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묵상
송영진 신부님_<남을 심판하는 것은, ‘감히 하느님 행세를 하는 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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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심판하는 것은, ‘감히 하느님 행세를 하는 죄’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1-5).”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행세를 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남을 심판하다.’ 라는 말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 ‘너는 구원받지 못한다.’ 라고 말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하느님 행세를 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 말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말입니다. 사람을 심판하는 일은 원래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권한을 예수님에게 넘겨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2).” 종말의 날이 되면, 예수님께서는 ‘심판관’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심판’은 주님이신 예수님만의 권한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 있는 다음 이야기를 보면, 바리사이들이 함부로 남을 심판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5-49)” 여기서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라는 말은, “무지몽매한 너희는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을 당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런 말이 남을 심판하는 말입니다.
2) 반대로, 남을 심판하려다가 자신들의 죄를 의식하고 그냥 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있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 이야기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요한 8,7-9).” 그들이 돌을 던지지 않고 그냥 간 것은, 자신들의 죄를 의식했기 때문이고, 자신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말로 인정한 것은 아니더라도, 돌을 던지지 않고 그냥 간 것 자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 셈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적어도 위선자는 아니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나는 죄가 없다.” 라고 주장하면서 남에게 돌을 던지는 자가 있습니다. 또 돌을 던지지 않으면 같은 죄인으로 취급될 것이 두려워서, 또 자기 죄를 덮으려고, 돌을 던지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보는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위선자들은, “나는 죄 없는 의인이다.” 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자들이고,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라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자들이고,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하면서 ‘하느님 행세’를 하는 자들입니다.
3) 다른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죄다. 하지 마라.” 라고 말하는 것은 남을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는 말씀에서 ‘너에게’ 라는 말은 삭제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두 사람 사이의 다툼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일반적인 죄에 관한 말씀입니다.> 형제가 죄를 짓고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를 타일러서 회개시키고,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은 형제애를, 즉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그 형제의 일을 알면서도 관심 갖지 않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 명심해야 할 것은, ‘나의 죄’를 먼저 성찰해야 한다는 것과 ‘내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회개하는 사람이 남을 회개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죄를 짓고 있지만, 너는 죄짓지 마라.” 같은 말은, 아무 의미 없는, 그냥 ‘말장난’입니다.> 누구의 죄가 더 큰가?, 즉 ‘들보인가, 티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함께 회개하고,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