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차 세계 병자의 날 보도자료

기조연설 - 완화 치료를 넘어서(바라간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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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2007-02-09 ㅣ No.24

완화 치료를 넘어서


교황특사 하비에르 로사노 바라간 추기경
(2007년 2월 9일 오전 11시 30분 명동성당)

 

난치병 환자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당연히 완화 치료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로 완화 치료는 환자의 병을 고치는 치료를 하기보다는 고통을 줄여 주어 환자가 죽음이라고 하는 이 세상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더욱 잘 체험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완화 치료의 도움으로 환자는 죽음의 여정을 더욱 의식적으로 준비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흔히 환자들이 죽음의 엄청난 순간을 인격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차분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게 합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완화 치료에는 육체적, 심리적, 가정 및 사회적, 그리고 영성적 돌봄 등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필요하지만, 저는 영성적 돌봄에 대해서만 말씀드릴까 합니다.

 

말기 환자를 위한 그리스도교의 영성적 돌봄은 참으로 단순한 고통 완화 차원 그 이상입니다. 완화 치료를 넘어서, 단순히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행복으로 바꾸어 줍니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적 돌봄은 병과 죽음을 생명의 원천으로 변화시키는 역설을 실현합니다. 이러한 영성적 돌봄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의 모든 중요한 욕구들이 만족되는 삶의 정수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러한 기적은 특히 교회의 성사들, 그 가운데에서도 병자성사와 노자성체를 받아 모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실현됩니다.

 

병자성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린 다음, 노자성체에 대해서 몇 가지 성찰을 나누어보겠습니다. 죽음을 넘어 생명과 행복을 얻는 역설의 신비는 노자성체를 받는 성체성사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교리적인 내용을 짧게 짚어보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라 생명이고 친교이며 영원한 노자성체의 개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과 ‘전례 헌장’에서 세 부분을 인용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은 병자 성사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병자들의 거룩한 도유와 사제들의 기도로 온 교회는 병자들을 수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 맡겨 드리며, 그들의 병고를 덜어 주시고 낫게 하여 주시도록 간청하는(야고 5,14-16 참조) 한편, 병자들도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자유로이 결합시켜(로마 8,17; 콜로 1,24; 2티모 2,11-12; 1베드 4,13 참조) 하느님 백성의 선익에 기여하도록 권고한다”(교회 헌장, 11항).

 

‘교회 헌장’은 또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찬의 희생 제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신적 희생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며, 자기 자신을 그 제물과 함께 봉헌한다. …… 신자들은 이 지존한 성사로 …… 놀랍게 이루어지는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구체적인 방법으로 보여 준다”(교회 헌장, 11항).

 

또한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언제나 우리 몸에 지니고 다녀 우리의 죽을 몸에서 예수님의 삶이 드러나도록 하여야 한다고(2코린 4,10-11) 우리는 같은 사도에게서 배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의 희생 제사에서 주님께 ‘거룩한 제물의 봉헌을 받아들이시어, 우리 자신도 영원한 제물’(?로마 미사 전례서?, 성령 강림 팔일축제 내 월요일 예물기도)이 되게 하여 주시도록 기도한다”(전례 헌장, 12항).

 

이제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하신 주님의 명령이 특별히 죽음의 순간에 노자성체를 통하여 실현되는 동시성부터 살펴보면서 우리의 성찰을 시작하겠습니다. 성찬례 때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시간과 모든 시대는 모든 것이 정점에 이른 역사의 최고점, 곧 파스카 만찬,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통합됩니다. 좀 더 포괄적으로는 역사 이전부터 감추어져 있던 아버지의 영원하신 뜻에서 지금 성부의 오른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원한 현존에 이르기까지 온전한 강생의 신비의 의미 전체에 결합되는 것입니다.

 

크게 이러한 방향을 따라서 저는 이제 노자성체가 담고 있는 중요한 의미, 곧 생명이고 친교이며 영원하다는 개념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생명

 

노자성체는 생명의 정점입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가 동시에 현존하는 자리이므로 참으로 생명의 원천입니다. 이는 새 피조물이 새로 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찬례에서 우리는 언제나 영생의 약을 함께 받아먹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받아 모시는 노자성체에는 생명의 충만함과 동시에 죽음의 실재도 있습니다. 생명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죽음을 물리치기 위한 약을 받아먹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이렇듯 궁극적인 끝입니다. 그러나 노자성체와 결합된 우리의 죽음은 더 이상 마지막이 아닙니다. 무덤이었던 죽음이 참된 부활을 위한 요람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 손에, 당신 영혼도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사랑이신 영의 이러한 의탁에 힘입어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명의 원천, 부활로 바꾸십니다.

 

우리가 마지막 순간에 우리 자신을 아버지께 맡기는 것은 성령 안에 온전한 사랑으로 안기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품 안에 안기는 것입니다. 노자성체로 그리스도와 결합됨으로써 우리의 유한한 포옹은 탁월한 부활의 영원성으로 바뀝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마지막 시간은 당신이 영광스럽게 되는 시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자성체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마지막 시간 또한 우리가 영광스럽게 되는 시간이 되도록 해 주십니다.

 

노자성체에서 우리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결합되고, 온 세상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모자랐던 부분을 채웁니다. 우리 삶의 가장 지고한 사건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일치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생명을 세상 구원을 위하여 봉헌할 때 그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괴로움과 병과 아픔이 우리 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도록, 바로 우리의 죽음을 통하여 그러한 것들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우리 삶을 따라다니는 장례 행렬이었던 괴로움과 병과 아픔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참된 공로를 통하여 우리가 영원한 새 생명을 얻는 개선 행렬로 바뀌는 역설입니다.

 

죽기 전의 아픔은 물론, 모든 괴로움과 함께 오는 죽음과 하나가 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바로 그 전능한 죽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노자성체로 모시는 성체성사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노자성체는 우리에게 우리 생명의 온전함과  그리스도 생명의 완전성을 동시에 주어 우리가 참된 영생의 상속자가 되게 합니다.

 

2. 친교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 죽어줄 수 없으며, 우리는 모두 따로 죽어야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의 끔찍한 고독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노자성체를 통하여, 이 고독이 보기처럼 끔찍하지는 않습니다.

 

노자성체로 받아 모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 안에서 돌아가시는 그리스도와 완전하고 내밀한 일치를 이룹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소멸의 그림자 안이 아니라 부활의 빛 안에 계십니다. 이 빛은 그리스도 안에 살았던 온전한 존재의 본성과 함께 하며, 우리 구세주의 자비롭고 너그러운 심판을 가져다줍니다. 성찬례 덕분에,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영원하신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 성령의 전능한 사랑이 함께 합니다. 노자성체를 통하여 우리는 가장 높은 천상의 완덕을 향해 열려 있기 위하여 우리 지상 삶을 완성하는 사다리의 마지막 계단을 딛고 삼위일체의 친교 안으로 들어갑니다.

 

‘전체 그리스도’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와 요셉 성인, 모든 성인, 연옥에 있는 모든 이들, 그리고 우리와 친교를 이루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모든 성인과 이루는 통공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들은 모두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가 절대 행복을 향하여 중요한 도약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실제로 모든 피조물은 우주의 맏이이시며 알파이며 오메가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노자성체를 받아 모시는 성찬례를 통하여, 모든 피조물은 죽어가는 그 사람을 통하여 구원을 바라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가 우주의 중심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됨으로써 온 우주를 물려받게 되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중심성에 동참하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주의 중심이 되고 모든 피조물의 맏이가 됩니다(콜로 1,1-20 참조).

 

그러므로 노자성체를 통하여 각 그리스도인은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서에서 말한 그 정점의 순간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에페 1,9-12 참조).

 

신앙을 가지지 않은 이들에게, 죽음의 외로운 경험에는 박탈감이 따릅니다. 노자성체를 통하여 신앙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결정적인 현존을 통하여 버틸 수 있게 해 줍니다. 노자성체는 개인의 영광이고, 연대와 친교, 형제애와 우정, 전적인 사랑과 다가올 행복을 위한 자기 봉헌의 승리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신앙과 외로움은 반비례합니다. 말하자면, 신앙이 클수록 외로움은 줄어들며 외로움이 클수록 신앙이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영원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결정적인 현존을 통하여 우리는 영원을 미리 맛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계십니다. 그분의 차원은 언제나 물리적 척도의 제약을 받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모든 행위 안에 있는 이 실재는 노자성체로 영원의 문턱을 넘을 때에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전통적으로 보에티우스는 영원을 “끝없는 생명을 온전하며 동시에 완전하게 소유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의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에 대한 참여를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게 됩니다.

 

말하자면 실제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나누는 경계는 운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시고, 피조물은 변합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로 잴 수 있는 양적인 운동뿐 아니라, 점점 완전해져 가는 본질적인 운동도 말합니다. 하느님의 불변성은 역동성이 결여된 정적인 고요가 아니라 전적인 완전함을 뜻하는 충만한 활동입니다. 이러한 완전함은 ‘부동의 원동자’의 개념일 뿐 아니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인 무한한 사랑의 봉헌을 통한 죽음의 충만함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이기 때문에 소유를 바라지 않는 역동성입니다. 사랑으로 자기를 내어주지만 줄어들지 않고, 사랑으로 받지만 늘어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은 무한히 사랑받으실 만할 뿐만 아니라 무한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사랑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완전한 기쁨의 이러한 불변성이 참된 하느님의 불변성, 하느님의 본성 자체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에 동참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가득한 이 친교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능력을 끝까지 채움으로써 피조물의 완전한 만족을 통하여 욕망과 점진적인 성장의 변덕스러움을 극복하고 삼위일체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생명이며, 이로써 사랑의 탁월한 친교는 흔히 영원한 건강이라고 불리는 참된 건강으로 이어집니다.

 

성찬례가 이러한 기적을 이룹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1.54-57)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찬의 빵이며 십자가에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입니다(루카 22,14 참조).

 

노자성체는 이런 것입니다. 당신을 죽음에 넘기신 그리스도의 몸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분의 피를 나눔으로써 영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특성을 지닌 피조물의 경계는 죽음의 순간에 노자성체로 건널 수 있습니다.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노자성체는 우리 각자의 개인적 삶의 시간의 충만으로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워하고 거부해야 할 어둠이 아니라, 우리를 주 예수님과 결합시키는 사랑의 포옹입니다. 노자성체를 통하여 우리의 죽음은 주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전적인 사랑을 통하여 아버지께 바치는 온전한 봉헌이 됩니다. 이러한 봉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헌신을 주 하느님께 보여드릴 수 있는 일상의 모든 행위의 정점입니다. 이 봉헌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 일부가 아닌 모든 것을 드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손에 삶 전체를 온전히 맡겨 드립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살기 시작하며, 삶을 통한 죽음이라는 역설이 풀리게 됩니다.

 

결론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건강의 완성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아무 죽음이나 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죽음,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또 그분의 부활에 긴밀하게 결합된 죽음만이 그러합니다. 그러한 죽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노자성체입니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난치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영성적 돌봄이 고통 완화 치료를 넘어선다고 말씀 드린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모든 영적 배려는 그 원천인 성찬례에서 솟아나옵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통하여 병자를 돌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영적 배려입니다. 이것이 병자 사목의 핵심이며, 노자성체는 그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건강이 참으로 증진될 수 있는 유일한 지평이기 때문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건강을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 조화를 향한 긴장”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노자성체는 조화를 향한 긴장이 아니라 그러한 조화의 완성입니다. 죽음의 부조화가 부활의 조화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노자성체를 통하여 죽음의 무질서는 최고의 질서로 변화되고, 불안은 최고의 평온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바라던 대로 평화로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평화는 무엇보다도 ‘질서 안의 평온’이기 때문입니다.

 

교황청 보건사목평의회
의장 하비에르 로사노 바라간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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