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17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4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담화(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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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4-07-18 ㅣ No.5830

연중 제17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4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담화(요약)

다 늙어 버린 이때에 저를 버리지 마소서’(시편 71[70],9 참조)

(나해) 요한 6,1-15; ’24/07/2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나이 들고 쇠약해졌을 때에도,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사회에서의 역할이 줄어들었을 때에도, 우리 삶이 덜 생산적이고 쓸모없다고 치부될 위험이 있을 때에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겉모습을 중시하지 않으십니다(1사무 16,7 참조). 하느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관심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선택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성경 전체는 주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심지어 당신을 배반하여도 언제나 당신의 자비를 보여 주신다는 위로에 찬 확신을 줍니다. 우리가 늙어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더욱더 가까이 계실 것임을 확신합니다. 성경에서 늙는다는 것은 축복의 표징입니다.

 

우리는 시편에서 다 늙어 버린 이때에 저를 버리지 마소서’(시편 71[70],9 참조)라고 주님께 올리는 간청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하고 부르짖으셨던 예수님의 극심한 고통을 생각하게 합니다.

 

많은 곳, 특별히 가난한 국가들에서 노인들은 혼자라고 느낍니다. 젊은이들과 성인 남성들이 전쟁에 참여하도록 징집되어 떠나고,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 자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고국을 떠남으로써, 많은 노인이 홀로 남겨집니다. 이들은 버림과 죽음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들에서 생명의 유일한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또 다른 곳에서는, 주술을 사용하여 젊은이들의 생명력을 빼앗으려 한다고 의심하며, 노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릇된 확신이 일부 지역 문화에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러한 근거 없는 편견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지만, 이 편견들은 여전히 젊은이와 노인의 세대 간 갈등에 계속해서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노인들이 필요로 하는 값비싼 사회 복지비로 노인들이 젊은이들에게 부담을 지우고 있고, 이러한 방식으로 노인들이 공동체 발전과 젊은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자원들을 전용하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만연해 있습니다. 세대 간 대립 구도는 오류이고 갈등의 문화가 맺은 독이 든 열매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연령대의 일치입니다. 이는 인간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한 진정한 기준점이 됩니다.”

 

다 늙어 버린 이때에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시편은 노인의 삶을 둘러싼 음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노인의 외로움과 버려짐은 우연이나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 개개인의 무한한 존엄을 인정하는 데에 실패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개인적 결정들의 결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개인은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이나 상태, 상황을 넘어”(교황청 신앙교리부 선언, ‘무한한 존엄’[Dignitas Infinita], 1) 무한한 존엄을 지닌 존재입니다. 이는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사람을 오직 비용 측면으로만 판단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심각한 것은 노인들이 종종 이러한 사고방식의 희생양이 되어 스스로를 짐으로 여기고 먼저 물러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능한 한 독립적이고 다른 사람과 분리된 삶 안에서 개인적 성취를 추구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더 이상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들이 옆에 없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때에야 그 모든 것이 필요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이 너무 늦은 시점에서야 이를 깨닫습니다. 외로움과 버림은 오늘의 사회에서 반복되는 요소입니다. 점점 더 우리는 형제애의 맛”(‘모든 형제들’, 33)을 잃어가고 있으며, 대안을 떠올리는 것조차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룻기에서 나이 든 나오미가 남편과 아들들이 죽은 다음, 두 며느리 오르파와 룻에게 고향과 집으로 돌아가도록 격려합니다. 이 이야기(1,8 참조)에 묘사되는 체념이라는 감정을 여러 노인에게서 발견합니다. 나오미는 홀로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과부로서 자신이 사회의 시선으로 볼 때 별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신과 달리 앞으로 평생을 살아갈 두 젊은 여인에게 자신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물러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젊은 며느리들에게 자신을 떠나 다른 곳에서 미래를 건설하라고 말합니다(1,11-13 참조). 나오미의 말은 분명히 그녀의 운명에 낙인을 찍은 당시의 엄격한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며느리 가운데 한 명인 오르파는 나오미를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입 맞추고 유일한 해결방안으로 여겨지는 이 말을 받아들여 자기의 길을 갑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나오미를 놀라게 하는 말을 합니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1,16). 룻은 관습과 타성에 젖은 사고방식에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나이 든 여인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두 사람 모두에게,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 될 그 순간에 나오미의 곁에 용감히 남습니다. 고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에 익숙한 우리 모두에게 저를 버리지 마세요.”라는 간청에 대하여 저는 당신을 버려두지 않을 거에요.”라는 대답이 가능하다는 것을 룻이 가르쳐 줍니다. 홀로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대안으로 남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룻의 자유와 용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선택하도록 초대합니다. 많은 희생이 따르지만 룻을 본받아, 노인들을 돌보는 이들 또는 곁에 더 이상 아무도 없는 친척들이나 지인들에게 날마다 친밀감을 느끼게 해 주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나오미의 곁에 남기로 한 룻은 행복한 결혼과 가정과 새로운 집이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늘 그러하듯, 노인들 곁에 가까이 있고 가정과 사회와 교회 안에서 노인들의 고유한 역할을 인정함으로써, 우리 자신도 많은 선물과 은총과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조부모들과 연로한 가족 구성원들에게 부드러운 사랑을 보여 줍시다. 기력을 잃고 더 이상 다른 미래에 대한 가능성에 희망을 갖지 못하는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시다. 외로움과 버림을 낳는 자기중심적인 태도 대신에 저는 당신을 버려두지 않을 거에요.”하며 다가가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의 열린 마음과 기쁜 얼굴을 보여 줍시다.

 

사랑하는 조부모와 노인 여러분 모두에게, 또한 여러분과 가까운 모든 이에게 저의 기도와 축복을 전합니다. 그리고 부디 잊지 말고 저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를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프란치스코

 

 

전문: https://www.cbck.or.kr/Notice/20242272?gb=K1200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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