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세계 병자의 날 담화문

제8차 세계 병자의 날 담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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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2007-01-29 ㅣ No.5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제8차 세계 병자의 날 담화

(2000년 2월 11일)

 


 

1. 제8차 세계 병자의 날은 대희년인 2000년 2월 11일에 로마에서 거행될 것입니다. 이 날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성자의 강생 신비라는 관점에서 질병과 고통의 실재를 다시 한 번 고찰해 보고, 이 놀라운 사건에서 이러한 인간의 근본 체험들을 조명해 볼 수 있는 새로운 빛을 이끌어 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제이천년기의 끝에서, 교회는 인류가 고통 완화와 건강 증진에서 이룬 진보를 감탄으로 바라보며,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 존재를 더욱 분명히 하고 오늘날의 절박한 과제들에 적절히 대응하고자, 보건 분야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인간 본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지적·정서적 자산을 최대한 활용하여 보건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예를 들어, 효과적이고 믿을 수 있는 의약품과 갈수록 첨단화되는 기술을 활용하여, 생명의 연장과 질적 향상, 고통의 경감, 개인의 잠재력 향상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성과 이외에 사회적인 성과도 있습니다. 곧, 치료받을 권리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고 이 권리가 여러 ‘병자 권리 헌장’에 법률적 표현으로 명기되었습니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새로운 의약품과 질적으로 더욱 우수해진 의료 시설, 그리고 최근의 수준 높은 자원 봉사 활동 덕분에 간호 분야에서도 상당한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2. 그러나 제이천년기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개인과 가정, 사회 전체를 압박하는 무거운 고통의 짐을 덜고자 인류가 최선을 다하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특히 지난 세기에는 개인과 국가의 잘못에서 온 고통만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나약함과 원죄의 상처로 불어난 인간 고통의 강이 더욱 넓어진 것 같습니다. 저는 고난의 인류 역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유혈 참사를 빚었던 금세기의 전쟁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약 의존, 에이즈, 대도시의 오염과 환경 파괴에서 오는 질병 등 사회 안에 만연한 여러 가지 병폐들, 크고 작은 조직 범죄의 증가 그리고 안락사에 관한 제안들을 생각합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는 병원 침대, 고통 받는 난민과 고아들, 사회악과 빈곤의 희생자들이 제 마음에 떠오릅니다.

동시에, 세속화된 세계에서 신앙의 쇠퇴로, 사람들은 이제 고통의 구원적 의미와 종말론적 희망이 주는 위안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3. 교회는 모든 시대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근심을 함께 나누면서, 고통과 맞서 싸우며 건강 증진을 위하여 노력하는 인류와 언제나 함께하며 도와 주었습니다. 동시에, 교회는 고통의 의미와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구원의 풍요를 인류에게 보여 주고자 노력하여 왔습니다. 역사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형제들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열의에 불타 수많은 사회 복지 활동에 솔선수범하여 지난 이천년을 선행으로 빛나게 하였던 위대한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 교부들과 남녀 수도회 창립자들뿐만 아니라, 침묵과 겸손으로 대부분의 경우 거의 영웅적으로 이웃을 위하여 일생을 바쳐 왔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감탄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봉헌 생활」, 83항 참조). 일상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교회는 사랑의 복음 정신으로 여러 가지 활동과 병원이나 보건소, 자원 봉사 기구 등을 통하여 건강 증진과 병자 간호에 이바지하며, 그들 고통의 원인이 본인에게 있거나 없거나 개의하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러한 참여는 인간의 귀중한 건강을 위하여 계속되고 장려되어야 하며, 지금도 여전한 보건 분야의 불평등과 모순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4. 사실 수세기에 걸쳐, 보건 향상의 전반적인 모습에는 밝은 면과 그늘진 면이 공존하여 왔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특히 의료 시설 이용에서 나타나는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을 생각합니다. 이러한 불평등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볼 수 있지만, 특히 개발 도상국에서 두드러집니다.

이러한 불의와 불평등은 인간의 기본권을 점점 깊이 침해하고 있습니다. 전 주민이 기본적인 일차 진료조차 받지 못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값비싼 의약품이 마구 낭비되고 남용되는 곳도 있습니다. 굶주림을 달랠 최소한의 식량도 없이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형제 자매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인류를 피로 물들이며 죽음뿐 아니라 육체적·심리적으로 온갖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는 수많은 전쟁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5. 이러한 장면들을 떠올려 볼 때, 불행하게도 많은 경우에, 경제와 과학 기술의 발전이 모든 인간의 인격과 불가침의 존엄성에 초점을 두는 참된 진보를 가져왔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새 생명의 보호를 위한 보건에서 아주 중요한 유전학 분야의 성과마저도, 용인될 수 없는 선택이나 몰상식한 조작, 진정한 발전과 반대되는 이익 추구의 기회가 됨으로써 참담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생명을 연장하고, 심지어 인위적으로 생명을 출산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잉태된 생명의 탄생을 허락하지 않음은 물론, 더 이상 쓸모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죽음을 서두르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또한, 건강 증진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늘림으로써 건강을 올바로 인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일종의 육체 숭배와 육체에 대한 향락주의적 추구에 몰두하는 동시에, 생명을 단순한 소비물로 여겨, 장애인과 노인, 말기 환자들을 무시하는 새로운 형태의 소외를 낳고 있습니다.

이 모든 모순과 역설적인 상황은, 한편으로는 행복과 기술 진보 추구의 논리,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에 바탕을 둔 윤리 가치의 논리 사이에 조화가 깨어졌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6. 새로운 천년기를 앞두고, 저는 고통과 보건의 영역에도 “기억의 정화”가 이루어져,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인정”(「강생의 신비」, 11항; 「제삼천년기」, 33.37.51항 참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 영역에서도 성년 경축과 연결되어 있는 회개의 권유를 받아들이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회개와 쇄신의 과정은 우리의 눈을 끊임없이 구세주께 향할 때 더욱 쉬워질 것입니다. “이천년 전에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을 취하셨던 구세주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신적 생명의 샘으로서 인류에게 계속하여 내어 주십니다”(「제삼천년기」, 55항).

강생의 신비는 생명을 책임 있게 돌보고 선하게 사용하여야 할 하느님의 선물로 이해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건강은 개인과 이웃을 위하여 추구하여야 할, 생명의 긍정적인 속성입니다. 그러나 건강은 가치 서열에서 볼 때 ‘최고선에 이은 둘째 선’으로서, 그 사람의 완전하고 영적인 선익을 위하여 증진되고 추구되어야 합니다.

 

7.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특히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고통당하시고 돌아가시기까지 모든 면에서 인간과 똑같은 조건의 삶을 받아들이셨으며,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하고 최후 만찬 때에 하셨던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선포하고 그 희생에 동참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우리의 상처를 치유받았기 때문입니다”(1베드 2,24 참조).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다시 말하여,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 속에 세상의 구속이라는 ‘무한한 보화’의 매우 특별한 ‘한 조각’을 간직하고 있으며, 또 이 보화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구원에 이르는 고통」, 27항).

위대한 성인들과 순박한 신자들은 고통 받는 종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의 병고를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정화와 구원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수많은 제자들이 걸어간 길은 병든 형제 자매들에게 개인 성화와 세상 구원을 위하여 협력하도록 밝은 전망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 길은 힘든 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혼자 힘으로는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언제나 내적 스승이시며 인도자이신 예수님의 도움으로써만 가능합니다(「구원에 이르는 고통」, 26-27항 참조).

부활로써 그리스도의 상처가 치유와 구원의 샘이 된 것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은 모든 병자에게, 십자가까지 감수하며 자기를 내어 줌으로써 하느님께 충실할 때 승리를 얻고, 질병 자체를 기쁨과 부활의 원천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이것이 바로,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하고 외치는 이들의 마음 속에 메아리치는 선포가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포도밭에 일꾼으로 파견된 병자들(「평신도 그리스도인」, 53항 참조)은 그들의 모범을 통하여 문화의 복음화에 효과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병자들은 인간답고 그리스도인답게 성장하려는 내면적 동기를 가지고 고통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고자 노력함으로써, 고통의 경험을 없애려 하는 문화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8. 희년은 또한 우리에게 예수님의 얼굴, 곧 영혼과 육체를 돌보시는 하느님이신 사마리아 사람의 얼굴을 관상하도록 초대합니다. 교회는 창립자이신 하느님을 본받아 “수세기를 이어 내려오며 ……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재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하시는 사랑과 위로를 밝혀 주고 전하여 왔습니다. 이것은 보건 의료인의 숙련된 너그러운 봉사뿐만 아니라 …… 병자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모든 사람의 지칠 줄 모르는 투신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평신도 그리스도인」, 53항). 이러한 투신은 특별한 사회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고,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응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 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마태 10,1.7-8 참조).

육체와 영혼의 고통을 겪는 사람에 대한 봉사는 성찬례에서 그 의미가 나타나며, 성찬례 안에서 그 원천뿐 아니라 규범까지 발견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봉사와 긴밀히 연관시키시면서(요한 13,2-16 참조), 제자들에게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여 “빵을 떼어 주고” “발을 씻어 주라.”고 하셨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9.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모범은 신자들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여, 존중과 이해, 수용과 온정, 자비와 호의를 가지고, 고통 받는 형제 자매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도록 촉구합니다. 이것은, 개인이나 단체를 이기적으로 만들고 그 자신만을 생각하게 하는 무관심과 싸워야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가정과 학교와 그 밖의 교육 기관들은 적어도 인도적인 이유에서만이라도 이웃과 그의 고통에 관심을 갖도록 일깨워 주고 훈련시키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구원에 이르는 고통」, 29항). 신자들은 이러한 인도적인 관심을 아가페,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초월적인 사랑을 통하여 표현합니다. 사실, 인간적인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교회는 신앙의 인도로, 병자들에게서 가난하시고 고통 받으셨던 창립자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다.”(마태 25,36) 하신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노력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은 사람들에게 병자들을 도와 주고, 또 그들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촉구합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치유는 이러한 복귀입니다. 질병이 인간을 공동체에서 소외시키는 것이라면, 치유는 그가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되찾도록 하는 것입니다.

직업으로든 자원 봉사로든 보건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에게, 저는 하느님이신 사마리아 사람을 유심히 바라볼 것을 충심으로 권유합니다. 그럴 때 그들의 봉사는 결정적인 구원의 예표가 되고, “정의가 깃들여 있는”(2베드 3,13)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선포가 될 수 있습니다.

 

10.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치료하시어 낫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을 위한 당신의 현존과 가르침과 활동으로 끊임없이 건강을 증진시켜 주신 분이셨습니다.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온전히 인간적인 관계 안에서 표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 이해하시고 자비를 보여 주시며 위로하시고 부드러움과 강함을 조화롭게 결합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하셨고, 인간의 고통에 민감하셨으며, 죄악과 불의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경험의 부정적인 측면들에 용감하게 맞서시고, 그 함축된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시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확신을 전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조건은 구원된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인간의 가장 깊은 열망이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현대인들에게도 이러한 조화롭고 충만한 삶을 전하고 싶어하십니다. 예수님의 구원 활동의 목적은 자신의 한계와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려는 것뿐만 아니라, 완전한 자아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는 인간을 도와 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하고 말씀하시며, 인간에게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하도록 부름 받은 교회는 모든 이가 충만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힘껏 도와야 합니다.

 

11. 올바르게 이해된 생명의 질과 건강 증진이라는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의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첫째는 생명 수호의 의무입니다. 현대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이 생명 자체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고 더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고 있으며, 때때로 오늘날의 문화에서 볼 수 있는 가치관의 혼란을 없애고자 생명 윤리에 대하여 성찰하고 있습니다. 제가 회칙 「생명의 복음」에서 상기시킨 것처럼,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대한 윤리적 반성이 다시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은 의미 심장한 일입니다. 생명 윤리학의 탄생과 발전은 종교인과 비종교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를 믿는 신앙인들 사이에, 인간 생명에 관련된 근본 문제들을 포함하여 윤리 문제들에 대하여 더욱 깊은 성찰과 대화를 촉진하고 있습니다”(27항).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 이외에, 불행하게도 이기주의와 향락주의, 물질주의에 물든 사고 방식을 퍼뜨리고, 생명에 대한 억압을 사회적·법적으로 지지하면서, 심각한 죽음의 문화를 조장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러한 문화의 밑바닥에는 흔히 프로메테우스적인 태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이 스스로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유도합니다. 이런 경우에 실제로는 모든 의미나 희망이 박탈된 죽음이 그 개인을 압도하고 좌절시키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생명의 복음」, 15항). 과학과 의료 행위가 그 본래의 윤리 차원을 상실할 위험에 빠질 때, 보건 종사자들은 “때때로 생명의 통제자가 되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죽음의 집행자가 되고 싶은 유혹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생명의 복음」, 89항).

 

12. 이러한 상황에서 신자들은 생명이 덧없고 무너지기 쉬워 보인다 할지라도, 생명의 숭고하고 신비로운 가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신앙의 시각을 키우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병들고 고통 받고 쫓겨나거나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실망하여 포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라는 도전을 받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은, 바로 그러한 상황들에 놓였을 때,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만남과 대화와 연대에 대한 부르심을 감지할 수 있도록 열려 있습니다”(「생명의 복음」, 83항).

이러한 책무는 특히 의사, 약사, 간호사, 원목, 남녀 수도자, 관리자, 자원 봉사자 등 모든 보건 종사자에게 해당됩니다. 이들은 직업상 특별히 인간 생명의 보호자가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무는 병자들의 친척을 비롯해서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들도 알고 있는 것처럼, “특히 철저한 좌절 속에서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고통이나 죽음과 최후의 대면을 하고 있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요구는 무엇보다도 시련기에 필요한 동료 의식과, 동정과 도움에 대한 요구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인 희망이 사라졌을 때 계속 희망을 지켜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는 탄원입니다”(「생명의 복음」, 67항).

 

13. 그리스도인이 회피할 수 없는 두 번째 의무는 인간에게 합당한 보건의 증진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다른 모든 가치를 건강에 종속시켜 건강을 하나의 우상으로 만들려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건강의 개념을 단순히 넘치는 활력과 육체적으로 만족할 만한 양호한 상태로 축소시키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러한 개념은 고통을 진정으로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인간의 영적·사회적 차원을 무시함으로써 결국 인간의 참된 선을 위태롭게 합니다. 건강은 생물학적인 완벽함에만 국한될 수 없는 것이므로, 고통 속에 사는 삶에도 성장과 자아 성취의 여지가 있으며,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사람을 전인적으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인간학을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건강관은 건강을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로 규정하지 않고, 오히려 육체적·심리적·영적·사회적으로 더욱 완전한 조화와 건전한 균형을 이루고자 노력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은 자기가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하여 자기의 소명을 완수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14. 이러한 건강관은 교회와 사회에 인간에게 합당한 자연 환경을 만들도록 요구합니다. 사실 환경은 개인이나 집단의 건강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환경은 인간의 ‘집’이며, 인간의 관리와 감독에 맡겨진 자원의 복합체이고, “가꾸어야 할 정원이며 경작하여야 할 들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외적인 생태는 올바른 건강 개념에 맞는 내적·윤리적 자연 환경과 일치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인간의 건강은 생명의 속성이고, 이웃 봉사를 위한 자원이며, 구원으로 열린 문입니다.

 

15. 주님의 은총의 해, “죄와 그에 따르는 벌을 용서하여 주는 용서의 해, 상반된 집단 사이의 화해의 해, 다양한 회개와 성사적, 성사 외적 참회의 해”(「제삼천년기」, 14항)인 이 희년에, 저는 사제와 남녀 수도자, 평신도,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 고통과 건강의 세계를 위협하는 문제들에 용감하게 대처하도록 권고합니다.

2000년에 로마에서 거행될 세계성체대회가, 하느님이신 사마리아 사람의 현존을 보건 분야에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는 기도와 활동을 확산시키는 이상적인 중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의 형제 자매들의 기여로, 2000년 희년의 경축이 병자들에 대한 사랑의 봉사에서 교회간 일치 협력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어,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에서 이루어지는 일치 추구를 모든 사람에게 명확히 증언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세계 곳곳에 있는 정치·사회·보건 관계 국제 기구들에게, 인간의 존엄과 건강을 해치는 모든 것에 맞서 싸우려는 구체적인 계획들을 설득력 있게 추진하도록 특별히 호소합니다.

병든 형제 자매들의 삶에 적극 참여하는 우리의 여정에, 십자가 밑에서 당신 아드님의 고통을 함께 나누셨던 동정 성모님(요한 19,25 참조)께서 함께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고통의 체험을 통하여 고통을 깊이 이해하시는 성모님께서는, 육체적·정신적으로 인간 조건의 한계와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을 변함 없는 사랑으로 보호하여 주십니다.

저는 병자들과 또 그들 곁에 있는 모든 이를, 병자들의 건강이시며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맡겨 드리며, 그들이 사랑의 문화를 건설하도록 성모님께서 자애로우신 전구로써 도와 주시기를 빕니다.

이러한 바람으로 모든 이에게 사도좌에서 저의 특별한 축복을 보냅니다.



카스텔 간돌포에서

1999년 8월 6일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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