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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밤미사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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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연 [ics1015] 쪽지 캡슐

2011-01-12 ㅣ No.223

2010년 12월 24일 성탄 밤미사 때
가르멜회 박정오 수사신부님의 강론자료입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지난 24일 성탄밤미사 때,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한인성당에서 제가 전야미사 강론을 하게 되었었습니다. 늦게야 가족들에게 성탄인사를 하는 것을 대신하여, 부족하나마 함께 나누고자 전문을 올립니다.

 

성탄 전야 미사 강론: 시간과 영원

 

"시간과 영원" 이라는 주제로, 예수님의 오심을 인간 편에서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낮 동안 한차례 큰 비가 온 후의 밤하늘을 보면 유난히 맑습니다. 별도 총총합니다. 그럴 때면 미지의 세계로 빠져들 듯 한참을 주시하며 그 별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빛에도 속도가 있어서 저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 중에는 아주 오래전에 그 위치로부터 빛을 발사하여 이제야 내 눈에 들어오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보고 있는 저 별들은 사실은 벌써 빛을 보이는 그 위치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보통으로는 생각지 못했던 신비로운 사실들을 자연을 관찰하며 알게 됩니다. 그러한 자연을 바라보는 나 또한 자연에 속하여 있습니다.

 

꽃이 핀다는 것은 동시에 죽음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별을 바라보고 우주의 저 멀리를 상상하고 하지만 역시 언젠가는 소멸해 버리는 비애를 맞아야 합니다.하지만 다행인 것은, 죽음은 인간에게 사색을 내주고 갑니다. 그래서 오로지 인간만이 無, 없음, 사라짐,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더 나아가 영원을 그리워하게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영원 앞에서 시간 안에 한계 지어진 인간은 초라해 보입니다. 어찌보면, 죽음으로 향하는 초라한 우리의 시간을 잊고자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고, 온정신을 투여하여 무언가에 몰두하여 때로는 중독에 걸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좀더 좋은 의미로 예술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영원을 향한 애끊는 갈망의 표현이 아닐까요.

 

 

 

1. ‘시간’의 의미

 

1) ‘시간’의 사전적 의미:

- 어떤 시각에서 어떤 시각까지의 사이

- (물리)현상의 변화 과정, 또는 서로 관련을 가지는 여러 현상의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데 쓰이는 변량.

- (생활)하루의 24분의 1이 되는 동안을 나타내는 단위

 

2) 철학에서는 삶과 결부하여 시간을 논하는데, 그래서 세월의 무상성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3) 종교에서의 시간의 문제

고대문화에는 윤회적 시간이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후의 시간과도 결부되어 있으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예외적으로 시발점과 종착점을 갖춘 1회성의 직선적 시간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2. 영원의 의미

 

1) 사전적 의미/ 위키백과(인터넷)

영원 (동물)(蠑螈蠑蚖 은 도롱뇽 비슷한 양서류이다.

영원 (후한)(永元)은 후한(後漢) 화제(和帝)의 첫 번째 연호이다.

영원 (전량)(永元)은 전량(前凉) 성왕(成王)의 연호이다.

영원 (제)(永元)은 남제(南齊) 동혼후(東昏侯)의 연호이다.

영원은 핑클의 4집 앨범이다

영원 (철학)(永遠)은 한없는 시간의 지속을 의미한다. 영구한 세월

 

2) 종교, 철학적 의미

- 항상 있는 것으로서 시간과 상대적 의미로 쓰입니다. 시간은 변화하고 지나가는 것인 데 대하여 영원은 변함이 없는 상태를 이릅니다.

- 인도, 유럽어에서 <영원>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aion,aidion, 라틴어 aevum,aeternum, 독일어 ewig, 영어 eternal은 모두 ‘생명’, ‘생명의 길이’,‘세대’를 뜻하는 같은 어근에서 파생하여, ‘대대로 언제나 있는 것’, ‘세상의 시작부터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신적인 것을 표상하였습니다.

3. 시간과 영원의 관계

 

일찍이 희랍인들은 존재를 순이성적으로 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생멸을 하는 자연(현상계)의 밑받침으로서 소멸하지 않는 그 무엇, 항존하며, 불변한 그 무엇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과연 불변한 것이 있을까? 우리의 육안의 시야에서는 도무지 그런 것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그것은 마찬가지로 소멸해 버릴 인간은, 자연은 불변한 것을 발견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희랍인들은 특히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그려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어찌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현대에 와서는 이데아니 본질이니 운운하면 모두들 외면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발전을 이룬 오늘날의 과학이지만 이 과학 또한 그 본질은 합리성과 불변성과 보편성이다. 여전히 불변하는 것을 찾아낼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보면 많은 이들이 모순적이 증언들을 하고 있습니다. 즉, 역사를 보면 의(義)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도 바꿀 수 없는 아까운 생명을 내놓고서 어째서 의롭게 죽어야 했는가. 어째서 벗을 위하고 겨레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정도로 살아야 했던가. 의가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인가. 생명은 구체적인 삶 안에 있지만 의는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신념을 가지고 그렇게 행하였습니다.

 

인류역사는 이론이 아닌 경험으로서 구체적인 체험으로서 증언합니다. 목숨이 가장 귀한 것이 아니요 세상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다고 죽음 앞에서 태연하다고하여 모두 의인은 아닙니다. 사는 것이 귀찮고 힘들고 허무하다고하여 마치 잠이나 자려는 듯이 죽기를 감행하는 이들을 오늘날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갖을 수 있습니다. 죽어버리면 그만인가. 無로 없음으로 돌아가는가. 그러나 無에서 有가 생길 수 없다면 有가 無로 멸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이렇게 우리는 죽음에 직면하여 없어짐, 사라져버림, 무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인류의 사색은 미지에 대한 갈망, 신비에 대한 갈망으로 애타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따질때로 따져보고 죽음에서 까지 소신대로 산 이가 있었으니, 그 이름 소그라테스라... 그는 영혼의 불멸과 내세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서 말합니다. 죽음은 영혼의 육체로부터의 해방이라고. 그러나 그렇게 갈구하고 노력한 소크라테스이지만 과연 그의 말이 옳은 것일까. 내세란 진정 있는 것인가.

 

인간은 죽음을 피할 도리가 없는 시간의 제약을 받고 있으며, 유한한 이 세상에 얽매여 역사적 현실 속에서, 막연하게 목적지도 모르고 그저 걷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참으로 있는 것은 무엇이며 영원이 어디 있는가. 도대체 유한한 인간, 죽음의 현실 앞에 놓인 인간의 탈출구는 구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영원이라는 것을, 참으로 있다는 것을,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우리의 시각으로는 태양을 뚜렷이 볼 수 없지만, 태양은 그 광선을 우리의 눈까지 비추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원이란 것이, 참존재가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자신을 알려 줌으로 해서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신화 속에서지만 구약성서는 전합니다. 진리가 먼저 자신을 모세에게 알렸음을 전합니다. 너무 오래된 신화 속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 천 년 전의 예수가 있습니다. 볼 수 없었던 하느님, 그래서 이해할 수 조차 없었던 하느님이 볼 수 있는 인간이 되어 우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럼, 이제 단지 신앙의 결단이 문제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현존하시는 하느님으로 고백하느냐 아니면 역사의 한 위인으로만 보느냐. 이런 면에서, 자연의 세계에서 영원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자신의 실존적 결단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온갖 방황의 끝에 예수님께 대한 신앙에 이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고백록 10권27장).

 

인간 상식으로 보면, 하느님은 바보입니다. 그토록 크신 분이, 이토록 작아지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이는 그 사랑의 대상 앞에서 무능해지고, 그 대상이 되지 못해 죽고, 되어서도 죽습니다”. 끝까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영원하신 하느님은 바늘구멍보다도 더 작게 되시어 인간 세상에 오셨습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가능합니까? 인간은 온 지식을 동원해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합니까? 이 또한 인간 지성으로는 이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에게도 하느님께 다가갈 방도가 생겼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이제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가 바늘구멍보다 작아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예수님은 이 지상 생활의 끝에서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한마디의 말을 남기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작아지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작아져야 하는가.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이 아기예수님을 보면서 우리 각자가 그 작아짐의 정도를 짐작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작은이가 되는 길인가. 세상의 온갖 것에로 향해 있는 우리의 시선을 자주자주 내 안으로 거둘어 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이 소리를 목자의 소리, 예수님의 부르심이라고 말합니다. 삶의 순간들에서 자주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에 자신을 맡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마치 양들이 목자의 소리를 듣고 따라가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영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길의 끝에 “눈으로 본적이 없고 귀로 들은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니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습니다”(1고린 2,9)

 

구유에 누여 작은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마치 저 밤하늘의 심연을 보듯 유한한 인간 안에 오시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강생의 신비를 그윽히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실로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영원이 시간 안에 강생하셨으니 말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에게 “사느냐, 죽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겠는가, 아니면 유한한 자신 안에 틀어박혀 허무를 향하여 달리겠는가”의 신앙의 결단이 문제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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