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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게시판에서 퍼온 글. -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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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우 [krieg] 쪽지 캡슐

2000-04-23 ㅣ No.587

백남용 신부님의 글입니다.

 

"부활절엔 좋은 일만..."

 

 

부활절과 함께 참 좋은 계절이 열립니다. 금년에는 특별히 그렇습니다. 서로 상대방의 상처에 앉은 묵은 딱지를 잡아떼어서 치명적인 아픔을 주려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던 선거전도 지나고 화해와 협력을 다짐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정치인들이야 그런 일에 익숙해서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그 장단에 춤출 수밖에 없었던 단순한 우리네 대중들의 마음을 그렇게 금방 화냈다 금방 웃었다 하지 못합니다. 행여 그 패갈려 서로 미웠던 마음이 오래갈쎄라 주님께서는 사랑이 승리한 축제인 부활절을 때맞춰 주셨습니다.

 

다른 민족도 아닌 한 핏줄끼리 오십오년씩이나 철천지원수였습니다. 이런 일이 지구상에 또 있었는지, 앞으로 또 있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형제간에 생기는 미움이 전혀 모르는 사람과 사이에 생기는 미움보다 더 크게 되는 것도 우리 민족만의 유별난 성격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미움을 녹이는 따스한 입김의 대화가 이 사랑이 승리한 축제인 부활절에 때맞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산야(山野)가 불에 타고, 논밭이 가뭄에 타고, 전염병에 가축들이 생명의 소각로(燒却爐)에서 타버렸습니다. 온통 하늘을 뒤덮은 황사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도 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부활절을 앞두고 적지만 비가 내려서 그 모든 타는 것들을 꺼주었습니다. 부활절에는 이렇게 좋은 일들만 생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외적(外的)인 좋은 일들보다도 부활절에는 진정으로 내적(內的)인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많은 마음 착한 분들이 귀찮음을 마다하지 않고 긴 줄을 서서 짧은 고해(告解)를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수십 수백 명의 고해를 듣는 사제(司祭)에게는 다 그만 그만한 죄목이건만 마음 아파하고 뉘우치고 개선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돌아서 나갑니다. 그래서 수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도 합니다.

 

정치적인 화해와 협력도 좋습니다. 남북한의 정상회담도 좋습니다. 목마른 대지에 단비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외적인 제스처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고해소 앞에 줄서있는 착한 죄인들처럼 내적인 부활이 없다면 몇 날, 몇 달 뒤에는 또 딴소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부활절은 제스처의 축제가 아니고 근본적인 존재적 변화의 축제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의 축제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축복이 이 모든 좋은 일들을 완성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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