

 

 

-은퇴후의 생활이 궁금합니다.

 

 

“서울대교구는 추기경님 은퇴시 ‘은퇴주교는 현직 주교와 똑같이 예우해 드린다’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저도 이에따라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지혜관’에 숙소를 마련했습니다. 교구에서 차량과 기사 및 월 130만원씩 생활비를 지원해 주고, 매달 부어온 사제공제기금에서 월 60만원씩을 받습니다. 공동숙소에서 살게되니 찾아오는 손님에게 밥 한끼, 술 한잔 변변히 대접할 수 없는 것이 다소 안타깝지만 그래도 밥해 먹을 걱정 없고 빨래 걱정 안해도 되니 더 바랄 것이 없지요. 앞으로는 힘닿는대로 낮은 곳에서 사회복지분야에 헌신할 생각입니다.”

 

 

인터뷰를 마친 김주교는 “신년초에 명동에서 대포나 한 잔 하자”는 솔깃한 제의를 해왔다. 시골에서 자라 막걸리를 유달리 좋아하는 그는 재임 중 신부들에게 “막걸리 한 통 가져오면 양주 한 병을 주겠다”고 유혹(?)하곤 했다.

 

 

<오명철기자>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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