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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돕기회, 백두산 천지 통일기원 미사 동행 취재기(200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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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돕기회, 백두산 천지 통일기원 미사 동행 취재기
무지개 배경 '천지 통일미사' 감격
<사진설명>
1. “잘 전해 주십시오.” 김옥균 주교가 북한으로 초를 싣고 갈 트럭 운전사와 악수하고 있다.
2. 한민족 돕기회 총재 김옥균 주교와 김병일 지도 신부가 11일 백두산 천지에서 평화 통일 기원 미사를 공동 집전하고 있다. 김 주교는 이날 미사에서 나눔의 신비를 통해 민족의 화해와 일치가 하루빨리 이뤄지기를 기원했다.
11일 오후 5시 30분, 백두산 정상.
눈 앞에는 비취색 천지가 펼쳐지고 있었다. 천주교 한민족 돕기회 총재 김옥균 주교, 김병일 지도 신부, 봉두완(다윗) 회장 등 일행 8명은 모두가 상기된 표정이었다.
1시간 전만 해도 비바람이 심해 미사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민족 돕기회 일행이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날씨는 언제 궂었냐는 듯 거짓말처럼 개었고 천지 뒷편으로는 무지개까지 떴다.
“감동적이다.” 가장 먼저 정상에 발을 디딘 김병일 신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눈앞에 펼쳐진 비경에 넋을 잃은 모습이었다. 중국 심양, 연길을 거쳐 비행기와 버스로 10시간 여를 달려온 길이었다. 모두들 피곤할 법도 했지만 천지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천지의 아름다움에 취하기도 잠시. 일행은 곧바로 미사를 준비했다. 중국측 공안원 으로부터 1시간 동안 천지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주교가 주례한 미사는 한번도 없었던 백두산 천지. 그만큼 미사에 임하는 일행들의 표정도 진지했다. 김 주교와 김 신부는 서둘러 제의를 입었고 일행들이 주위를 둘러섰다. 신자가 아닌 중국 관광객과 일본인 관광객들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힐금거렸다. 김 주교는 “내 생애에 백두산 천지에서 미사를 봉헌하다니…”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반도에서 하늘과 가장 가깝다는 천지를 배경으로 미사 전례문이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일행의 감격은 미사 후에도 사그러들지 않는 듯했다. 산을 내려오면서도 아무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일행은 백두산 중턱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이튿날 새벽 북한 신의주와 접경 지역인 단동으로 향했다. 단동에서는 북한에 보낼 지원 물품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은 새벽부터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중국인 운전사는 오전 7시에 출발하면 오후 5시면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단동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 30분이 지나서였다. 16시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중국 대륙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길은 대부분 비포장이었다. 수없이 많은 험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했다. 하지만 일행은 “북한에 사랑을 전달하는 길이 쉬울 리가 있겠느냐”며 오히려 이만한 고생은 당연하다는 분위기였다.
단동에서 작은 예수회 박성구 신부와 합류한 일행은 13일 오전 초 2만 자루에 대한 전달식을 조촐하게 가졌다. 당초에는 축복식도 하고 기념식도 별도로 할 계획이었지만 중국 공안에서 공식적인 전달식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해 옴에 따라 무산됐다.
그래서 일행은 북한에 초를 싣고 갈 트럭 앞에서 잠시 기념촬영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한민족 돕기회의 주축인 김병일 신부와 작은 예수회는 이미 지난 1998년부터 지난해 까지 총 10만여 자루의 초를 북한에 전달한 바 있다. 전력 사정이 좋지않은 북한이 한민족 돕기회에 초를 전해 달라는 요청에 따른 것이다. 이번에 전달된 초는 작은예수회가 중국 단동에 설립한 천의공예품유한공사에서 제작했다.
“물건을 잘 전해 주십시오.”
김 주교는 북한으로 초를 싣고 갈 중국인 운전사에게 악수를 청했다.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행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트럭은 압록강 철교를 천천히 건너고 있었다.
[평화신문, 제689호(2002년 8월 25일), 중국단동=우광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