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대림 제4주일(다해) 루카 1,39-45; ’24/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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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4주일(다해) 루카 1,39-45; ’24/12/22
오늘 대림 제4주일, 곧이어 다가올 예수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며, 2025년 성년의 성문을 여시는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의 희년 칙서 중에, 죄와 죽음과 용서로 연결되는 구원의 여정 부분인 20항부터 23항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합시다. 20.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자 우리 희망의 기초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그리스도께서는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되살아나시고,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의 비극을 경험하셨습니다. 성부의 사랑은 예수님을 성령의 힘으로 되살리셨고, 그분의 인성으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첫 열매를 맺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곧, 모든 것의 끝처럼 보이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리스도의 은총 덕분에 영원토록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묻힌 우리는,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의 벽을 허물어뜨리고 죽음을 영원으로 향하는 통로로 만드는 새 생명의 선물을 받습니다. 희년은 우리가 세례성사로 받은 새 생명의 선물, 곧 죽음의 극적 사건을 변모시킬 수 있는 생명의 선물에 다시 한번 한없이 감사하도록 하는 기회를 줍니다. 우리가 지상 순례 여정에서 지향하는 목표는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로마 6,22 참조). 이러한 희망에 대하여, 순교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안에 굳건히 머물며, 주님을 배반하기보다 지상에서의 생명 자체를 포기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은 끝이 없는 생명을 고백합니다. 21. 우리는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이 죽음의 문턱을 넘어 영원히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바라보고 그 사랑에 참여하면서, 하느님과의 충만한 친교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지금 희망 안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실제로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의 온 존재가 당신과 하나 될 때, 더 이상의 고통과 수고는 없을 것입니다. 저의 생명은 당신으로 온전히 채워진 참된 생명이 될 것입니다.” 이 충만한 친교의 특징이 무엇이겠습니까? 행복입니다. 행복은 우리 인간의 소명이고, 모든 이가 열망하는 목표입니다. 그런데 행복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다리고 열망하는 행복이 무엇입니까? 덧없는 쾌락, 한 번 경험하면 계속해서 더 갈망하게 만드는 순간의 만족감, 우리의 마음이 충족되지 않고 점점 더 공허하게 만드는 집착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을 갈망합니다. 행복은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충만함을 가져다줄 수 있는 단 한 가지, 바로 사랑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랑받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합니다. 그리고 나는 실망시키지 않는 사랑 안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 무엇도 그 사랑에서 나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22. 영원한 생명과 관련된 또 다른 현실은, 우리 개개인의 삶의 끝에 그리고 역사의 끝에 있을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깨어 있으면서, 우리의 삶이 심판받게 될 그 순간을 위하여 실제로 우리 자신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 준비는 반드시 희망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희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근거 없는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하는 향주덕입니다. 사랑이신(1요한 4,8.16 참조) 하느님의 심판은 틀림없이 사랑에 기초할 것이고, 특히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해주거나 해주지 못했던 모든 일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에 재판관이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십니다(마태 25,31-46 참조). 우리는 분명히 인간이 지상의 법정에서 내리는 그 심판과는 다른 심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 자비의 신비 안에서 사랑이신 하느님 그리고 자기 자신과 맺는 진리의 관계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 그리하여 저희가 …… 심판을 받을 때에는 자비를 기대하라는 것입니다.”(지혜 12,19.22)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말씀하셨듯이, “심판 때에 우리는 세상과 우리 안의 모든 악을 이기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커다란 힘을 체험하고 온몸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랑의 아픔은 우리 구원이며 우리 기쁨이 됩니다.” 참으로 심판은, 우리가 희망하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위하여 얻어 주신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를 주님과의 결정적인 만남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악은 숨겨진 채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의 결정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하려면 이 악은 정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지상의 순례를 마친 모든 이를 위한 우리의 기도와, 성인들의 통공에 힘입어 효과를 발휘하는 전구 안에서의 연대, 그리고 만물의 맏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공통의 유대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희년 대사는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이 자비를 충만히 얻을 수 있도록, 기도의 힘으로, 그들을 위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지향된 것입니다. 23. 사실, 대사는 하느님 자비의 무한함을 발견하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옛 사람들이 한계를 모르는 하느님 용서의 충만함을 표현하는 말로 ‘자비’와 ‘대사’라는 용어를 서로 바꾸어 쓰기도 하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없애 주신다는 확신을 줍니다. 우리는 힘과 위로가 되는 시편 말씀을 경험합니다.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 ……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신다. ……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우리에게 갚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그분의 자애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에 굳세다. 해 뜨는 데가 해 지는 데서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우리에게서 멀리하신다.”(시편 103[102],3-4.8.10-12) 고해성사는 놀라운 영적 선물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여정에서 결정적이고 필수적이며 근본적인 단계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없애시고,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시며, 우리를 일으키시고, 우리를 포용하시며, 그분의 부드럽고 자비하신 얼굴을 우리에게 드러내실 수 있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도록 우리를 내어 맡기고(2코린 5,20 참조), 그분의 용서를 맛보는 것 말고는 하느님을 알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고해성사를 소홀히 하지 말고, 이 치유와 기쁨의 성사가 지닌 아름다움, 우리 죄에 대한 하느님 용서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합시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듯이, 모든 죄는 ‘흔적을 남깁니다.’ 죄는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의 영향인 외적인 결과만이 아니라 내적인 결과도 낳습니다. “모든 죄는, 소죄까지도, 피조물들에 대한 불건전한 집착을 초래하는데, 이는 이 세상에서나 죽은 뒤에 연옥이라고 부르는 상태의 정화를 필요로 합니다.” 연약하고 악에 이끌리는 우리 인류에게 죄의 영향이 남아 있습니다. 대사를 통하여, 언제나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하여 이 영향에서 벗어납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우리의 ‘대사’이십니다.” 결과적으로 이 완전한 용서의 경험은 우리도 다른 이들을 용서하여야 할 필요성에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열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용서가 과거를 바꾸지는 않습니다. 용서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 미래를 바꿀 수 있게 하고, 분노와 적대감과 복수심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해줍니다. 용서는 더 밝은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데, 비록 과거의 눈물 자국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처럼 밝은 미래는 과거를 다른 시선으로, 더욱 평화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자 우리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미진한 부분을 채워주시려고 오시는 예수 아기를 맞이하며, 주님께 희망을 두고 성령께 의탁하여 영원한 생명을 향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합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원문: https://www.cbck.or.kr/Notice/20242239?gb=K1200 -------------------------------------------------------- 대림 제4주일 꽃꽂이 https://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2&id=199771&Page=1&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