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묵상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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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해] 루카 9,11ㄴ-17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는 톨스토이가 쓴 단편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늘 가슴에 품고 있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살게 하는 ‘무엇’을 자기가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고 사라질 부질 없는 것들일 뿐 우리를 살게 하는 원동력은 되지 못하지요.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신을 살게 하는 ‘무엇’을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은총에서 찾습니다. ‘무상으로’라는 말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거저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공짜’는 참 좋아하면서, 정작 공짜로 나눠주는 비매품은 그 가치를 하찮게 여겨 쉽게 버리곤 하지요. 하지만 우리를 살게 만들어주는 것은 다 무상으로 얻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돌아가게 만드는 햇볕도 공기도 빗물도 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셔야만 겨우 누릴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중히 아껴써야겠지요.
오늘의 제1독서는 살렘의 임금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모시는 사제인 멜키체덱이 자기 조카인 롯을 구하기 위해 엘람 임금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고 돌아온 아브람을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아브람에게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되는 거룩한 봉헌물을 먹으라고 내어주지요. 아브람이 자기들의 전투에 참여하여 승리로 이끈 것에 감사하는 의미인 동시에, 그가 그 전투에 참여한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음을 인정한 셈입니다. 이 때 멜키체덱이 아브람에게 내어준 빵과 포도주는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바치시게 될 그분의 몸과 피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브람은 하느님의 거룩한 빵을 먹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기꺼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멜키체덱에게 내어주는데, 이런 아브람의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모신 우리가 실천해야 할 나눔과 봉헌의 의미를 예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거저 베풀어주신 양식을 받아먹었으면, 입 싹 닦고 나몰라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시면서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몸을 내어주신 것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하신 일이 아니라 다 우리를 위하여, 즉 우리가 당신께 대한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기 위하여 사랑과 희생으로 하신 일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예수님으로부터 그토록 큰 사랑을 받은 우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는 예수님의 유언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 말씀은 단지 성찬의 전례라는 ‘예식’을 반복하여 행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뒤를 따라 신앙의 길을 걷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는 힘을 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며, 그분의 사랑과 희생이 나의 행동과 삶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게 만들라는 뜻인 겁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나 또한 이웃 형제 자매를 “위해” 나 자신을, 나의 시간과 재물과 능력을 기꺼이 나누겠다는 다짐을 되새기기 위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장정만도 오천명가량이나 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 그 원리나 과정을 자세히 알 순 없지만, 이 모든 일이 배고픈 군중의 처지를 헤아리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에서, 자기 것을 먼저 챙길 생각을 하지 않고 빵을 떼어 군중에게 나누어준 사랑의 행위에서 비롯되었음은 분명하지요. 그런 예수님의 행위에는 세상의 눈으로 이해하지 못할, 그러나 세상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분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실 정도로 제자들이 지닌 잠재력과 능력을 믿어주시고 그것을 발휘할 기회를 주시는데, 제자들은 믿음이 아닌 논리와 이성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인간으로서 지니는 한계 안에 스스로를 가둬버리는 겁니다. 그런 마음가짐이 “저희에게는 … 밖에 없습니다.”라는 대답에서 고스란히 드러나지요.
그런 모습으로 살면 ‘밥값’을 못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몸과 피는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으면서,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데에는 참으로 인색하게 굽니다. 내 곳간에 빵을 채우는데에만 혈안이 되어서는, 다른 이에게 돌아가야 할 몫까지 가로채 내 욕심을 채우려고 듭니다. 그러나 욕심은 아무리 노력해도 다 채워지지 않지요. 내가 ‘조금만 더’를 외치며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고 들면, 어딘가에서 다른 이는 ‘일용할 양식’조차 얻지 못한 채 주린 배를 부여잡고 고통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불균형의 상태가 점점 더 심해지면 결국 이 세상에 속한 우리 모두가 멸망에 이르게 될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내 마음에서 탐욕과 집착을 비워내고 극심한 불균형의 문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 의도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우리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도록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이 ‘이것 밖에 안된다’며 무시한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을 손에 들고는 그것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양식인 것처럼 정성을 다해 하느님께 봉헌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그것을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시지요.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제자들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게’ 된 겁니다. 빵과 물고기의 양이 늘어난 이 기적이 언제 어떤 식으로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는 말씀을 통해 어느 하나 굶주리는 이 없이 모두가 풍요와 기쁨을 누렸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지요. 그리고 그 풍요와 기쁨은 자연스럽게 예수님께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바뀌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거는 기대와 희망이 그분의 능력을 이용하여 내 욕심을 채우려는 그릇된 방향으로 변질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 중 상당수가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아서 그분의 능력을 이용하려고 들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셨듯이, 우리 또한 자신을 내어주고 나눔으로써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웃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부족하고 약한 우리는 예수님처럼 다른 이를 위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희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욕심을 덜 부리고 자선을 실천함으로써 내 피와 살이 될 것을 이웃의 피와 살이 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을 위한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내어줌으로써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비우고 베풀어서 생긴 빈 자리에 예수님께서 머무르십니다. 예수님의 몸은 빵이 되어 우리 영혼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채워주고, 예수님의 피는 생명의 물이 되어 탐욕이라는 갈증을 없애줍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