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부네 게시판

PC용으로 풀어쓴 주의 기도와 어느 교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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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수 [marisio] 쪽지 캡슐

2000-07-14 ㅣ No.17

♧재미로 주기도문을 pc용어로 풀어 쓴 것을 한 번 웃으시라고 소개해 봅니다.  

 

하드 디스크에 계시는 우리 프로그램이여/

패스워드를 거룩히 빛나게 하시고/

운영체제에 임하시며/

명령이 모니터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프린터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자료를 주시고/

우리가 프로그램의 에러를 용서한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바이러스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불시의 정전에서 구하소서!  

엔터.

 

 

넘~ 심했나요?

예수님 죄송~~ ^.^

사랑하는 동료,후배 교리교사 여러분!

1990年초 어느 선배의 뜻하지 않은, 그리고 권유 같지 않은 권유로 시작한 교리교사 생활이 어느덧 여기까지 왔습니다.

때론 웃고, 또 울고, 또한 좌절도 겪었고 수많은 유혹도 있었으며 지쳐 쓰러져 서 있기조차 힘이 들었던 지난 기억들이 이제는 아련히 추억 저편으로 물러 가는 것 같군요.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가슴 뿌듯한 것은 아이들의 사랑을 마음 가득 받으며 물러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존경하는 수많은 선배교사들과 훌륭한 후배교사들에게 감히 저의 경험담과 생각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과연 내가 이런 글을 남길 수 있을 만큼 제대로 교사생활을 했는가라는 자문을 구했을 때 대답은 처참했습니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건방을 떨고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대적이었지만, 어느 시대에 누군가는 해야만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최소한 선배들이 했었던 실수나 오류들을 후배들은 답습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용기를 갖고 펜을 들기로 했습니다.

혹시 읽던 도중 반대되는 생각을 갖게 된다거나 본인이 자만심에 취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시게 되더라도 부족한 이의 생각이려니 하고 이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저를 처음 교리교사에 불러 주셨던 홍순보 마태오 선배에게 감사하고, 처음 호흡을 맞추었던 서영묵 로벨또 선배, 친구이기도 한 서진구 다윗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현직 동료 후배 교리교사들, 그리고 저의 교리교사 생활 후반부에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장희성 프란치스코 주임신부님, 수녀님, 그리고 사목위원 여러분들, 또한 서연자 비아 자매님을 비롯한 자모회 어머니들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본인들은 모르시겠지만 저의 교리교사 생활에 정신적인 힘이 되어 주셨던 허숙자 아가다 선생님, 김소망 루가(본인의 고교시절 담당 교리교사)선생님께 또 다른 감사를 드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께 감사와 찬미와 찬양을 올립니다.

 

                                                           1999년 1월 24일

                                                           엄  한  종 발렌티노 드림

 

1. 언제나 아이의 마음  

 

교리교사를 처음 시작하던 해에 고등부 보조교사를 맡았었다, 시작한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은 어느 교리시간, 주임교사가 교리를 진행하고 당시 원장 수녀님께서 참관차 교리실을 방문하신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당시 토론내용이 개신교 신자 학생들이 우리 천주교 신자들에게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공격해올 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가를 논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주된 교리내용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이 되지만 토론도중 주임교사와 수녀님께 이 질문이 어졌고, 주임교사에 이어 수녀님마저 대답을 똑 부러지게 못하고 우물쭈물하시는 게 아닌가. 아마도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서 그랬으리라 여겨지지만 학생들은 내내 답답해했고 이때 내 릿속에 반짝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어 내가 나서게 되었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기념하는 것이다.

맥아더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은 신이라서 동상을 세우는 것이겠느냐? 그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 말 한마디에 학생들은 함성과 박수를 보냈고, 나의 교사생활에 대한 자세는 일순간 뀌게 되었다. 그것은 자만심이었다. 그때 나는 아주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별거 아니었구나 하는 자만심은 몇 개월간 지속되었고, 학생들과의 교리시간과 대화가 어지면서 그 골은 깊어만 가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연말쯤으로 기억하는 날에 학생들과 어떤 마찰이 있었는데-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 남-내가 아이들과 전혀 가깝게 있지 않았고, 점점 거리가 생겨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내가 심한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건 아니다, 정말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 차 있을 뿐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당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그 아이들을 졸업시키고 새학기를 맞으면서 오랜 묵상을 통해 그들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려면 언제나 그들의 마음과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고, 오늘까지 그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이들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다.         

교사생활 3년째이던 해에 고등부 학생회는 단순 교리반에서 자치활동을 하는 모임으로 발전하기 위해 학생들이 무진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부님이하 선배교사들까지 그것을 반대했고 학생들의 저항은 아픈 눈물까지 흘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선배교사들의 의견에 찬성할 수 없었고, 어떻게 든 학생들이 원하는 자치활동을 하게끔 해주고 싶었지만 당시 나의 힘은 너무 미약하기만 하였다.

정말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나도 너희와 같은 생각’이라는 뜻을 진심으로 전했고,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용기를 갖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그러나 그 시간들은 우리가 진정으로 함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성서나 교리지식만을 가르치는 단순한 과외교사가 아니다. 아이들의 신앙과 인성, 가치관 성립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교리교사이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아이들 앞에서 또는 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준비하면서 권위의식 따위는 철저히 버려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생각으로, 때로는 그들의 행동으로 언어로 보여주고, 말하며, 느낄 수 있을 때 그들은 진정 우리 안에 들어올 것이다.

언제나 아이의 마음. 그것만이 그들 안에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2.이것은 소명이다.

 

후배교사들에게 특히 나이 어린 후배교사들에게 묻고싶다.

지금 왜 거기 서 있는가? 어떻게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 하는가?

선배의 권유에 의해, 신부님 혹은 수녀님 권유에 의해, 아니면 본인 스스로 희망해서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처음 교사생활에 발을 디딘 것은 참 우습게 시작되었다.

군대를 막 제대하고 친구와 저녁미사를 봉헌하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성당 앞길에서 한 선배와 마주치게 되었다. 선배는 무엇이 바쁜지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왔고, 나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야! 너 제대했구나."   "예"

"너 교리교사나 한번 해봐라."   "예?"

이게 다였다. 그리곤 선배는 계속 뛰어갔고, 내 친구는 혼잣말로 "저 형은 여하튼 얼굴만 보면 저 소리야"하고 말했다.

물론 나도 교리교사에 대해 전혀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고, 내 자신의 자격에 대해서도 한참 미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 선배의 말이 선배의 말이 아니라, 선배의 입을 빌린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다시 들려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전에 대죄를 짓고 수년간 냉담생활을 해오다, 군대시절 회개하고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보속을 친히 내려주시는 것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순명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주, 학생미사시간보다 약 한시간 이른 시간에 성당에 들어섰고, 나에게 교사를 권유한 그 선배를 찾아갔다. ’선배가 교사하라고 해서 왔다’ 하니까 선배는 순간 당혹스러워 했고,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선배도 그냥 지나면서 습관적으로 한 말이었고, 이렇게 내가 바로 찾아올 줄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선배에게 감사한다. 그 선배를 통해 하느님께서 나를 불러주셨으니 너무 고맙기만 했다. 물론 그 선배를 통해 나를 일꾼으로 써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함은 말로 표현해야 무엇하겠는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하느님께서 일꾼으로 쓰시기 위해 날 불러주셨는데 하찮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 내가, 어찌 내 뜻대로 그 일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좀 힘들고 짜증이 나서, 시간이 없어서, 교사생활을 하다보니 다른 주변사람들에게 소홀해지는 것 같아서, 또는 함께 일하는 이들이 마음에 맞지 않아서 그만 둘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하느님 사업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왜 그만 두냐고?... 그건 내 뜻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불러 주셨듯이 지금도 나를 다른 길로 인도하고 계신 걸 알 수 있다.

다시 말하건대, 여러분을 하느님사업에 쓰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직접 여러분을 부르신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리교사의 직분도 드러나

지 않은 또하나의 성소인 것이다.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듯 싶다.

 

 

3. 사람이 재산이다.

 

우리는 학창시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배웠다.

즉, 개인주의, 이기주의에 가득 차서 온전히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먹고사는 문제야 어떻게 든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 치지만, 그렇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들짐승 이상이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 논리가 형성된다. 그 점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껏 나의 교사생활 뒤에서 보이지 않게 도와주신 수많은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다.

예를 들기도 힘들만큼 많은 분들이 있었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은 산곡동 신협의 김 부장님이시다. 그 분은 본당 신자도 아니었고, 원래 개인적으로 아는 분도 아니었다. 단순히 그 분 부하직원이 내 친구였다는 이유만으로 어설프게 첫인사를 나누었고, 이후 간혹 맞닥뜨릴 때마다 내 나름대로 최대한의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으며, 그 분과 깊은 대화를 나누어보지는 못

했지만 서로간에 보이지 않는 신뢰가 쌓여져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당시에 내 자신이 어떤 계산을 염두에 두고 행한 것은 절대 아니다.

여하튼 그렇게 시간은 지났고 ’천사의 밤’의 부활을 계획했던 96년 가을이었다.

나의 학창시절에 17회로 막을 내렸던 ’천사의 밤’을 18회로 부활시키고자하는 나의 의지와 당시 고등부학생들의 열망이 어우러져 부활이 결정되었는데, 급기야 커다란 난관에 착하고 말았다.

바로 장소와 장비의 문제였다. 우리 본당 내에서 진행하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나 거의 불가능하고 설령 행사를 치른다 해도 10여년 전의 천사의 밤보다 더 초라하게 만들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새로운 조명 및 음향장비를 본당에 들여온다는 것은, 그것도 ’천사의 밤’을 위해서 수백 만원에 이르는 돈을 투자한다는 것은 말도 꺼내지 못할 일이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워가다시피 하며 생각해낸 것이 산곡동 신협의 예식홀이었다. 조금은 작은 듯 싶었지만 아담한 사이즈가 소극장분위기로 좋을 것 같았고, 음향시설은 저절로 묻혀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조명시설이 문제였다. 예식홀 전용이었기 때문에 조명이랄 것도 없는 전등 몇 개에 샹들리에가 전부였고, 공연을 위한 시설은 전무했으니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에서 대여를 한다해도 한번 쓰는 비용으로 수십만원의 지출을 감당하기도 힘들었고, 그나마 그런 물건마저도 구식 일색이었다.

그때 떠오른 생각이 신협에서도 청소년 문화행사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래 할 수 없다. 밑져야 ’미친놈’소리밖에 더 듣겠느냐"하는 마음에 신협을 직접 두들기기로 한 것이다.

내 친구는 당시 기껏해야 기안을 올릴 수나 있는 직급이었고, 중요한 결재권을 쥐고있는 김 부장님이 문제였다.

우선 친구를 찾아가 사정이야기를 하고 도움을 청했다. 친구는 기안서는 올려 주겠지만 김부장님과는 내가 직접 면담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해 주었고, 나는 바로 김부장님을 찾아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척 반가운 표정으로 환대해 주었던 그분도 나의 방문목적을 듣기 시작하면서 얼굴이 조금씩 굳어져가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나와 우리아이들의 열망은 나를 그렇게 쉽게 포기하게 하지 않았다. 어차피 ’도’ 아니면 ’모’였던 것이다.

계속해서 나의 설득은 이어졌고, 이윽고 부장님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가 무척 긴장했던 걸로 기억된다.

"만일 다른 어떤 사람이 와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미친 소리라고 하고 상대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제 연말이 코앞이기 때문에 우리가 쓸 수 있는 1년 예산도 바닥이 나있고, 특정 단체를 위해서 그런 투자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죠. 하지만 엄한종씨가 하는 일이고 이렇게까지 열심한 모습을 보고 믿음을 갖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한번 해보기나 합시다."

성공이었다. 이렇게 기적같이 일이 풀리다니... 정말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마음속으로 ’하느님’이름만 계속해서 불러댔다.

"엄한종씨, 생각보다 대단한 데가 있는 사람 같군요. 나 같으면 이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거고 설령 했다하더라도 얘기를 꺼낼 용기가 나질 않았을 겁니다."

평소 아무 사심 없이 안부를 묻고 지내기만 했던 관계에서 이렇게 커다란-당시 상황에서는 무척 큰일이었다-일을 만들어 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일은 풀려 나갔고, 신협에서는 12월

말에 다음년도 예산을 끌어들여 200만원 상당의 조명장비를 구입하게 되었다. 당시는 순전히 ’천사의 밤’에 사용할 목적으로 구입해 준 것이다.

조짐이 좋았던 대로 부활한 ’천사의 밤’은 멋지게 재탄생하게 되었고, 행사가 끝나고 난 후 우리 신부님께서는 많은 학생들과 어른들 앞에서 나를 뜨겁게 포옹해 주심으로써 교리교사회에 대한 강한 신뢰감을 보여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가슴 벅찬 순간들이었다. 내 평생 잊지 못할 일이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물론 전혀 과장되지 않았고 오히려 축소된 부분이 더욱 많다. 그리고 내가 내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수많은 일들 중 하나일 뿐이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번 내 교리교사로서의 모습을 냉정하게 재조명해본다.

영성적인 문제, 교리적인 문제로는 아직도 자신이 없지만 업무수행능력 만큼은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다고 여겨진다. 내가 교만하다고 생각해도 좋다. 나름대로의 업무능력을 인정 받은 데는 수많은 도움 자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많은 은인들.

평상시 내가 그들에게 소홀했다거나 했으면 이런 일은 생기지 못하지 않았을까?

요즘의 사회행태나 심지어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 중 특별나게 젊은층의 사람들이 개인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을 보여가고 있음을 느낀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는 자신의 관심밖에 사람들에 대

해서는 홀대하게 되고 그것이 계층간, 모임간의 이질감을 형성하게 되며, 그것은 우리교회의 공동체 의식의 노력에 반하게 되는 것이다.

원만한 대인관계 이상의 노력하는 대인관계는 어느 날 갑자기 산타클로스의 선물보따리처럼 당신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고, 우리의 아이들은 그 행운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개인이던 단체간이던 간에 그 어떤 교류가운데 손익을 계산하여 이익이 있을 것인가,손해가 될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항상 고민 아닌 고민을 한다.

그런 내용을 무시하란 소리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감안하되 언제나 그 계산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장사가 아닌 신앙생활의 일부임을 안다면 보다 폭넓게 생각

하고, 멀리 내다보는 안목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내 옆을 스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어느 누가 산타클로스의 선물 보따리인지는 알 수 없다. 속담에 ’뿌린 대로 거둔다’고 했다.’사람’이라는 재산을 원한다면 지금 스쳐 지나가고 있는 자

에게 손을 내밀어 보라. 그 느낌이 오는지...  

 

4. 계속되는 자기의식의 개혁.

 

세월은 흐르고  세상도 변하고 사람들도 변하고 성가도 변하고 있다.

"딜레마"라는 생활성가가 나오기 이전 대부분의 많은 신자들은 성가를 ’랩’으로 하는 것은 거의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기존의 가톨릭성가를 댄스 풍으로  REMAKE하는 것도 생각지 못했

던 일이다.

물론 아직도 많은 수의 어른들은 그러한 변화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음도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문화와 환경은 우리도 느끼지 못할 순간에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교리교사로서 최소한의 자기주관과 개성은 가지고 있고, 흔들리지 않아야겠지만, 우리 시대의 변화, 특히 청소년들의 문화에 대한 변화는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언제인가 한 후배 여교사가 학생들의 스티커사진을 모으고 그것을 여학생들이 주로 가지고 다니는 다이어리에 빼곡히 붙여 놓은 것을 보고 처음에는 ’애나 어른이나...’하는 식으로 받아들였었다.

내가 보았을 때 그 선생님 나이또래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다지 좋게 보질 않았던 것 같다.하지만 그것이 나의 잘못된 생각임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이 지나서였다.

시내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그 사진기들과 그 곳을 찾는 수많은 청소년들을 보고 그것이 청소년들 사이에 벌써 깊게 뿌리내린 하나의 문화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학생들을 마음으로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나’였지 그 여교사가 아니었던 것을 알고 무척이나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성인으로서 이미 타성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 여교사가 의도적으로 한 행동이든 아니든 간에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 그녀는 아이들의 문화 속에 서 있었고, 내가 그 아이들이었더라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그녀에게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었

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렇게 그들 안에 형성되는 문화가 언제나 올바른 것만은 아니고, 설령 위험하지 않다 하더라도 폐단은 늘 있을 수 있다. 그런 점들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짚어주며 그런 새로운 문화를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듯 싶다.

예를 들어 방금 이야기한 스티커사진의 경우, 본인이 알기에는 최초 일본에서 수입되었고, 아직도 인화지는 100%수입품인 것으로 알고 있다. 또, 로열티도 상당액수가 지불되고 있고, 인스턴트화

되어 가는 우리 청소년들의 정서도 무척이나 마음에 걸린다.

이런 문제들을 지적하며 함께 이야기한다면 더욱 좋은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교사들은 언제나 변화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꾸

준히 자기의식의 개혁을 행해야 한다.

넓은 포용력과 냉철한 판단력을 가지고 그들만의 문화에 조용히 파고 들어가 보자.

 

 

5. 끝에서 시작을...

 

만 9년 동안 교리교사를 해오면서 수많은 행사를 진행해 왔다.

수 차례에 걸친 캠프, 바다의 별, 천사의 밤, 체육대회 등... 거의 선두에 서서 진행을 해왔지만 실패라고 할만한 행사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요인중의 하나가 언제나 끝날 때 다음의 시작을 고민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91년 여름. 당시 2년차였던 나에게 ’지구캠프’라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고, 멋모르고 시작한 일은 결국 내자신도 불만투성이인 채로 끝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무엇이 문제

였는지 곰곰이 생각했고, 그것은 다음해의 여름 캠프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대략적인 아웃라인을 그 버스 안에서 그렸고, 이듬해 또다시 행해진 캠프에 그때 그 생각들을 반영했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 캠프는 모두가 만족한 대성공으로 끝났고, 그 습관은 그 때부

터 내 교사생활 안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바다의 별’을 준비, 진행하면서도 언젠가 부활시킬 ’천사의 밤’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바다의 별은 매번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지만, 나는 무언가 썩 내키질 않았다. 다른 본당 축제에 가보

았을 때도 정신만 없었지, 재미있다거나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던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제점 중 가장 큰 것이 사회자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반드시 사회자가 있어야 할까?"하고 또다시 고민에 빠지게 되었지만, 이내 사회자 없이 충분히 가능

하다는 것을 생각해 내게 되었다. 어찌 보면 모험이었지만 이 생각을 머리 속에 남겨두고 이후 2년 후에 ’천사의 밤’을 치르게 된 것이다.

10년만에 부활이었지만 사실상 처음 시작하는 ’천사의 밤’에 사회자도 없이 진행한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이상의 대성공. 탁월한 선택 그 자체였다.

오랜 시간을 두고 고민해온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또다시 그 다음해 천사의 밤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OPENING MUSIC부터...

교리든 행사든 가장 좋은 아이디어와 구상은 그것이 종료되는 시간에 많이 떠오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마치고 안도감과 허탈함, 또는 무용담에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러나, 그렇게 내용 없는 생각을 할 시간에 조금만 신경을 쓰면 금새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고, 다음 행사가 임박했을 때 큰 고민 없이, 그리고 좋은 내용으로 일을 치를 수 있음을 나는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습관은 교사자신의 안목을 넓히는데도 큰 보탬이 된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무슨 일이든 한가지를 마쳤다면, 다음엔 어떻게 해보고 싶은가를 생각해 보라. 끝에서 시작을...

당신은 분명 좋은 습관을 갖게 될 것이고, 당신과 우리 주일학교는 가파른  발전을 하게 될 것이다.  

 

 

6. 교리교사도 공인이다.

 

수년전 학부모 간담회가 있을 때 이야기다.

당시 고등부를 맡고 있을 때였고, 주제발표가 끝난 후 학년별로 교사와 학부모가 만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느 어머니께서 나에게 이런 말을 하셨다.

"혹시 선생님 아시는지 모르지만 우리 애가 선생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마치 우상처럼..."

충격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일이 나에게도 생기게 되다니... 무척이나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나의 행동과 모든 말들이 그 아이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을 생각하

니 아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왔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무서운 마음도 들었다.

모든 일들에 대해 한참 민감하고, 이제 막 인생살이에 필요한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는 시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어느 대상이 미칠 수 있는 영향은 상상하기 힘든 정도의 것일 것이다.

누군가 나를 닮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찌 보면 기분 좋은 얘기이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학생이 다행스럽게도 정말로 나의 좋은 점만을 배워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나의 올바르지 못한 모습을 정확한 판단기준 없이 답습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

최소한 교회 안에서의 내 모습을 되돌아보았을 때 그다지 자신 있는 생활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 보니 불안한 마음은 무척이나 오랜 시간 내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회상된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그 학생은 아주 평범하게, 그리고 신앙 안에서 열심히 생활하는 청년으로 성장을 했다.

그렇지만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우리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아이들은 우리를 주시하고 있고, 나의 사사로운, 그리고 생각 없이하는 행동과 언어들이 우리아이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우리의 의지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전해지

고 있음을 우선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명심해야할 것은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공인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상으로 하는 인원이 많던 적던 간에 적어도 어느정도의 영향

력을 미칠 수 있는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확실한 책임의식을 갖고, 교리교사다운 모습을 갖출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7. 진실한 사랑만이 참사랑을 부른다.  

 

원래는 이 이야기는 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20회 천사의 밤’에서 모든 것이 다 이야기되었기 때문에 그냥 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당시 천사의 밤과 성탄제 준비로 한참 정신이 없었던 시기에 참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고등학교 2학년생이 중3학생을 버릇이 없다며, 야단을 친다는 것이 폭력을 사용하게 되었고, 피해학생은 눈 주위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나에게 빠르게 연락이 되어 후속

조치를 취할 수 있어 다행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 내에서 폭력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이런 문제를 어른들이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내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다음주, 학생미사가 끝나고 고등부를 유아실에 집합시켰고, 영문도 모르고 끌려오다시피 한 여학생들과 일부 남학생들은 어리둥절해 하기만 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내 자신도 흥분하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유아실에 들어오자마자 험악한 분위기 속에 벌을 받아야했다. 특히 남학생들은 강도높은 벌을 받고있었고, 나는 한 학생을

시켜 ’각목’을 구해오게 하였다.

그 학생이 각목을 가지고 들어왔을 때는 험악한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상황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사건의 내용을 설명하고, 그것이 한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라 모두의 책임임을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는 손에 들려있던 각목에 힘을 주는 순간, 막막해지기 시작했

다.

아이들을 정말 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럴 수 없음을 깨닫는 데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맞아야 할 사람은 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는 옆에 있는 작은 책상을 끌어놓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나는 언제나 너희에게 올바르게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건 나의 엄청난 교만이었음을 이제야 알 수 있게 되었어.... 정말 너희들에게 미안하구나. 이 몽둥이로 매를 맞아야 되는

사람은 너희가 아니라 바로 나다."

아이들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벌써 일부 여학생들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회장 나와!"

"......."

"너부터 나를 친다.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만큼 세게 쳐야한다. 쳐!"

"선...생.......님..."

회장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면서 몽둥이를 손에 든 채 부들부들 떨고 서 있었다.

이미 여학생들은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고, 남학생들도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쳐, 새꺄!"

".........."

그렇게 망설이던 회장은 결국 소리내어 울면서 내 엉덩이를 내리쳤고,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그렇게 모든 남학생들에게 약 20대를 맞고 나니, 일어 설 수가 없었다.

한동안 우두커니 무릎을 꿇고 있다가 일어서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앞에 있는 책상을 손으로 지탱하고는 겨우 일어서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여학생들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울고 있었고, 남학생들도 3분의 2는 눈물이 범벅이 되었으며, 나머지 남학생들도 눈물을 참느라 어금니를 물고 있는 것이었다.

"난... 난 너희들 없이 살 수가 없을 것 같단 말야, 이 새끼들아..."

결국 나도 울음이 터지고 말았고, 말꼬리가 흐려지고 말았다.

아이들의 울음도 극에 달해 마루바닥마저도 눈물 범벅이 돼가고 있었다.

모두가 울었다. 아이들은 미안하고 슬퍼서 울기도 했지만 그제야 나의 참사랑을 알고 그 기쁨에 울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나의 사랑을 알아준 것이 고마워서 또 울었다.

"얘들아. 나 오늘 너희들을 안아보고 싶다. 아주 가슴깊이 안아 보고싶다. 그래도 괜찮지?"

"네!"

아이들은 특히 여학생들은 크게 고개까지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앞에 있는 회장을 시작으로 남학생부터 한명씩 안아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이 나를 안고 있는 것처럼 아이들은 나를 힘껏 끌어안으며,

"선생님 정말 사랑해요.""죄송해요!""우리도 선생님 없이 못살아요"

하는 것이다.

한명 한명 안아 나갈 때마다 마음이 가벼워지는걸 느낄 수 있었고, 기쁨이 몰려오고 있었다. 정말 행복했다.

여학생들의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고 어느 여학생은 달래주느라 안고 5분은 있었던 것 같다.

아! 그 여학생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다.

중1때 처음 나를 만난 녀석이었는데 이상하게 나와는 가까워지지 못했었다.

이 이야기는 후에 그 여학생이 직접 나에게 했던 말들이다.

아이들과 스킨쉽을 자주 나누는 나를 그 녀석은 좀 혐오스러워 했다.

나는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어깨동무는 기본이고, 손을 잡고 다닌다거나 팔짱을 끼고 다니는건 예사였다. 인사로 포옹을 하는 경우도 많았고, 어떤 여학생들은 간혹 내 볼에 뽀뽀를 스스럼없이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런 행위들이 다른 아이들과는 자연스러웠는데 그 녀석은 유독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음탕한 교사라고 욕을 할 지 모르지만 사실 아이들과는 아주 오래된 관

계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실제로 한 남교사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나에게 불만을 표시했으나, 얼마 후 아이들과 나누는 스킨쉽이 서로에게 정을 갖게 하는 훌륭한 매개체 역할을 한다

는 것을 알고는 나를 따라 한 적이 있다.

여하튼, 그 여학생은 그래서 나와 얘기도 잘 하지 않았고, 조금 잘못을 해서 지적을 하면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랐던 나는 그 녀석을 그저 까

다로운 성격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녀석이 먼저 다가와 팔짱을 끼우고는

"선생님의 진짜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동안 오해해서 정말 죄송해요. 저는 선생님이 저희를 이렇게까지 생각하시는지도 모르고 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정말 죄송해요. 그리구요, 저

선생님 정말 사랑해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랬구나. 선생님이 오해 받을 만도 했었네."

"아니에요. 제 눈이 좀 이상했었나 봐요."

나는 다시 한번 자신있게 말한다.

’진실한 사랑만이 참사랑을 부른다’

아이들이 몰라준다고 속상해 할 필요는 없다. 언젠가 어떻게 해서든, 또는 이미 아이들은 그 사랑을 느낄테고,또 표현을 안해서 그렇지 벌써 알고들 있을테니까.

어쨌든 그렇게 해서 아이들과 나는 주위의 모든 이들이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더욱 가까워졌고, 나에 대한 또, 다른 선생님들에 대한 아이들의 존경심은 대단해진 것 같다. 어떤 교사들은 나에

게 이런 질문을 한다.

’아이들하고 있을 때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해요? 왜 아이들은 발렌티노 선생님이라면 꼼짝을

못 하죠?’

꼼짝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믿음이 있는 것일 거다.

내가 그 아이들을 믿고있는 만큼 그들도 나를 믿고 있는 것이 않을까?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과 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정비례한다는 얘기이겠지.

생각해 보자. 과연 우리는 그야말로 아무 조건 없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수시로 성찰을 해 보자.  

 

8. 잘되면 하느님 덕, 못되면 내 탓

 

94년인가 95년의 여름으로 기억한다.

당시 지역대회를 준비하던 중에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많이 사라져버린 지구대회가 한창이었던 당시에 근 10여년만에 지역대회로 변경되어 진행이 되고 있었다.

지구대회와 달리 지역대회는 교구의 성격이기 때문에 집행부처도 교구 연합회에서 맡게 된다. 어느 날 정동철이라는 친구에게 연락을 받고, 그의 거짓말에 속아 연합회회의에 참석을 하게 되었는

데, 그때 어찌어찌 해서 억지로 캠프 하나를 맡게 되었다.

당시 고등부캠프를 지역대회로 진행을 하는데 있어서 1,2차로 나누고, 그 중심은 1차는 4지구(남동지역, 남구지역 일부)가 되고,2차는 5지구(부평,계양지구)가 돼서 일을 추진하는데 내가 2차를

맡게 되었다.

문제는 여기부터 시작이었다.

프로가 아닌 우리같은 교리교사들이 그런 큰 행사를 준비하려면 보통 최소 2개월에서 3개월이 걸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회의가 행사 당일을 정확히 한 달 앞두고 소집이 되었던 거다. 한다고

는 했지만 막상 결정이 되고 나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더우기 내가 잘 알고있는 5지구만 한다면 교사들이 거의 아는 얼굴이기 때문에 그런 대로 힘들어도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

지만, 이건 상황이 달랐다.

5지구 소속 본당이 절반에, 나머지 절반은 여러 지역에서 신청한 본당이었기 때문에 교사들을 제대로 알 수 없었고, 참여인원도 꽤 많은 인원이었다. 통제가 무척이나 힘들 거라는 예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와 가까운 후배들과 친구들이 자신의 본당은 참가하지 않으면서도 캠프에 참가해 날 돕겠다고 나서준 것이 그나마 큰 위안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시작은 되었고, 정신없이 일이 추진되는 동안 답답한 마음만 계속 들기 시작했다. 주로 4지구의 인원으로 구성이 된 연합회 간부들이 무조건 1차를 따라하라는 압력에 대항하면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개성이 강한 교사들의 지나친 의욕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캠프 당일 열흘 전에 급기야 단골술집에서 핵심인원들의 긴급회의가 소집이 되었고, 그 곳에서 나는 후배교사들의 따가운 질책을 받아야했다.

’우리가 선배의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려고 여기에 있는 줄 알아요? 우리도 여름휴가를 즐기러 갈 줄도 알고, 쉬고도 싶지만 선배와의 의리와, 소문으로 듣던 선배의 노하우를 배우려고 우리

본당도 제쳐놓고 왔어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그렇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뭔가를 해야만 했다.

2~3백명의 여름캠프가 아무 의미 없이 망칠 수도 있다. 그것도 나 하나 때문에...

 

뭔가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본격적으로 매달렸지만, 체계적으로 일을 해 나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 때 함께 일했던 교사 중에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레베카에게 만나자고 했다. 매우 늦은 시각이었지만 그런걸 가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 친구는 성격이 분명한 친구였다. 아닌 건 죽어도 아니라고 말하는 강직한 편이었고, 대충이라는 걸 모르는 친구이다.

"레베카,... 이런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이제 시간이 너무 없다. 뭘 제대로 만들어서

체계를 잡기에는 어림도 없는 것 같아. 내 생각인데 네가 날 믿어준다면 이제는 내 감각을 믿고 갈 수밖에 없는 거 같다. 괜찮겠니?"

레베카는 조금 생각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떡였다.

그랬다. 정말 어려운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제대로 하자면 워크북도 만들었어야 했고, 또 그 워크북을 검증하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 모든 걸 다 포기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던 것이

다.

며칠 후 모든 진행교사들과 더불어 캠프에 참가하는 모든 인솔자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교육을 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누구의 잘못이든 아니든간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칫하면 여러분들의 아이들이 1년에 한번밖에 없는, 아니 어쩌면 평생 한번일 고교시절의 여름캠프를 망칠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단결입니다. 이제 싫든 좋든 이번 캠프의 총진행자인 저의 지시에 무조건 따라 주십시오."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무슨 독재를 하겠다는거냐 라는 반응이었던 거다.

"여러분들이 저에게 힘을 모아주셔야 합니다. 일을 진행하다 보면 저도 사람인지라

실수를 할거고, 여러분들은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런 불만을 공개적으로 특히 아이들 앞에서 보였을 때 이번 캠프는 그 시각으로 ’끝’이에요. 저를 믿어 주십시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있기 때문에 적당히 하지 않을 겁니다.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선생님들께는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분들도 똑같이 저를 따라 주십시오. 실망시키지 않도록 할 겁니다.’

일부 교사들은 계속 의심의 눈으로 보았지만, 많은 수의 교사들이 수긍을 해주는 눈치였다.

그랬다. 세밀하게 준비를 한다해도 막상 일이 닥치게 되면 돌발적인 상황도 많이 발생하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이 돌출되기 때문에 언제나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렇게 어설프게 준비를 한

대다 조직까지 무너지면 모든 게 ’끝’이었던 거다.

나는 교사들에게 거의 국회의원 입후보자가 하듯이 호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교사들이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이라도 따라와 주었고, 나름대로 남은 시간동안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다.

캠프 전날,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귀가해서 잠을 청했지만, 도저히 잠을 온전히 이룰 수 없었다. 어떻게 미리 요령을 생각해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저 기도를 올릴 수밖에...

기도를 하던 중, 문득 기적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기적이 생긴다면....   그러다가 성서 속의 기적을 떠올려 보았고, 대부분의 기적들이 공통점을 같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소경이 예수를 찾아와 예수께서 그의 눈을 보이게 한 기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침을 흙에 개어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는 실로암에 가서 씻게끔 하셨는데,

그냥 그 자리에서 눈을 뜨게 하실 수도 있는 분이 왜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하셨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눈 먼 소경이 예수를 찾아가는 과정이나 실로암으로 가는 과정은 정상적인 사람의 기준으로는 쉬울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더욱이 길도 험한 그 옛날에는 무척 힘든 고생길이

었을 것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점과 그의 강한 믿음이 요구되었을 거라는 논리가 성립되었다.

그렇다. 기적은 밤나무의 밤처럼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앉아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도 그 기적이 생길 수 있을까?

해 보자. 모든 건 하느님께 맡기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만 다하자. 그랬더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행사 당일이 밝았고, 긴장된 마음으로 캠프장에 도착해서는 입촌식 직전에 다시 한번 교사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재다짐을 받았다.

막상 당일이 되자 교사들도 상황파악이 됐는지 이번에는 신뢰하는 표정으로 내 이야기에 동의해 주었다. 그리고는 눈에 드러나게 일사분란한 움직임을 보여주었고, 시작이 매우 매끄러웠다.

저녁 시간이 돼서 식사준비를 하는 동안, 캠프기간중에 그 곳에 상주하고 계시는 교육국 신부님을 찾아가 중간보고를 드리고, 당시 날씨관계로 스케줄에 관한 문제를 말씀드렸다. 참고로 그 신부

님은 상당히 직선적이고, 칭찬에 인색하며, 당신의 주관이 때로는 지나치게 강한 스타일이시다.(아는 사람은 다 알지)

그런데 예상외의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보고를 다 들으시고는

"알아서 네가 좋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해. 정말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근데 너 되게 잘한다. 생긴 건 멍청해 갔구..  마음에 들었다."

의외였다. 그 분 스타일대로라면 구체적인 계획을 말씀하셨을 텐데 그런 것도 없이

들어오자마자 칭찬까지 곁들이시니 나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그러고 내려오는데 신부님이 부르셨다.

"야, 태풍이 온 대는데 오늘밤에 캠프파이어 할까?"

"그럼 마지막날밤 프로그램하고 바꿀까요?"

"아니! 상황 봐서 그 날 또 하던지.."

"예?"

"너네 교사들 하는거 보니까 잘해서 기분이 좋아서 그래. 오늘 필요한 장작이나 재료비는 내가 주지."

"글쎄요. 좋긴 하지만...."   "그럼 됐어. 준비해."

칭찬에 보너스까지 받았다. 정말 시작이긴 했지만 교사들이 너무 열심히 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언가 일을 하다가도 내가 또 다른 일을 주문하면 싫은 내색 없이 그 일부터 먼저 하는 것이다. 다

소 불만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그런 마음 없이 밝은 표정으로 기쁘게 따라주는 선생님들이 너무 고마웠고, 믿음직스러웠다.

힘이 생겼고, 자신감도 생겼다. 교사들이 이런데 학생들은 말하나 마나였다.

이제부터는 내가 얼마만큼 정확한 판단을 하느냐였다.

나의 섣부른 판단 하나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고, 또 이렇게 열심히 해주는, 특히 자신의 본당은 참가하지도 않았는데 여기까지 와서 봉사해주는 친구, 후배교사들의 노력이 헛될 수도 있다는 생

각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무엇보다 하느님이 옆에서 지켜주신다는 믿음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태풍이 오락가락하는 거 말고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순풍에 돛단 듯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기적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해서 셋째 날에 또다시 캠프파이어를 했고, 그 곳에서 한 팀이 한번에 두번의 캠프파이어를 했던 적은 그 때 말고는 그 이전이나 이후나 단 한번도 없었다.

신부님은 당신께서 보신 것 중 가장 모범적이고, 체계적인 캠프였다며 돌아오는 순간까지 칭찬을 해 주었다. 그리고 교사와 학생들 모두가 대만족한 캠프이기도 했다.

위기가 기적으로 변한 순간이었다.

 

많은 교사들이 지금 어떤 일을 하다가 난관에 봉착해 있을지 모른다. 거의 포기 수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것이 끝은 아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지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라. 또, 지금 내 안의 하느님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내가 직접 체험을 했기에 말할 수 있다.

기적은 성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서 생기는 것은 더욱 아니다.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늘 있을 수 있는 것이 기적이다.

우리의 강한 믿음과 포기하지 않는 노력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본당 교사들에게 자주 해 주었던 말이지만 다시 한번 말한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 아니라, ’잘되면 하느님 덕, 못되면 내 탓’인 거다. 그렇게 노력했다고 그것이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 마음을 갸륵하게 보신 하느님의 배려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겸손하게 모든 걸 하느님께 맡기고, 내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하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을 해 주신다. 설령 잘 안됐어도 그건 하느님의 뜻인 거다.

      

하느님의 기적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9. 겸   손

 

내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교사생활을 해오면서 가장 부족했던 것이 ’겸손’이다.

2, 3년차 때부터 너무 많은 자신감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었고, 그건 자신감을 벗어나 자만심으로 내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그걸 잘 몰랐다.

하긴 그런 건방이 이런 글을 쓰고 있게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누군가에게 배우려는 마음도 거의 없었다. 오직 나의 주관만이 최고였던 거다.

혼자서 생각하고 결정하고 실행하고. 그야말로 북치고 장구치고 혼자 다 했던 거다.

’18회 천사의 밤’의 부활을 준비하면서 함께 하는 교사들은 그저 ’한다’는 사실만 알았지, 내용은 나 혼자만이 알고, 기획, 섭외, 구성, 학생지도, 심지어 각 프로그램에 쓰일 배경음악까지 거의 나

혼자 결정했고 다른 교사들은 포스터 제작 같은 거의 잡일수준에 가까운 업무만 맡겼다. 이렇다 보니 교사들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대 놓고 항의하지 못한 것이, 그들에게 나는 선배였고, 그들은 천사의 밤을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쉽게 나서지 못했던 것 같다.

그로 인해 나는 천사의 밤을 보다 수준 높고, 재미있게 만들 수도 있는 기회를 내 스스로 걷어 차버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교사들은 나에게 그런 경험의 기회를 빼앗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아마도 나는 그때 그들이 별 도움이 안 된다고 건방을 부렸는지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이 기회를 통해 그때 그 교사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다행히 별 탈없이 무사히, 아니 성황리에 ’대성공’이라는 수식어를 남기게 되어 다행일지 모르지만 그보다는 그런 보람을 함께 공유하지 못했던 것이 더욱 미안하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여든이 된 노인도 세 살 박이 아이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 나보다 훨씬 감각이 좋은 젊은 친구들에게야 얼마나 많은 배울 점들이 있을까!

 

내가 나름대로 교사회 운영을 잘할 수 있었던 건 新,舊의 조화를 그런대로 잘 이루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경험이 풍부한 교사의 노련한 운영과 감각이 뛰어난 새내기 교사들이 조화

를 이루고 중간에 있는 교사들이 어렵더라도 징검다리가 되어주는 모습이 내 생각에는 가장 이상적인 교사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모두가 알고 있는 말이지만 행하기는 무척 어렵다 는걸 나도 잘 안다.

그렇지만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무척이나 많이 볼 수 있다. 해 보지도 않고 어쩔수 없음을 탓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무언가 나름대로 열심히는 하는 거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교사회

분위기가 산만하다거나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교사회내의 영성이 부족함을 의심해 보라. 굳건한 신앙이 밑받침이 되지 못하면 그야말로 해변가의 모래성이나 다름없다.  알맹이가 없는 교사회의 모습은  단순한 동아리 일 뿐이지,

결코 봉사 단체로서의 제 기능을 다하지는 못할 것이다.

활동의 밑부분에 신앙이라는 기초가 부실한 상태에서는 겉모습만 요란하지 실속이 없는 교육이 될 테고, 아이들은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지만 스스로도 그런 것들을 느끼게 된다. 우리 선생님이

정말 존경스러운 분인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 또

배울 점이 있는지 없는지 .. 아이들은 알고 있다.

기도를 하라. 자신이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하게 구하라.

있는 지금 그대로의 모습에 만족할 수 있는 겸손을 달라고 간절히 구하라.

내가 후회하는 것 중 하나가 나의 기도에 그런 기도가 부족했던 것이다.

하느님께 그렇게만 구했어도, 하느님은 나에게 충분히 그렇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셨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곤 한다.

또한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교안을 위한 공부이외에 평소에 성서공부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공부를 해서 바로 아이들에게 전달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공부를

통해 스스로의 영성이 성장하고, 그럼으로 인해 아이들의 눈에 교사의 모습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기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지 않고 교단에서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하느님에 대한 큰 교만을 범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내가 겪었고,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는 것은 다른 죄악보다 ’교만’일 것이다. 교만에서 위선이나, 시기 같은 죄들이 시작되지 않나하는 생각도 들고, 또 그로

인해 보다 하느님 가까이서 생활을 해야 하는 아이들이 잘못된 교사의 잘못된 교리로 인해 그런 은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내가 교만에 빠져있는 이 시간에 우리 아이들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지 한번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 볼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겸손’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앞장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겸손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은덕을 그저 ’운이 좋아서’라든가, ’내가 좀 해" 하는 식으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전

에 어느 신부님께서 사석에서 해 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가 살면서 겸손해지기는 어렵지만 신앙 안이라면 조금은 쉬울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비신자들보다 더욱 교만해 질 수 있다.’  

그렇다. 교만은 우리에게 언제나 다른 숱한 유혹과 함께 우리 안에 잠자고 있다.

결코 깨우지 말아야할 마법의 램프인 것이다.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은데 막상 키보드 앞에 앉으니까 시간만 오래 걸렸지 내용 없는 이야기들만 주절주절 적어 놓은 거 같아 또한 번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는 한 건지도 잘 모르겠고, 글쓰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닫기도 했지만, 이 글을 쓰면서 가장 기쁘게 다가오는 것은 그간 나와 함께 했던 수많은 우

리 아이들과의 추억에 다시금 잠길 수 있어서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이지 않았나 싶다.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며 서서히 정리를 하고 싶다.

앞으로 약 5년 후(가능하다면) 본당내에서의 활동에 복직해 청소년분과장을 하겠노라고 장담을 건방지게 했다. 써주실지 어쩔지도 모르면서...

그 날이 온다면 정말 최선을 다할 수 있겠지?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또 내가 사랑하는 우리의 청소년들을 위해 살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도 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삶보다는 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에 버금가는 매우 중요한 하느

님 사업일 게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하여 주시기만 기다릴 뿐이다.

그런 기쁨을 다시 한번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 글을 읽게 될 많은 동료, 후배교사들과 의견을 나누고 싶다.  원한다면 언제든 대화를 해서 보다 좋은 경험담들을 모아 나의, 또 여러분들의 후배교사들에게 좋은 교리교사의 참고서를 만들고

싶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그 혜택은 우리의 아이들이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하느님나라의 건설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재미가 없고 별 볼일 없었더라도 여

러 교사들과 함께 공유해서 다른 좋은 이야기들을 만 날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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