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성당 게시판

청포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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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09-04-24 ㅣ No.12097

(청포도 사랑)

용인 이영호 벨라도

이른 새벽이었다. 잠든 아내 역시 깨여난 것 같았다. 하루 온 종일 힘든 노동에 지친 그녀였다. 벨라도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서재로 나오더니 쓰다 만 원고를 뒤적거린다. 이제 초고를 끝낸 원고였기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고처야 만 했다. 아직 시간의 여유는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급하였다. 지금까지의 줄거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하고 싶은 마음의 멧세지는 분명 하지만 글로 표현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답답할 노릇이었다.

어제 아내가 퇴근길에 청포도 한 송이를 사왔다. 내가 밤중에 간식을 찾는 버릇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분명 입에 넣지 안았으나, 오늘따라 향기가 유별나다. 마침 오늘의 주제 역시 한국식 포도, 즉 머루이야기였다. 의도적으로 포도를 코 끝에 대 보았다. 꿀 포도였나 보다. 달콤하다. 향긋하다. 청포도 마술에 이끌려 상상의 나라로 달려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부시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내가 완전히 잠을 깬 것이었다.

“일어났어? 아직 새벽이야. 더 자....,”

“3시구먼...!!”

무엇인가 강렬하게 떠 오르는 영상을 잡아 글로 표현하려는 순간, 환상이 깨지고 현실로 돌아왔다. 안타깝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지 않은가. 이젠 아무리 기다려도 한 줄의 글이 나올 수 없다. 일찍 포기해 버렸다. 책상에 앉아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TV에서 아침 뉴스가 들려왔다. 출근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아내가 출근한 후 다시 연필을 잡아 본다. 성체성사에 대한 멧세지였다. 물론 성사적 의미는 논할 것이 없다. 성체성사 자체로 나를 성화시킨다. 허지만 성체성사의 깊은 의미를 살펴보면 나의 삶안에서도 성체성사와 비슷한 사건들이 발견될 수 있다. 삶이란 시간의 연속이다. 만일 누군가 하루의 일과 중 일부를 남을 위해 배려 한다면 나의 생명의 일부를 그들에게 바치는 셈이다. 예수그리스도처럼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생명을 선물로 준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는 않을까? 오늘 새벽의 경우, 기발한 영상을 포착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용도가 자신의 글 솜씨로 그친다면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가 동감하는 내용이고 그녀 역시 얻고자 했던 보물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삶은 시공(時空)을 넘어서 늘 공유(共有)한다. 부부가 함께 산다는 것, 그것 자체가 공유(共有)가 아니던가. 꼭 부부(夫婦)가 아니더라도 부모형제라는 데두리 안에 사람들은 늘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허지만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1에서 60을 주셨다. 그리고 나서 하느님은 덤으로 어떤이는 10을 주고, 어떤이는 20 내지 30을 더 준다. 마지막 날 하느님은 셈을 하실 것이다. “너의 것이 몇 개 였느냐?” 그 다음 질문이 기대된다.

하루 온 종일 숫자 놀음에 치쳐 잠이 들었다. 새벽에 무리한 탓도 있으리라. 해는 서신에 뉘엿뉘엿 지고 아내 역시 직장에서 돌아 왔다. 오늘따라 아내가 무척 반갑다. 웃는 얼굴 보다 손가방에 관심이 더 많다. 그렇지만 ....,오늘은 허탕이다. 청포도 사 오는 것을 잊은 모양이다.

“청포도...? 날 마다 꼴뚜기 인감...!!!.”

아내가 지갑을 건네준다. 나 보고 직접 사오라는 뜻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거절해 본다.

“아...., 아니야.”

분명히 물건을 흠치다 들킨 형상이었다. 나의 인생은 늘 빚쟁이였나보다. 기웃거리고 구걸하고...., 가난한 것은 분명하지만 늘 욕심쟁이였다. 이러다 하느님 만나면 혼날 터인데....., 나의 삶에서 나는 몇 개를 하느님께 드렸을까? 혹시 마이너스 통장을 드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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