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 일기

성모님의 발현은 우리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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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오 [aloisiokno] 쪽지 캡슐

2014-05-08 ㅣ No.372

메주고리예 발현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어머니에게 기쁨을 안겨줍니다



루이스 홀
번역: 신미라 요세피나
(평화의 모후 사도회, '평화 MIR' 편집위원)


[ 2011년 6월 25일은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30주년이었다. 이 기사는 아일랜드 사람인 루이스 홀이 메주고리예가 그녀의 가족에게 미친 영향들을 생각하며30주년 발현 기념에 즈음하여 메주고리예에서 쓴 글이다.]

 

세계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있는 메주고리예 마을만큼 숭배와 존엄의 분위기를 편안하게 지니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버스가 이 성스러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상업주의로 망가질 수도 있는 곳인데 아직 때묻지 않은 비할 수 없는 진정함이 느껴져서 놀랐습니다. 이 곳은 제가20년 전에 아직 순진했고 그러나 호기심 많았던 15살 때 와서 경험했던 그 때의 편안한 평화로움을 제 안에서 불러일으킵니다.
     우리 가족과 저는 이곳과 오래 인연을 맺고 있기 때문에 발현 30주년에 맞추어 여기 온 것을 영광이자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같이 순례에 오신, 얼굴에 순수한 기쁨이 역력한 우리 어머니를 보면서, 무엇이 우리 어머니를 25년 전에 메주고리예에 오게 했는지 생각해봅니다.
     6명의 아이들이 포드브르도라는 작은 언덕에서 1981 6 24일 성모님 발현을 보았다고 주장했을 때 당연히 세계적인 관심이 쏟아졌습니다. 당시 우리 어머니는 어린 자식이 다섯이었고 발현목격 주장에 대해 즉시 호기심을 느끼셨습니다. 가장 어린 여동생 니키는 태어날 때부터 다운증후군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딸의 장애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이것은 어머니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어머니는 막내 딸을 사랑했지만, 다른 네 아이들처럼 정상이기를 바라셨습니다.
     많은 준비와 많은 기대를 하면서 어머니는 흥미로운 메주고리예 마을에 첫 아일랜드 순례단을 이끌고 갈 준비를 마치고 1984년 더블린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는 긴장하면서도 신이 난 순례단 탑승 수속을 하는 동안 두 살밖에 안된 니키는 유모차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그 마을사람들은 새로 관심을 받게 되자 좋아했지만 마을은 매우 가난하고 소박한 곳이었고 몰려오는 수 천명의 순례자들을 받을 인프라 시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마을사람들 집에 묵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손님들을 기꺼이 맞았고 한 번에 약 25명씩 자신의 집에 초대하면서 열심히 손님들을 위해 요리도 하고 청소도 했습니다. 메주고리예 마을이 사람들에게 준 영향은 바로 이것입니다. , 물질적인 것은 잊어 버리고 같이 순수하게 비평하지 않으면서, 공동체 같은 방식으로 생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당시, 6명의 발현목격증인들은 웅장한 성야고보 본당 제단 오른쪽에 있는 작은 방에서 매일 발현을 맞았습니다. 밖에는 수 천명이 모여 매일 오후 6 40분에 발현을 기다리면서 묵주기도를 했습니다. 병자들은 일부 사제들과 함께 발현하는 동안 그 방에 있는 것이 허용되었고, 발현목격증인들의 영적 지도자인 슬라브코 신부님이 군중들 사이에서 우리 어머니와 막내 동생을 보시고 증인이 되라고 안으로 들어오라 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6명의 어린이들이 (이반카, 미리야나, 비츠카, 마리야, 이반, 야콥) 무릎을 꿇은 것을 기억하십니다. 방안에 침묵이 흘렀고 밖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발현을 환영하듯 지저귀는 새소리뿐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따뜻하고 편안한 존재가 있음을 느꼈고 이것은 어머니에게 심오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불현듯 어머니는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누군가 어머니에게 이 세상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고, 니키는 다른 자식들처럼 하느님의 선물이며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방에서 느끼는 부인할 수 없는 존재감에 대해 어머니는 눈물을 줄줄 흘리던 한 젊은 사제를 만나 얘기하고 있을 때 6명의 발현목격증인들은 머리를 높이 들어 공중의 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그 사제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 문제와 의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 방에서 일어난 일에 압도되었고 이제 자신의 직무를 선물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우리는 발현목격증인의 얘기만 듣고 알게 되지요. 발현목격증인에 따르면, 성모님은 회색 가운과 파란 드레스를 입고 흰 베일을 쓰고 나타나신다고 합니다. 머리는 검고 푸른 눈을 가졌으며 회색 구름 위에 떠있습니다. 특별한 날이나 축일에는 황금빛 드레스를 입고, 어떤 때는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고, 어떤 때는 성인 형상의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고 머리에 피를 흘리며 성모님 옆에 서 있기도 합니다발현목격증인들은 성모님이 나타나면 하늘나라의 작은 한 부분도 같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당시 성모님이 포드브르도에 나타나실 거라는 메시지가 종종 순례자의 집에 전달되었으며 포드브르도를 사람들이 친근하게 발현산이라고도 부르게 되었습니다. 열성적인 순례자들은 저녁 10시경 횃불을 들고 그 돌로 된 산에 올라가곤 했습니다. 모두들 기도하고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기 때문에 평안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다 거기에 있는 발현목격증인 누구에게든 성모님이 발현하시면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항상 그 후에 영어, 이태리어, 독어로 번역된 메시지가 나왔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자식 모두를 시기는 다르지만 메주고리예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어머니는 마리아 순례단을 어떤 때는 일년에 3번씩 데리고 가셨습니다. 90년대 보스니아 전쟁 중에도 어머니는 멈출 기세가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마을은 괜찮았습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어린 십대에 청년 축제가 한창이던 해를 포함하여 여러 번 따라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일랜드 가수이자 작곡가인 리암 러톤 신부님과 지금은 돌아가신 슬라코브 신부님의 도움으로 전세계에서 온 젊은이들은 20인용 텐트를 치고 일 주일간의 노래, 음악, 기도에 참가했습니다.
몇 년 전 메주고리예에서 어머니에게 영감을 주었던 제 동생 니키는2008 1월 스물 여섯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모두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니키는 사랑스럽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자랐고 우리 가족생활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니키는 매우 의사소통 능력이 뛰어났고 헌신적으로 무조건 그녀를 사랑한 부모님과는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니키가 죽은 후 일상생활로 되돌아오려 해도 쉽지 않았지만 슬픔을 억누르기 위해 우리 가족은 신앙에 의지했습니다.
     니키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웠고 어머니는 이미 다른 그룹을 그 해 5월 메주고리예에 데리고 갈 계획을 하던 터였습니다. 어머니는 벌써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여겼으나 니키는 어머니가 그 일을 진행하기를 원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나중에 미키에 대한 매우 큰 위로와 친밀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 순례 때 발현목격증인 중의 한 명인 미리야나가 동생을 위해 기도해주는 행운도 있었는데요.
     지난 2월 또 다른 발현목격증인인 비츠카가 레이트 나잇 쇼라는 밤 프로에 나왔습니다. 우리 어머니, 사진작가 유나 윌리엄즈와 저는 그날 밤에 자신의 경험을 얘기한 헤젤 캐네스워렌을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비츠카는 그린룸에 있었는데 그 미소를 띤 발현목격증인과 잠시 얘기를 나누는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순수한 경이로움과 넘치는 행복을 느꼈습니다.
어머니의 아픔과 상실감을 열심히 들으면서 비츠카는 동정심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비츠카가 하는 말을 통역을 통해 들으면서 어머니가 느끼는 위로와 안도감을 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발현 30주년을 맞아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 계층의 순례자50명으로 구성된 그룹과 같이 왔습니다. 메주고리예에 오는 사람은 누구든 항상 다시 돌아옵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감사하러, 어떤 사람은 도와달라고 기도하러, 어떤 사람은 우리가 타고난 영성을 도중에 잃고 다시 깨우치고 되돌리기 위해서 옵니다. 메주고리예는 사람들에게 이상한, 그러나 강한 자석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이제 여기 다시 와보니 1981년의 그 6명의 아이들이 다 자라서 어른이 되어 결혼도 하고 모두 아이도 생겼지만 메주고리예의 본질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반에게 30주년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가장 큰지 물었습니다. 그는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평화와 기도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그 두 메시지를 듣지 않으면 성모님이 보내시는 메시지 모두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치유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치유가 없으면 물리적인 치유도 없습니다.
     우리 가족과 저는 이곳과 오래 인연을 맺고 있기 때문에 발현 30주년에 맞추어 여기 온 것을 영광이자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같이 순례에 오신, 얼굴에 순수한 기쁨이 역력한 우리 어머니를 보면서, 무엇이 우리 어머니를 25년 전에 메주고리예에 오게 했는지 생각해봅니다.
     6명의 아이들이 포드브르도라는 작은 언덕에서 1981 6 24일 성모님 발현을 보았다고 주장했을 때 당연히 세계적인 관심이 쏟아졌습니다. 당시 우리 어머니는 어린 자식이 다섯이었고 발현목격 주장에 대해 즉시 호기심을 느끼셨습니다. 가장 어린 여동생 니키는 태어날 때부터 다운증후군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딸의 장애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이것은 어머니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어머니는 막내 딸을 사랑했지만, 다른 네 아이들처럼 정상이기를 바라셨습니다.
     많은 준비와 많은 기대를 하면서 어머니는 흥미로운 메주고리예 마을에 첫 아일랜드 순례단을 이끌고 갈 준비를 마치고 1984년 더블린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는 긴장하면서도 신이 난 순례단 탑승 수속을 하는 동안 두 살밖에 안된 니키는 유모차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그 마을사람들은 새로 관심을 받게 되자 좋아했지만 마을은 매우 가난하고 소박한 곳이었고 몰려오는 수 천명의 순례자들을 받을 인프라 시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마을사람들 집에 묵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손님들을 기꺼이 맞았고 한 번에 약 25명씩 자신의 집에 초대하면서 열심히 손님들을 위해 요리도 하고 청소도 했습니다. 메주고리예 마을이 사람들에게 준 영향은 바로 이것입니다. , 물질적인 것은 잊어 버리고 같이 순수하게 비평하지 않으면서, 공동체 같은 방식으로 생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당시, 6명의 발현목격증인들은 웅장한 성야고보 본당 제단 오른쪽에 있는 작은 방에서 매일 발현을 맞았습니다. 밖에는 수 천명이 모여 매일 오후 6 40분에 발현을 기다리면서 묵주기도를 했습니다. 병자들은 일부 사제들과 함께 발현하는 동안 그 방에 있는 것이 허용되었고, 발현목격증인들의 영적 지도자인 슬라브코 신부님이 군중들 사이에서 우리 어머니와 막내 동생을 보시고 증인이 되라고 안으로 들어오라 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6명의 어린이들이 (이반카, 미리야나, 비츠카, 마리야, 이반, 야콥) 무릎을 꿇은 것을 기억하십니다. 방안에 침묵이 흘렀고 밖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발현을 환영하듯 지저귀는 새소리뿐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따뜻하고 편안한 존재가 있음을 느꼈고 이것은 어머니에게 심오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불현듯 어머니는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누군가 어머니에게 이 세상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고, 니키는 다른 자식들처럼 하느님의 선물이며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방에서 느끼는 부인할 수 없는 존재감에 대해 어머니는 눈물을 줄줄 흘리던 한 젊은 사제를 만나 얘기하고 있을 때 6명의 발현목격증인들은 머리를 높이 들어 공중의 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그 사제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 문제와 의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 방에서 일어난 일에 압도되었고 이제 자신의 직무를 선물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우리는 발현목격증인의 얘기만 듣고 알게 되지요. 발현목격증인에 따르면, 성모님은 회색 가운과 파란 드레스를 입고 흰 베일을 쓰고 나타나신다고 합니다. 머리는 검고 푸른 눈을 가졌으며 회색 구름 위에 떠있습니다. 특별한 날이나 축일에는 황금빛 드레스를 입고, 어떤 때는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고, 어떤 때는 성인 형상의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고 머리에 피를 흘리며 성모님 옆에 서 있기도 합니다.  발현목격증인들은 성모님이 나타나면 하늘나라의 작은 한 부분도 같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당시 성모님이 포드브르도에 나타나실 거라는 메시지가 종종 순례자의 집에 전달되었으며 포드브르도를 사람들이 친근하게 발현산이라고도 부르게 되었습니다. 열성적인 순례자들은 저녁 10시경 횃불을 들고 그 돌로 된 산에 올라가곤 했습니다. 모두들 기도하고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기 때문에 평안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다 거기에 있는 발현목격증인 누구에게든 성모님이 발현하시면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항상 그 후에 영어, 이태리어, 독어로 번역된 메시지가 나왔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자식 모두를 시기는 다르지만 메주고리예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어머니는 마리아 순례단을 어떤 때는 일년에 3번씩 데리고 가셨습니다. 90년대 보스니아 전쟁 중에도 어머니는 멈출 기세가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마을은 괜찮았습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어린 십대에 청년 축제가 한창이던 해를 포함하여 여러 번 따라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일랜드 가수이자 작곡가인 리암 러톤 신부님과 지금은 돌아가신 슬라코브 신부님의 도움으로 전세계에서 온 젊은이들은 20인용 텐트를 치고 일 주일간의 노래, 음악, 기도에 참가했습니다.
몇 년 전 메주고리예에서 어머니에게 영감을 주었던 제 동생 니키는2008 1월 스물 여섯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모두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니키는 사랑스럽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자랐고 우리 가족생활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니키는 매우 의사소통 능력이 뛰어났고 헌신적으로 무조건 그녀를 사랑한 부모님과는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니키가 죽은 후 일상생활로 되돌아오려 해도 쉽지 않았지만 슬픔을 억누르기 위해 우리 가족은 신앙에 의지했습니다.
     니키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웠고 어머니는 이미 다른 그룹을 그 해 5월 메주고리예에 데리고 갈 계획을 하던 터였습니다. 어머니는 벌써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여겼으나 니키는 어머니가 그 일을 진행하기를 원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나중에 미키에 대한 매우 큰 위로와 친밀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 순례 때 발현목격증인 중의 한 명인 미리야나가 동생을 위해 기도해주는 행운도 있었는데요.
     지난 2월 또 다른 발현목격증인인 비츠카가 레이트 나잇 쇼라는 밤 프로에 나왔습니다. 우리 어머니, 사진작가 유나 윌리엄즈와 저는 그날 밤에 자신의 경험을 얘기한 헤젤 캐네스워렌을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비츠카는 그린룸에 있었는데 그 미소를 띤 발현목격증인과 잠시 얘기를 나누는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순수한 경이로움과 넘치는 행복을 느꼈습니다.
어머니의 아픔과 상실감을 열심히 들으면서 비츠카는 동정심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비츠카가 하는 말을 통역을 통해 들으면서 어머니가 느끼는 위로와 안도감을 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발현 30주년을 맞아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 계층의 순례자50명으로 구성된 그룹과 같이 왔습니다. 메주고리예에 오는 사람은 누구든 항상 다시 돌아옵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감사하러, 어떤 사람은 도와달라고 기도하러, 어떤 사람은 우리가 타고난 영성을 도중에 잃고 다시 깨우치고 되돌리기 위해서 옵니다. 메주고리예는 사람들에게 이상한, 그러나 강한 자석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이제 여기 다시 와보니 1981년의 그 6명의 아이들이 다 자라서 어른이 되어 결혼도 하고 모두 아이도 생겼지만 메주고리예의 본질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반에게 30주년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가장 큰지 물었습니다. 그는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평화와 기도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그 두 메시지를 듣지 않으면 성모님이 보내시는 메시지 모두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치유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치유가 없으면 물리적인 치유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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