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묵상

양승국 신부님_지속적으로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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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06-23 ㅣ No.182999

 

다들 젊은 시절의 성급함과 미성숙으로 인해 발생한 감추고 싶은 흑역사들 한 두 가지 있을 것입니다. 지우개로 지우듯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고 싶지만, 어쩌다 한 번씩 떠올라 이불킥을 하게 만듭니다.

제 흑역사 중에 가장 큰 부분은 자격이나 역량도 갖추지 못했으면서, 수도회 내 이런저런 중책을 맡게 되면서, 이율배반적인 위선자의 모습을 참 많이 연출했던 것 같습니다. 이래서 되겠냐? 이래야 되지 않겠느냐? 목청껏 외쳤지만, 돌아보니 그런 질타는 저게 가장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더 큰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하고 말할 수 있느냐?”(마태 7,3-4)

참 인간이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웃을 저울질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의 결핍을 바라보고 필요한 조언을 건넬 때는 다른 무엇에 앞서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요구해야 마땅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도 않고 파악하려고도 애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른 위선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 한 목숨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에 대해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자질이 없는 지도자, 능력이 없는 지도자, 무엇보다도 교만한 지도자, 이기적인 지도자가 남을 가르치려 든다면, 그것처럼 위험한 일이 다시 또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침 받는 사람이나 둘 다 망하는 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2025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_조명연 신부님

 

 

예전에 어느 신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너의 글에는 깊이가 없어.”

 

상처를 받았습니다. 나름으로 열심히 묵상해서 쓴 글인데, 더구나 신자들이 어렵지 않게 읽고 묵상할 수 있도록 쉽게 쓴다고 쓴 것인데 이를 깊이 없다고 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역시 그 신부를 비판하고 싶었습니다. ‘너는 얼마나 깊이가 있는데?’라고 말이지요.

 

독일 작가 파트리트 쥐스칸트의 책 내용이 생각납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화가는 자기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깊이 없다는 말에 큰 상처를 받고 매일 고민하게 됩니다. 그 깊이를 만들려고 정말로 노력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깊이가 없다며 비판하는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화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뒤에 이 화가가 지나친 강박을 가지고 있다면서 또 다른 비판을 했습니다. 누구 때문에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를 전혀 모르면서 말이지요.

 

깊이가 무엇일까요? 수영장에 가면, 누구는 깊은 곳에서 또 누구는 낮은 곳에서 수영을 즐깁니다. 자기 수준에 맞는 깊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영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제일 깊은 곳에서 수영하면 어떨까요? 위험한 상황을 접하게 됩니다. 즉, 자기 수준에 맞는 곳에서 수영하는 것이 가장 옳은 선택이 됩니다.

 

“나의 깊이는 낮다.”라고 인정하면 편해집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나의 비판도 생기지 않습니다. 예전에 누가 상대방에 대해 비판하면 친구들과 서로 웃으며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네 똥 굵다.”

 

맞습니다. 비판받았다고 해서 억울할 필요가 없고, 또 비판받았다고 해서 비판으로 맞대응할 필요도 없습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입니다. 나는 그냥 나답게 낮은 깊이로 살면 그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고 하십니다. 이 심판은 단순한 의견이나 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단죄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이렇게 심판한다면,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향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야.”(마태 7,5)

 

남을 쉽게 판단하거나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성찰하면서, 타인에게 사랑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편안한 삶을 살면서 지금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지금의 삶은 지난날 당신이 한 생각이 현실에 반영돼 나타난 결과물이다(론다 번).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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