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다해 부활 제12주간 월요일 <모든 이 안에서 내 죄를 발견하는 은총을 위해서> 복음: 마태오 7,1-5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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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라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보통 ‘내 안의 잘못을 먼저 보라’는 가르침을 떠올립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훨씬 더 불편하고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판단하던 그 사람에게서, 바로 내 죄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 들보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정으로 자기 들보를 깨달은 사람은, 남을 향한 날 선 비판을 멈추고, 대신 눈물겨운 공감과 자비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자신의 들보를 가장 극적으로 마주하고, 그 결과 타인을 향한 시선이 완전히 바뀐 인물은 바로 다윗입니다. 그의 변화에는 두 번의 결정적인 단계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나탄 예언자를 통한 말씀의 충격’이었습니다.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 세바를 차지한 다윗은 완벽한 자기기만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나탄이 찾아와 불의한 부자 이야기를 들려주자, 다윗은 정의감에 불타오릅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그런 짓을 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2사무 12,5). 바로 그 순간, 나탄은 그의 심장을 찌릅니다. “바로 임금님이 그 사람입니다!”(2사무 12,7). 다윗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네”(2사무 12,13)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1단계, 머리로 죄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변화, 그의 들보가 완전히 빠져나가는 두 번째 단계는 **‘압살롬을 통한 고통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는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맨발로 울면서 도망치는 신세가 됩니다(2사무 15,30). 그리고 마침내 그의 변화가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절정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의 후궁들을 백주 대낮에 범하며(2사무 16,22) 아버지를 모욕했던 패륜아였습니다. 그런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안도하거나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임금은 마음이 북받쳐… 울었다. …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2사무 19,1). 왜 이렇게 울었을까요? 그는 반역자 아들의 모습에서,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았던 과거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제어되지 않는 욕망 속에서 자신의 죄악을 본 것입니다. 압살롬은 바로 자신의 들보가 만들어 낸 끔찍한 거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을 심판할 수 없었습니다. 남을 향한 심판과 분노가, 자기 죄와 아들의 죄를 함께 껴안는 통한의 눈물로 바뀐 순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들보가 완전히 빠져나간 사람의 시선입니다. 이처럼 자기 죄에 대한 눈물이, 타인을 향한 자비의 눈으로 바뀌는 기적은 우리 시대의 성인, 샤를 드 푸코에게서도 똑같이 발견됩니다. 그의 첫 번째 단계 역시 ‘고해소에서 터져 나온 깨달음의 눈물’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부유한 귀족이었던 그는 젊은 시절, 신앙을 버리고 방탕한 삶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세속적 쾌락’과 ‘지성의 교만’이라는 들보가 단단히 박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위벨랭 신부님을 찾아가 논쟁을 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무릎을 꿇고 고해하십시오”라는 예상치 못한 명령이었습니다. 그 말씀 앞에서 그의 교만의 들보는 산산조각이 났고, 그는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께 돌아오는 첫 번째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짜 변화는 두 번째 단계, 곧 ‘사막에서 자신을 죽이는 긴 눈물의 시간’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는 자신의 들보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알았기에,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스스로 ‘유배길’을 떠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간 그는, 수십 년간 기도하며 과거의 자신을 죽여나갔습니다. 바로 이 시간을 통해, 그는 다윗이 압살롬에게서 자신을 보았듯, 세상 모든 사람에게서 자기 자신과 그리스도를 보는 눈을 갖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일기에 이렇게 결심합니다. “모든 사람 안에서 예수님을 보고, 모든 사람을 예수님처럼 대하기.” 바로 이 시선이, 그가 훗날 자신을 죽이러 온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되었습니다. 1916년 12월 1일, 총을 든 무장 괴한들이 그의 거처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푸코 성인을 죽이려던 이들이었습니다. 과거의 오만한 귀족이었다면 그들을 ‘야만인’이라 경멸하고 심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십 년의 눈물로 들보를 빼낸 그의 눈에는 그들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는 그들의 폭력과 무지 속에서, 한때 신을 모르고 쾌락과 오만 속을 헤맸던 자기 자신의 과거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그들을 ‘적이 아니라, 아직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불쌍한 형제’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의 ‘보편적 형제’가 되고 싶습니다.” 그가 순교의 순간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옛 죄를 발견하고, 그들을 심판의 대상이 아닌 사랑해야 할 형제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들보가 완전히 빠진 사람의 마지막 시선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가장 판단하고 미워하는 그 사람에게서, 당신 자신의 약하고 추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배우자의 그 꼴 보기 싫은 모습에서 나의 이기심을, 나를 화나게 하는 동료의 교만함에서 나의 숨겨진 교만을, 자녀의 그릇된 욕망에서 나의 세속적인 가치관을 발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직 우리 눈의 들보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주님께 청합시다. “주님, 제 눈을 열어주시어, 제가 가장 단죄하던 바로 그 사람 안에서 제 자신의 죄를 보게 하소서.리하여 심판의 돌을 내려놓고, 다윗의 눈물과 푸코 성인의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