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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이, 블루오션의 인생 여정- 서울 437차--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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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무 [cheonhabubu] 쪽지 캡슐

2006-04-12 ㅣ No.154

 

세발 낙지가 그리운 서울 437차(93.4.16) 분도 회관


김태수 신부님. 성사:전창석 김경자. 자신:임홍근 박재정 24부부


지금도 광주 교구에서 큰 일꾼으로 활동하고 있는 임홍근, 박재정 부부의 첫 봉사 주말이었다.

팀미팅을 하러 신부님을 우리 차에 모시고 광주로 향했는데 신부님의 가방 안에  가득 만화책이 담겨 있었다.

만화책이 빠른 독서를 위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걸 그때에 깨달았었다. 동양학을 전공하느라고 성균관대학원에서 주역을 배울  때에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던 주역 괘가, 성균관 대학의 이기동 교수님과 최영진 교수님이 공저하고 고려대학 철학과를 나온 분이 만화를 그린 만화책이 얼마나 쉽게 닥아왔는지. 만화의 위력은 그런 것이었다.

그 덕택으로 고우영 선생이 그린 ‘십팔사략‘같은 만화책도 읽었다.


주말이 진행되기 전 팀 미팅 기간 동안 우리 발표부부들은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신부님을 비롯한 잘 모르던 부부와 2박 3일 동안 좋은 모습의 주말을 진행하려면 친해지기 위한 기간이 필요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신부님과 부부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하고, 주말 진행을 위한 회의와 대화, H, W, P (남편 ,아내, 신부님)의  대요 맞추기. 일거리를 위한 나눔 등등.

주말마다 다른 사람들과 진행 되는 특성 때문에 대요의 주제는 같더라도 주말의 색깔은 발표부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광주에서의 팀미팅은 환상적이었다.

나무젓가락에 휘감겨 올라오던 세발낙지의 꿈틀거림은 지금도 뺨에 스물스물 느껴진다.

빨간 대추가 동동 뜨던 낙지 고은 국물인 연포탕은 박재정 님의 특기였었다.

혹시 음식점을 찾을 때, 그런 국물을 주문해 보지만, 아직도 박재정 님이 만들어 내었던 연포탕과 같은 시원한 국물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 부부에게 “나일의 선물” 한 권을 주었더니 답장이 왔다.


사랑하는 형님! 형수님!

보내 주신 '나일의 선물' 받고

두 분을 처음 만나던 때가 떠오르며

그 때처럼 신비롭고 설레고 기뻤습니다.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네요.

서울ME 437차 주말(1993.4.16-18)에서 두 분의

따뜻한 배려로 팀이 되어 오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큰아드님 혼인선물로 주셨던 '언제나 시작'

작은 아드님 혼인 선물로 주셨던 '빛 속으로'

이번에 보내 주신 '나일의 선물'까지

우리 부부에게는 소중한 보물입니다.

책만 펴면

두 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형님^^ 형수님^^

아버지의 사랑과 평화가

두 분과 두 분을 아시는 분들께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 광주에서 임홍근+박재정 부부


그 주말 수강부부들은 매우 열성적이어서

해방촌 성당 주임 신부님이시던 신부님의 성당에서 재모임을 하고 브릿지 봉사에 들어갔다.

그 당시는 발표 부부가 브릿지 과정까지 맡았어야 했는데 광주에서 오신 분이 브릿지를 할 수 없었고 지원팀을 받아야 하는데, 수강부부들이 싫어하는 것 같아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 두 팀을 맡아서 브릿지 과정을 끝냈다.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고 사제가 되기를 기다리는 부모. 남편이 얼른 신자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외짝 부부 등 논현동 쪽 5부부와 여의도 쪽 네 부부와 브릿지 과정의 진행을 맡았다.

강남의 부부들은 브릿지 과정이 끝난 후 신부님을 모시고 종강 파티를 했었고, 함께 성당에 나가기로 되었던 외짝 교우의 남편이 갑자기 저 세상으로 가신 아픔을 겪었다.

여의도 브릿지 팀들은 헤어지지 않고 13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한달에 한 번 모임을 하고 있으며 그 모임에서 두 부부가 대자녀가 되었다.

이 모임에서는 적금을 들어 자주 해외 쉐링을 떠났다. 아이들까지 가족이 함께 가는 이 여행에서 아이들까지 쉐링 노트는 필수였다.

북경의 만리장성에서 천석성 요셉이 화장실을 못 찾아 실수한 일로 중국 사람들에게 가위로 거시기를 잘릴 번했던 이야기는 그 중에서도 압권이다.

그 때 썼던 요셉과 카타리나, 그리고 그 아들 둘이 썼던 10/10 때문에 우리는 울고 웃느라고 배가 다 아팠었다.

주일에는 관악산을 함께 오르고, 휴가 때는 설악산이나 서해안 등을 유람하다가 끝내는 내몽고, 베트남, 하롱베이, 싱가폴, 말레시아. 중국의 해남도 등 가까운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며 끈끈한 정을 다지고 다졌다.

인생은 고해의 바다라는 말처럼, 행복한 순간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함께 했던 부부 중, 나중에 영세하며 대자가 되었던 오일환 토마 형제가 사업에 실패하는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카나다로 이민을 가더니 지난해에 몹쓸 암을 앓고 하늘나라로 갔다. 아직은 어린 두 남매와 아내 실비아를 두고 눈이 어찌 감겼는지.

벤쿠버에 잠시 들렀을 때, 대부님께 잘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카나다에서 뜯은 굵은 고사리를 싸 주기도 했었는데....

초등학교에 다니거나 학교도 안 다녔던 아이들은 이제 군대에 가고 유학을 가고 대학에 입학하고, 모두 제 갈 길을 찾고,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사람, 아픈 사람...

우리는 기도해야 할 일이 자꾸만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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