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성당 게시판

비굴한 서민, 천박한 재벌 '막장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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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5 ㅣ No.11986

비굴한 서민, 천박한 재벌 '막장 판타지'
"이게 판타지라고?
난 확 깨는데…."

마흔을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 집도 없고 주식에 넣었던 여윳돈이 '반토막' 나는 바람에 요즘도 가끔 "하늘이 노랗다"는 직장인 A씨.
연초부터 부쩍 생기발랄해진 아내가 매주 지상파·IPTV·인터넷 VOD 등으로 7~8차례 시청한다는 드라마에 눈길이 꽂혔다.
 
그리고 엄동설한 시냇가에서 멱 감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요즘 돈 없으면 인간 저렇게 망가지는구나. 자식 놈 제대로 키우려면 무슨 짓 해서든 돈 벌어야겠네."

그의 우둔한 현실 감각을 파르라니 벼려준 것은 '꽃보다 남자'.
남들은 이 '신데렐라' 드라마 때문에 환상의 바다에서 허우적댄다는데 그는 왜 저리 꼬였을까?

가장 마음을 상하게 한 건 드라마 속 이웃의 비굴한 모습.
세탁소를 운영하는 여주인공 금잔디의 부모는 고교 2학년인 딸을 재벌가 아들과 연결시켜주기 위해 안달.
재벌 2세 구준표가 갑자기 집을 방문하자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두 손 맞잡고 고개 조아리며 '말씀'받잡는다.
"얼씨구, 왕처럼 거만한 저 어린 놈은 다리마저 꼬고 있네."
 
더 가관인 건, 그다음.
부모는 안방에 자리 펴놨다며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 두 미성년자를 한 방에 동침시키려는 듯 말한다.
딸이 외박을 해도 그곳이 재벌가 자제와 함께였다는 이유로 기뻐 날뛰는 이들의 존재는 요즘 유행하는 '엽기' '막장' 그 자체인 것만 같다.
 
"딸 팔아 팔자 고치겠다는 사람들 얘기가 이렇게 버젓이 전파를 타다니….
드라마는 사회상을 반영한다는데 세상 이렇게 무서워졌나?"

▲ ‘꽃보다 남자’의 한 장면. /KBS 제공
한 주가 지나니 이번에는 재벌이 난리다.
구준표와 금잔디의 교제를 막겠다며 준표 엄마가 잔디 가족들에게 청부 폭력을 행사하고 세탁소를 문 닫게 해 생계수단을 끊어 버린다.

그는 인정했다.
"빈부 격차는 한국 드라마의 핵심 코드니까."
그래도 부아가 치민다.
 
"이렇게 굴욕적인 서민 캐릭터, 천박한 재벌 캐릭터는 처음"이라고 되뇐다.
A씨 인터넷 게시판에 조심스럽게 비판 의견을 올려본다.
"뭥미? 원래 일본 만화 원작이 그렇거든, 그리고 수출용이라고."
"뭘 따지냐? 판타지라는데."
 다닥다닥 달라붙는 마니아들 비난에 잔뜩 쪼그라든다.
 "내가 그렇게 구닥다리인가?"

있는 사람은 좀 없는 척, 없는 사람은 좀 있는 척하면서 두루두루 어우러지는 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라는 게 A씨의 생각.
그런 그에게 '꽃보다 남자'는 현실을 비웃으며 극단적 편가르기를 향해 '역주행'하는 악성 콘텐츠였다.
얄팍한 판타지를 위해서.
 
다음날 밤늦게 퇴근한 A씨.
아내는 어김없이 '꽃보다 남자' 재방송과 함께다.
화면에는 '소라빵' 머리 구준표의 장광설.
"너희들 대중목욕탕에서 목욕해봤냐? 포장마차에서 어묵 먹어봤어? 김장은 담가봤냐? 어휴 너희가 인생을 알겠냐?"
돌아선 A씨, 아내 몰래 숨 잘게 부수며 혼잣말이다.
 "그래 준표야. 형도 인생 좀 모르고 싶거든."
 
                                                    - 조선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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