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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옥균 주교 선종 이모저모, 추모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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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옥균 주교 선종 이모저모
“티 없이 맑고 깊은 내적 성화 이룬 분”
- 김옥균 주교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명동성당에는 궂은 날씨에도 사제단·수도자·신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른 봄날 새벽, 자리를 털고 다시 일어나길 바라는 수많은 이들의 바람을 뒤로 한 채 김옥균 주교는 하느님 곁으로 돌아갔다. 2월 27일 오전 마지막 고해성사 직후엔 “교회와 하느님, 나 자신에게 너무 부족한 사람이었다”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유언으로 남겼다. “장례는 다른 신부님들처럼 소박하게 치러달라”던 고인의 간곡한 부탁에 따라 전체 장례일정은 3일장으로 진행됐다.
○…2월 12일 병세 악화로 입원한 김 주교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27일 병실을 찾은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이 라틴어의 교황 강복을 하자 ‘아멘’이라고 똑똑히 응답했지만,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
이어 3월 1일 오전 3시3분경, 김 주교는 조카 김정직 신부(서울대교구)와 조카 손자 유기상 신부(서울대교구)를 비롯해 교구 사제들과 수도자, 친지들의 배웅을 받으며 이 땅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인공적인 장치로 생명을 연장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선종할 수 있게 해달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이어진 조용한 시간이었다.
마지막 고해성사를 집전한 여의도 성모병원 원목부실장 전기석 신부는 “김 주교님은 오랜 시간 지병으로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을 텐데도, 매순간 만나는 이들과 따듯한 대화를 나누며 삶을 평안히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오전 4시경 성모병원 의료진들에 의해 각막 적출 시술이 진행됐다. 생전에 서약한 사후장기기증 의사에 따른 것. 김 주교의 각막은 상태가 매우 양호한 것으로 판정돼 일주일 안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식돼 생명의 빛을 전할 예정이다.
오전 7시경 명동본당 주임 박신언 몬시뇰과 교구 사제들은 명동대성당 지하성당에 유해 안치 예절을 거행했다. 이어 첫 위령미사는 김정직·유기상 신부 등의 공동집전으로 봉헌됐다.
국경일에다 비와 진눈깨비가 내리치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빈소에는 매시간 위령미사를 봉헌하고 연도를 바치는 신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빈소는 서울 명동성당 지하성당과 문화관 2층 소성당, 꼬스트홀에 마련됐다.
특히 위령미사는 각 지구별로, 전 사제와 신자들이 매 시간 번갈아 봉헌해 추모의 마음을 한데 모았다. 교구 내에서 선종 당일부터 지구별로 매 시간 미사를 봉헌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난 수년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면서도 항상 교구 걱정을 입에 달고 사신 분이셨습니다.” 서울 혜화동 지혜관 숙소에서 함께 생활해온 조순창 신부는 “김 주교님은 평소 중한 환자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늘 밝은 표정을 유지하고 굳건한 모습을 보여 더욱 존경스러웠다”며 “특히 선종 직전 병문안을 했을 때 보이셨던 티없이 맑고 깨끗한 인상에 깊은 내적 성화를 이룬 분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고 밝혔다.
김 주교에게 세례에 이어 부제품과 사제품을 연이어 받은 성바오로수도회 준관구장 안성철 신부는 “김 주교님은 아이들과 매일같이 공차기를 하고, 호주머니엔 사탕을 가득 넣고 다니며 나눠주는 인자한 아버지 같은 신부님이셨다”고 기억했다. 안 신부는 특히 “김 주교님은 서품식 전 면담을 통해 ‘사제의 삶은 끝없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사람을 섬겨야하는 직분이며 그러한 삶은 기도없이는 불가능하다’며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는 당부를 남기셨다”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곁을 지켰던 김 주교의 조카 사위 유광수(다니엘)씨는 “주교님은 평소에 가족들에게는 항상 바르게 살라는 말을 자주 강조하셨다”고 회고했다.
- 김옥균 주교의 선종을 애도하는 플래카드가 걸린 3월 1일 서울 명동성당에는 2월 16일 선종 1주기를 맞은 김수환 추기경을 기리는 플래카드도 함께 걸려 교구민들의 안타까움이 더했다.
- 김 주교의 선종을 슬퍼하며 신자들이 명동성당에서 위령기도를 바치고 있다.
추모사 / 서울대교구 단중독사목위원장 허근 신부
“한 줄기 빛 되어준 그 사랑에 감사”
받은 것은 너무 많은데 해드린 것은 너무나 없어 그저 아쉬운 마음뿐입니다. 쏟아지는 눈물에 글 한 줄 쓰기가, 말 한마디 하기가 힘겹습니다.
제가 사제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특히 알코올 사목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김 주교님의 배려와 격려 덕분이었기에 더욱 마음 저립니다.
한때 저는 알코올 중독으로 무뎌질 대로 무뎌진 마음을 안고 살았습니다. 저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술을 끊으라고 권고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김 주교님의 따끔한 꾸짖음도 있었지만 단주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그러던 1998년 초, 주교님은 저를 불러 전문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라며 눈물어린 충고를 하셨습니다. 주교 서품 후 사회사목 실습으로 알코올중독자 치료 재활모임에서 지내셨던 경험을 바탕으로 저를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덕분에 용기를 낸 저는 치료를 받았고, 주교님의 배려로 알코올사목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12월에는 건강이 매우 악화됐음에도 불구하고 휠체어를 타고 알코올사목센터 개원 10주년 행사에는 오셔서 축하해주셨습니다.
주교님께선 저만 이렇게 배려해주셨던 것이 아닙니다. 특히 후배 사제들에게는 사제로서 살다보면 겪는 각종 유혹들과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항상 방패막이가 되어 주셨습니다. 사제직분을 포기하지 않도록 위기 때마다 붙들어주는 자애롭고 든든한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게다가 단 한 명의 예비신자가 있는 곳이라도 기꺼이 달려가 세례성사를 주셨습니다. 누가 부탁을 하든 건강만 허락하면 흔쾌히 달려와 주셨습니다.
사목을 하면서 신자 수에 연연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자칫하면 스스로 불행해지거나, 신자가 많은 본당에 있다가 적게 있는 본당에 가는 것을 좌천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설명도 해주셨습니다. 신자 한 명 한 명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소중한 존재이므로 그들을 돌봐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제는 식사 때마다, 산책할 때마다, 부활이나 성탄 때마다 살그머니 챙겨주시는 작은 선물도, 직접 써주시는 카드도 받지 못하겠지요. 봄이면 함박 웃음지으며 꽃나무들을 가꾸시던 모습도 볼 수 없겠지요. 많은 사제들이 마음 편히 찾아가 하소연할 친정어머니를 잃은 기분이겠지요.
주교님의 떠나시는 마지막 뒷모습에 이 한마디 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주교님, 당신과 함께 살았던 시간들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편안히 쉬시고 신자들을 위해, 사제들을 위해, 교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가톨릭신문, 2010년 3월 7일, 주정아 기자 · 사진 문수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