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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주교 발자취(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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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2008-01-03 ㅣ No.9

김옥균 주교 발자취
 
 
김옥균(바오로) 주교의 첫 인상은 빈틈없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하지만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는 얼굴은 영락없는 미소년이다. 누구에게나 따뜻한 미소와 악수로 대하는 김주교는 그래서 모든 것을 다해줄 것만 같은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김옥균 주교가 서울대교구 총대리로서 17년을 살아오면서 보여준 사목 스타일도 자신의 얼굴처럼 엄격함과 자상함을 모두 갖춘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 주교는 스스로 "돌다리를 두드려보고 건너는 성격"이라고 말하곤 했다. 김 주교는 서울대교구 총대리직을 수행하면서 "방대한 교구를 관장하기 위해선 모든 면에서 순리대로 따라야 한다"는 확신으로 일관된 행정업무를 수행해왔다. 그 결과 서울대교구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지난 20년간 무섭게 팽창하는 발전을 이루면서도 과오 없이 교구 자립의 틀을 다질 수 있었다.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도 "교구 행정을 체계화하고 재정을 탄탄한 기반 위에 올려놓아 지난 20년간 많은 본당을 신설할 수 있게 된 것이 모두 김옥균 주교님의 공로"라고 김주교의 업적을 평가한바 있다.

매사에 공평하고 소홀함이 없도록 '중용'의 길을 걷는데 노력해 왔지만 "손이 부족하다 보니 소외지역이 있게 되더라"고 여러 차례 토로한 김 주교는 사회복지 시설과 음지 속에 살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찾아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직접 챙겨 주기도 했다.
 
교구 재정과 인사를 책임지고 있어 생각지도 못한 비난과 공격을 받을 때마다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고 순리대로 살자"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기며 혼자 삭여왔다. 사제 인사철만 되면 외지로 나가는 사제들을 개인적으로 불러 "사제생활 50년을 한다 치고 5년에 한 번씩 이동하는데 좋고 나쁨이 무엇이겠느냐."고 격려를 잊지 않았다.

김옥균 주교는 성 김대건 신부가 사목했던 경기도 용인 은이공소 출신임을 항상 자랑스러워했다. 집무실에 김대건 성인의 유해를 모셔놓고 항상 성인의 도우심을 청한 김 주교는 한국의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 주교 사목 표어도 '이 땅에 빛을'로 정하기까지 했다. 또 순교자 현양 행사가 있으면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고 고 박희봉 신부와 함께 전국을 다니며 순교자 유물 유품을 수집해 절두산 성지 기념관에 기증하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특별히 김옥균 주교는 평화방송 이사장으로 매스컴을 통한 사회·문화 복음화에 남다른 애정을 쏟아왔다. 어려운 교구 살림살이에도 평화방송이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을 갖춘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종합 선교방송매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김옥균 주교 이력
 
△1925년 12월 9일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에서 출생
△1954년 프랑스 릴 가톨릭대학 신학교 졸업 사제수품. 동대학원에서 신학과 신문학과 수료
△1959년-1962년 서울대교구장 비서 겸 가톨릭출판사 사장
△1965년-1966년 종로 본당 주임
△1966년-1971년 명수대 본당 주임
△1971년-1973년 당산동 노량진본당 주임
△1973년-1978년 청파동 본당 주임
△1978년-1982년 수유동 본당 주임
△1982년-1984년 서울대교구 사무처장 겸 관리국장
△1985년 3월 23일 지르바 명의 주교 및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 임명
△1985년 4월 25일 주교 성성
△1990년 평화방송 이사장
△1984년7월-2001년 12월 12일 서울대교구 총대리
 
[평화신문, 제657호(2001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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